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예전부터 함께 모여 영화 모임을 했던 사람들과 오랜만에 만나 조촐한 송년회 자리를 가졌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변한다고 했던가. 1차에서는 서로 얼마나 변했나 탐색하는 듯한 분위기였지만, 2차로 자리를 옮기자 세월이 흘러도 사람은 그대로라는 대진리가 어느새 테이블 위로 흘러들었다. 그러다 1990년대 초반, 당시 한창 유행했던 ‘베스트 10 뽑기’ 얘기가 나왔다. 당대 제법 잘 알려진 잡지와 단행본 등등에서는 한창 이름을 날리던 감독과 평론가·배우의 ‘나만의 영화 베스트 10’을 게재하곤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추천된 베스트 10만 봐도 대략  누가 작성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다 어느덧 2008년 최고의 영화는 무엇이었나 하는 질문이 오갔다. 서로서로 얘기를 하다보니 몇 개로 답이 압축됐다. 우선 가장 많이 언급된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였다. 소문만큼 뛰어났던 영화, 역시나 최고감이다. 다음 언급된 영화는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데어 윌 비 블러드〉,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 등이었다.

주제로나 스타일로나 각각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 영화들이지만, 그럼에도 뭔가 공통된 어떤 것이 우리의 대화를 넘나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짜릿한 어떤 순간의 기억’이었다. 가령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최고 영화로 꼽는 건 이 영화의 합리적인 제작비 운용 때문도 아니요,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 때문도 아니다. 다만 한순간, 평생을 석유 사업에 바친 와중에 한 지독한 상대방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대니얼이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그 상대방을 짓이긴 뒤, “무슨 일 있으십니까?”라는 집사의 말에 “이제 다 끝났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소름끼치는 한순간 때문이었다.

지난 연말 방송에서는 각종 프로그램, 가령 ‘2008 10대 뉴스’ 등을 통해 한 해를 정리했다. 보고 있자니 우울했다. 우리의 한 해는 숭례문 화재로부터 시작해 경제 파탄과 국회 분열까지 온통 슬프고 격노할 일 투성이였다. 하지만 딱 하나, 유일한 어떤 것이 국민의 마음에 즐거움과 기쁨을 안겨주었으니, 그건 바로 스포츠다. 베이징 올림픽 당시 유도 최민호 선수가 따낸 금메달로부터 시작해 수영 박태환 선수의 쾌거, 한국 여자 핸드볼 ‘언니’들의 동메달 투혼으로부터 한국 야구대표팀의 극적인 우승까지.

최민호 선수의 눈물, 이배영 선수가 놓친 바벨

하지만 어디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준 베이징 올림픽 소식은 다만 금메달 13개에 종합순위 세계 7위라는 사상 초유의 성적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한국이 스포츠 강국이 되었느니 어쩌느니보다 더 짜릿했던 건 모조리 한판승으로 결승에 오른 최민호가 마지막 선수마저 뒤집어엎은 뒤 그동안 참았던 통한의 눈물을 소리쳐 내뿜을 때의 그 순간, 9회 말 1사 만루 위기에서 쿠바 타자가 친 공이 2루를 거쳐 1루수의 글러브에 꽂히던 그 순간, 역도 경기에 출전한 이배영 선수가 부상 탓에 바벨을 들지 못한 뒤 끝끝내 손잡이를 놓지 못했던 바로 그 순간 때문이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영화든 스포츠든, ‘순간의 기억’은 어쩌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기억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2009년, 뭐 별달리 계획할 건 없지만, 흡사 감성적 자극과 쾌락이 실생활의 물리적 지표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듯, 대한민국 국민에게 기분 좋은 기억을 남길 순간순간이 여기저기서 만들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기자명 이지훈 (필름2.0 편집위원·영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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