일자리 전에 ‘신뢰’부터 나누시죠
  • 고동우 기자
  • 호수 75
  • 승인 2009.02.13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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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재계, 노동계가 서로 신뢰를 회복하지 않는 한 ‘일자리 나누기’는 그저 허울뿐인 ‘이데올로기 전투’의 도구로만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시사IN 안희태
지난 2월10일 ‘노사민정 대책회의’(왼쪽)는 일자리 나누기의 현실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는 토론회를 가졌다.
어쨌든 모양새는 그랬다. 최근 경제위기·고용위기 극복의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되는 ‘일자리 나누기’를 먼저 의제화한 쪽은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을 비롯한 노동계였다.

지난해 12월, 공식 방침은 아니었지만 “금속노조가 정규직의 노동시간을 줄여 비정규직 고용을 보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라는 한 일간지 보도가 나오자 언론·재계·정부 너나 할 것 없이 이와 관련한 언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1월15일 제2차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는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고통 분담 차원에서 임금을 낮춰 일자리를 나누는 방법을 강구해보라”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혹시 ‘Again 1998’? 모처럼 외환 위기 때와 같은 노·사·정 대타협 분위기가 형성된 걸까? 물론 이후 상황을 보면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금속노조의 ‘검토’ 결과는 지난 1월8일 발표한 ‘사회선언’에서 ‘일자리 나누기’가 아니라 고용 창출이 중심인 ‘일자리 만들기’로 나타났고, 민주노총도 성명을 통해 “이 대통령의 지시는 고통 분담이 아니라 전담 강요다”라고 발끈하고 나섰다.

현재 한국노총이 노사정위원회·한국경총과 함께 ‘노사민정 비상대책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지만, 현대자동차 등 주요 대기업노조가 가입해 있는 민주노총이 불참하는 한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김동원 고려대 교수(경영학)가 “기업 현장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징적이고 모양뿐인 합의가 될 것 같다”라고 염려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난한 합의 과정과 튼튼한 사회 안전망

정책 그 자체로만 보면, 일자리 나누기는 독일·네덜란드 등 서유럽 국가에서 일부 성공한 바 있는 꽤 현실적인 모델로 평가받는다. 이들 나라는 노동시간 단축·임금 안정(삭감)을 기본으로 한 노사정 협약과 다양한 제도 개선을 통해 ‘최대한 다수가 사는’ 사례를 만들었다.

물론 당연한 것이지만 하루아침에 뚝딱 ‘합의’하고 ‘선언’해서 이루어진 경우는 하나도 없다. 모두 지난한 노사정 간 합의와 공조 과정, 그리고 튼튼한 사회 안전망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조건이 바닥이다. 무엇보다 노사, 노정 간 신뢰가 최악이다. 정부와 재계 그리고 보수 언론이 “정규직이 비정규직에 양보하라”고 하면 당장 노동계로부터 “비정규직법·최저임금법 개악을 시도하면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라는 반발이 튀어나온다.

“임금 삭감 없는 일자리 나누기는 불가능하다”라는 논리는 “불황으로 잔업·특근을 못하는 제조업 노동자들은 이미 20~40% 가량 임금이 줄었다. 수백조원에 이르는 사내 유보금부터 내놓는 게 어떠냐”라는 반론에 부딪히고 있다. 이러한 노동계 쪽의 견해는 민주노총은 물론이고, 한국노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노사정위가 됐든, 노사민정 회의가 됐든 어떤 틀 속에서 토론을 거쳐 이견을 좁히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 있다. 일말의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지난 2월5일 민주노총 지도부 일각에서 노사민정 회의 참석 의사를 밝힌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지도부 총사퇴까지 부른 ‘성폭력 사태’가 터져나왔다. 강경파 지도부가 재등장한 것도 그렇지만, 조직 추스르기도 바쁜 민주노총이 ‘노사정 대화’에 참여할 가능성은 이제 전무해 보인다.
정부의 모순된 태도 또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정리해고를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해고 요건 완화를 추진하는 등 사회 안전망을 위협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종훈 명지대 교수(경영학)는 이에 대해 “일자리 나누기와 해고 유연화가 동시에 추진될 경우 서로 상충되는 정책으로 무엇이 정책 의지인지 불분명해지고, 오래간만에 형성되는 협력적 노사관계 구축의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라고 꼬집는다.

고용 정책에서 사회 안전망이 왜 중요한지는 네덜란드 사례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 분야를 연구한 황기돈 한국고용정보원 선임연구위원은 “네덜란드의 경우, 여성·고령자·장애인·외국인 등 노동시장의 약자 집단에 대해 관대하고 적극적 사회보장책을 실시해 노사 모두에 구조조정이 큰 부담이 되지 않도록 했다. 그 결과 기업은 국제 경쟁력을 강화했고, 노조는 노동시장의 분단화를 막을 수 있었으며, 정부는 사회적 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한다.

   
ⓒ뉴시스
정부는 일자리 나누기의 일환으로 청년 인턴 채용을 장려하지만 ‘땜질 처방’이라는 비판도 많다.
자본, 잃을 게 없는 장사?

하지만 여러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일자리 나누기는 우리 사회의 중심 화두에서 떠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이 문제를 열심히 공론화하고 있는 정부와 재계, 보수 언론 처지에서 별로 잃을 것이 없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의 고용보장을 위해 애쓴다는 인상을 심어주면서, 대기업 노조를 비롯한 노동계에 임금과 고용의 양보를 압박할 수 있는 양수겸장의 카드다.

반대로 노동계와 진보 진영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정책연구실장은 “일자리 나누기는 이미 피할 수 없는 의제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요구에 대해 우리의 대응 방식은 원칙적이고 보수적이다. 정부 등이 마음먹고 예각화했을 때 대단히 무력할 수밖에 없다”라고 토로한다.

오 실장은 이런 이유로 “원칙에서 머무르면 위험하다. 경제위기 국면은 부의 절대량이 축소되는 시기다. 자본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노동의 위기이기도 하다. 더욱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한다.
일자리 나누기와 관련한 구체적 대안을 적극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상호 금속노조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실 가능성에 대한 세밀한 검토 없이 ‘일자리 나누기’ 그 자체를 터부시하는 것은 일자리를 가진 자들이 ‘자멸’에 이르는 길이다. 이미 사회적 화두로 던져진 이상 노동 시간 단축, 주간연속2교대제, 월급제 등 대안을 갖고 정면 승부해야 한다. 이를 피하면 나누기는커녕 ‘지키기’조차 힘들어진다는 것을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알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라지만, 요즘 노동계를 보면 ‘말이라도’ 아쉬운 때가 아닐까 싶다. 외환 위기 이후 노동계 스스로 제기한 ‘사회연대’의 대안이 정부와 재계의 공격 무기로 되돌아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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