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
직장을 그만둔 이후 시간이 남아돌다 보니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던 버릇이 몸에 익어 일 없이 노는 걸 못 견디게 되었다. 그 무렵 사촌 언니가 아기를 낳았는데, 아이가 일찍 손을 타서 고양이 손이라도 보탤 생각에 매일 육아와 살림을 도우러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가 종종 조카를 안아주었다. 집안 어른들은 ‘너도 빨리 시집가서 애 낳아라’며 웃으시는데 같이 웃진 못하겠다. 여기저기서 출산율 저하가 어떻고, 요즘 젊은이들이 이기적이라 그렇다는 둥 20대 여성이 고생을 안 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둥 되는 대로 떠들어대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지금 대한민국 현실 속에서는 아직 나오지도 않은 아이한테 너무 미안해서 애 낳을 엄두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아이가 한살 두살 커갈 때 유기농 명품 이유식에 한우를 먹일 능력도 없고, 고급 유모차 태울 능력도, 영어 유치원 보낼 형편도 안 되고, 자립형 사립고는커녕 과외나 학원을 실컷 보낼 능력도 없을 것이고 분명 수천만원대에 달할 대학 학비 내줄 능력이 안 되는 우리는, 차마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저 얼버무리고 만다. 다행히 사촌언니 부부는 둘 다 변호사라 그만한 능력이 되겠지만 나는 당장 내 입에 뭘 넣을지도 알 수 없으니 남의 애만 귀여워할 수밖에 없다.

어금니 꽉 깨물고 덤비면 될까

난 나 그림
그런 내가 만날 수 있는 남자 또한 비슷한 처지일 테고, 아마 둘이서 입에 풀칠하는 일만으로도 악전고투일 텐데, 그럼 돈 잘 버는 능력을 길러놓거나 돈 잘 버는 남자를 잡지 못한 네 탓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부자 아빠 부자 엄마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라도 열심히 살면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이 옳은 세상 아닌가. 어금니 꽉 깨물고 덤비면 뭐라도 될 수 있는 세상이 정상 아닌가. 공부 못하는 아이도, 돈 없는 집 아이도 행복해질 기회만은 공평한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 아닌가.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아이에게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문제야, 뭐든지 하면 된단다’라고 말해줄 자신은 없다. 그렇다고 죽어라 남들 밟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1%가 되라고 부추길 자신 또한 없다. 지금 한국은, 없이 사는 사람들이 돈 없이 애를 낳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아이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처럼 죄스럽게 느껴지는 나라다. 적어도 MB처럼 자식에게 ‘아버지 빌딩이나 관리해’ 하고 턱하니 말할 수 있거나 한화 김승연 회장처럼 내 자식 때린 놈들을 반쯤 죽여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한, 차마 미안해서 애 같은 거 못 낳겠다.

‘돈 없는 게 죄다, 미안하다’며 최후의 수단으로 옥상에 올라간 못사는 아버지들은 끝내 그 돈 없는 죄를 벗지 못하고 단 하루 만에 불타 죽었다. 오늘 명동 거리 한복판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대형 트럭이 끊임없이 참사 현장을 방송하며 ‘폭력 시위대가 경찰에게 투척하려고 준비 중인 골프공’ ‘화염병과 염산병으로 무장한 불법 시위대’ 등 자극적인 문구가 붙은 사진을 잔뜩 늘어놓고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가난한 아버지는 잿더미가 되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이 따위 세상에 무슨 욕을 먹으라고,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자식을 턱하니 낳아놓는단 말인가. 없는 놈들 그저 사라지라는 게 목표라면, 그대로 사라질 수밖에. 젊은 게 그만한 배짱도 없느냐고? 없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나라에서 그걸 물려줄 배짱은 없다.

기자명 김현진 (에세이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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