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오바마 행정부의 등장은 국제정치의 지형 변화를 예고해준다. 오바마 대통령은 부시 행정부의 도덕적 파국, 패권적 일방주의 그리고 무모한 현실주의의 덫에서 벗어나 실추된 미국의 국제 위상을 복원하고 국익을 도모하겠다는 뜻을 강력히 천명한 바 있다. 이것이 한국 외교에 주는 함의도 크다.

그러나 한국 정부와 오바마 행정부는 엇박자 외교 행보를 보이는 것 같다.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대미 외교의 상대와 상황이 급격히 변했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과거 관성에 따른 일방적·아전인수적·임기응변적 조급 외교에 급급하다. 왜 그리 서두르는가. 오바마 행정부는 주요 외교 현안에 대해 아직 정책 검토도 끝내지 않았다. 정책 변화를 지레 짐작해 외교 공세나 추파를 통해 정책 검토 과정에 영향을 주겠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한·미 FTA 처리 서두를 필요 없다

한·미 FTA 문제만 하더라도 서두를 이유가 없다. 경제 위기와 그에 따른 미국과 한국 내 보호주의 정서가 심상치 않다. 한·미 FTA의 과도한 추진은 한국 내부의 저항보다 오히려 미국 진보 진영으로부터 엄청난 정치적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암울한 경기침체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희생양을 찾는 미국 민주당과 노동계에게 한·미 FTA는 시의적절한 정치 쟁점이 될 수 있다. 빌미를 제공해선 안 된다. 이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금융 위기 이후 한·미 FTA의 득실 구조를 더욱 면밀히 검토하고, 신임 미국 행정부 및 의회 관계자와 충분히 협의한 후, 비준 등을 추진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 한다. 

오바마 행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역점을 두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아직 공식으로 요청도 하지 않은 파병이나 비전투 지원 문제를 우리가 먼저 서둘러 다룰 필요가 있겠는가. 요청이 오면 그때 가서 아프가니스탄 현지 사정, 국민 정서, 그리고 한·미동맹 등 여러 변수를 고려해 결정을 내리면 될 일인데, 요청도 오기 전에 외교통상부 고위 관리를 현지에 파견한 것은 현명한 처사라 할 수 없다. 지난해 쇠고기 파동의 교훈을 벌써 망각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더 걱정이 되는 대목은 이명박 정부가 한·미동맹의 현주소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시점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강력히 희망하는 것은 한반도에서의 현상 유지다. 이라크로부터의 순조로운 철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조기 승리, 중동 평화, 이란 문제, 국제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등 산적한 안보 현안을 제한된 국방비와 인력으로 다루어야 하는 오바마 행정부에게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고조가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북관계를 원만히 관리함으로써 미국의 근심거리를 줄여주는 일도 한·미동맹을 공고히 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하나 이명박 정부 1년 동안 남북관계는 계속 나빠져왔다. 급기야 지난 1월30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남조선 보수 당국의 무분별한 반공화국 대결책동’ 때문에 남북관계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남북 간에 체결되었던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와 관련된 모든 합의사항’에 대해 무효화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더구나 남북기본합의서 상의 북방한계선 관련 조항을 일방적으로 폐기해 일촉즉발의 군사 대결을 고조시키는 실정이다. 심지어 대륙간 탄도미사일인 대포동 2호 실험발사 움직임마저 보인다. 이는 미국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북핵 외교만 해도 그렇다. 북핵 문제를 북·미 간 협의사항으로 방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한·미·일 3국이 공조를 취한다고 풀릴 일은 더 더욱 아니다. 한국 정부가 좀더 전향적으로 나서서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북·미, 북·일 관계정상화에 일익을 담당할 때 북한의 핵 폐기를 촉진하고 한·미·일 3국 모두에게 유리한 정세를 조성할 수 있는데, 이러한 현실 인식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이제 이명박 정부는 ‘대선 공약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욱 새롭게 한·미관계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실용적이고도 신중한 변환 외교의 기치를 내거는 오바마 행정부에게 ‘네오콘’ 식의 가치외교, 기독교 원리주의적 공감대 강조, 그리고 임기응변식 제스처만으로는 통하기 어렵다. 양국 간 국가 이익의 상호보완성이 담보되었을 때만이 한·미 관계가 돈독해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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