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속 차별과 싸우다 떠나다
  • 전혜원 기자
  • 호수 623
  • 승인 2019.08.2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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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주. 향년 49세. 한국여성민우회(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소장. 2018년부터 방송통신심의위원으로 활동했다. 지난 6월1일 뇌출혈로 쓰러진 뒤 일어나지 못했다. 68일 만인 8월8일 눈을 감았다.

1999년 민우회에서 활동을 시작한 뒤 20년을 미디어 속 차별과 싸웠다. 2004년 ‘성평등적 방송심의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소장 시절이던 2015년에는 ‘외모로 고통받는 여성을 성형수술로 변신시켜주겠다’는 콘셉트를 내건 방송 <렛미인> 폐지 운동을 이끌어 관철했다. 고인이 생전에 가장 보람 있게 여긴 일 중 하나였다.

지난해 1월 출범한 4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에 더불어민주당 추천 몫으로 활동했다. 방심위원 9명 가운데 여성은 1기 2명, 2기 1명, 3기 0명이었다. 4기 방심위는 9명 중 3명, 방송 콘텐츠를 심의하는 방송심의소위원회는 5명 중 2명이 여성이었다. 윤씨는 방송심의소위원회의 여성 위원으로서 1600건에 달하는 방송 심의 안건을 받아 회의록에 3520회 심의 기록을 남겼다. ‘안태근 사건’ 당시 성추행 상황을 삽화로 상세히 묘사한 뉴스에 대해 윤씨는 말했다. “저도 20년쯤 전에 공공장소에서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느낌이 잊히지 않는다. (중략) 제발 신중하게 다뤄주시길 부탁드린다.”

ⓒ여성신문

이 밖에도 불법 촬영물 관련 보도를 하며 여성의 다리를 촬영해 내보낸 뉴스, ‘정준영 사건’ 피해자로 지목된 연예인을 사진과 함께 실명으로 거론한 뉴스 등에 목소리를 냈다. 조현병 환자가 폭력적이라고 일반화하거나, 지적장애인을 희화화한 방송에도 적극 문제를 제기했다. 방송사 내부에서 성평등과 인권 교육을 하고 있느냐고 끊임없이 물었다.

1년 반 동안 윤씨와 방심위 활동을 함께한 허미숙 방심위 부위원장(방송심의소위원장)은 “제재 수위에 연연하기보다는 성평등과 소수자 인권이라는 가치를 제작진에게 전달하고, 발언을 회의록에 남기는 것만으로 보람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다. 4기 방심위가 성평등 심의를 강화했지만, 윤 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라고 말했다. 활동 과정에서 윤씨는 방송심의 전반에 걸친 소신 발언으로 항의와 협박, 청원 등에 시달리기도 했다. “SNS나 정당으로부터 받는 공격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했다. ‘선배는 어떻게 버티세요’ 묻더라. 그게 마지막이었다.”

20년 동안 윤씨와 같은 길을 걸어온 강혜란 민우회 대표는 “자신의 일을 너무 사랑했다. 평소에는 조용했지만, 바꾸고 싶은 세상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규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미디어가 스스로 성평등과 인권 보호를 고민하는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꿨다.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던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던 정점의 순간에 세상을 떠났다”라고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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