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의학이 장애를 없앨 거라고?
  • 김초엽 (SF 작가·<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저자)
  • 호수 623
  • 승인 2019.08.2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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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의학이 장애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기술 발전이 더 많은 선택지를 제시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장애가 소멸된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한성원 그림

 

코니 윌리스가 쓴 <여왕마저도>는 여성들의 생리가 사라진 미래를 그린다. 미래 여성들은 단결해서 생리로부터 해방을 쟁취했다. 암메네롤이라는 생리 억제 장치가 보편화된 근사한 사회다. 나는 대학생 때 페미니즘 스터디에서 이 소설을 소개하며 ‘기술은 여성을 해방할 것인가?’라는 부제를 달았다. 사실 SF에는 여성의 재생산으로부터 해방을 그리는 소설이 꽤 많은 편인데, 일부러 이 단편을 다룬 이유는 <여왕마저도>의 암메네롤과 비슷한 기술이 현실에도 있어서였다. 바로 체내 장기 피임장치다. 임플라논, 미레나 등 체내 삽입형 피임장치는 피임 효과 외에도 생리가 멈추거나 생리양이 줄어드는 부작용이 있다. 부작용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의도가 아니라는 뜻일 뿐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 혁신적인 피임장치는 모든 여성이 생리를 멈추기를 선택한 <여왕마저도>에서만큼 보편적이지는 않다. 무월경을 주목적으로 시술하는 것은 아직 뉴스에 이런 경우도 있다고 소개되는 정도이지 흔한 사례는 아니다.

현실의 피임장치는 소설 속 암메네롤에 비하면 부작용도 있고 불완전한 기술이다. 소설과 현실의 차이가 단지 기술 한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기술은 기술 자체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적으로 제한된다. 한때 나는 기술을 통한 여성의 해방이라는 아이디어에 매료되었던 적이 있다. <성의 변증법> 저자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주장처럼 여성에게 부여된 생물학적 특성, 재생산의 굴레로부터 벗어난다면 평등한 사회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인공자궁, 성과 생식의 완전한 분리, 트랜스휴머니즘이 ‘결함’을 가진 약자를 해방할 무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점점 생각이 변했다. 기술이 그 자체로 진보일 수는 없다.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성과 생식이 분리되자, 어떤 이들은 대리모 산업을 만들고 또 다른 여성의 자궁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공자궁은 여성에게 해방만을 가져다줄까? 그것은 아직 생각도 하지 못한 또 다른 종류의 기이한 착취를 동반하지 않을까? 그런 의문은 장애와 기술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는 지금도 인공자궁은 멋진 아이디어이며 현존하는 많은 고통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이 단지 어떤 몸의 문제,
즉 ‘결함’을 해결하는 데에만 집중한다면, 결함을 가진 것으로 규정된 존재들은 새로운 종류의 억압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기술이 인류를 더욱 나은 세계로 데려다줄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 충분히 고찰하지 않으면 진보는 단지 배제의 방식을 바꾸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장애학의 주류인 사회적 모델은 손상과 장애를 분리했다. 장애를 단지 신체적·정신적 손상을 지닌 개인의 문제로 규정하는 의료적 모델에 맞서서,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사회구조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것이다. 사회적 모델에 근거한 장애학과 장애 운동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성취를 거두었다. 지금도 장애학과 과학기술, 의학 사이에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듯하다. 그간 장애를 치료와 회복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던 의료적 관점이 워낙 굳건했고, 그 탓에 장애 당사자들의 권리가 유보되고 제한되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상인’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세계를 바꾸는 문제는 정치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부정할 수 없는 주축은 기술이다. 기술은 사회에서 영향을 받고 다시 기술이 사회를 구성한다.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어떤 권력이 작용하며 그 결과물이 역으로 사회구조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해왔다. 그 과정에서 과학기술에 엮인 성별, 인종, 계급의 층위가 드러났다.

기술에 대한 장애학적 접근은 아직 흔치 않다. 나는 기술의 중심에 장애인들이 들어오기를 바란다. 젠더 혁신 연구가 여성을 배제한 과학기술의 문제를 명백히 드러냈듯이, 이제 장애를 배제하지 않는 과학기술을 이야기해야 한다. 기술평가 과정에 장애중심적 관점과 접근성이 당연하게 고려되기를, 새로운 기술이 각각의 장애를 지닌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또 어떤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지 널리 논의되기를 바란다. 과학기술 정책을 세우는 자리에 장애인의 목소리를 부여하기 바란다. 궁극적으로 장애인들이 과학기술 분야에 장벽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바란다. 접근 가능한 실험실이 구현되고 학계의 장애에 대한 장벽이 낮아져야 한다. 장애인 학생들이 대학 실험 수업조차 제대로 듣기 어려운 현실에서, 장애인의 절대빈곤과 교육 접근성이 해결되지 않은 사회에서 장애인 과학자를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미래는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기술은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개인들의 삶을 바꾼다. 손상이 사회적으로 재구성된 결과가 장애라면, 장애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규정되고 재현될 것이다. 그 기술의 방향을 어떻게 제시할 수 있을까? 여러 접근법이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소설을 통한 사고실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가상의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소설이라는 분야에서, 많은 작가들이 기술이 장애에 미칠 영향과 당사자들의 관점을 고민해왔다.

엘리자베스 문의 <어둠의 속도>는 이 문제를 전면에서 다룬다. 주인공 루는 개입 치료를 받았지만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자폐인이다. 루가 사는 사회는 자폐증에 대한 초기 치료가 이미 보편화되어 더는 자폐증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시대로, 루는 자폐인의 마지막 세대로 살아가고 있다. 루의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 소설은 자폐인이 바라보는 ‘정상인’들의 행동과 언어를 묘사한다. 루가 보기에 그들은 분명한 패턴을 갖지 않는 이해하기 어렵고 이상한 존재들이지만, 루는 사회 속에서 루의 방식대로 사람들과 관계 맺고 살아간다. 남아 있는 자폐인들을 치료할 수 있는 새로운 약이 개발되면서 소설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자폐인들을 고용하던 회사 상사는 자폐인 직원들에게 추가로 지출되는 비용 문제를 들어 치료받도록 강요한다. 루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상인’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치료가 루에게 더 행복한 삶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정상인들의 주장은, 그의 관점에서는 이상하고 당황스러운 이야기다.

기술 발전은 더 많은 질문들을 가져올 것이다. 다행히도 <어둠의 속도>의 루는 최소한 자폐인들을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살고 있었다. 루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문제는 더 복잡하다. 만약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농인 아이가 인공와우 수술을 받을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농인들에게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가 편안하고 당연한 것이고, 어쩌면 소리를 들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현실의 장애인 배제는 <어둠의 속도>의 사회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심각하기에, 당사자의 주변 사람들은 수술을 권유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리는 결정은 당사자 의견이 반영되기보다 사회적 강요에 더욱 가까워진다.

기술이 장애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도 실은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SF 장편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30세기를 배경으로 하는데, 인류는 초광속 항법을 개발해 우주로 진출했고 은하 규모의 문명을 이루며 살고 있다. 의학도 생명공학도 매우 발전한 미래다. 그렇게 먼 미래이지만 이 시리즈의 주인공 마일즈는 어머니가 임신 중 전쟁에 휘말리면서 뼈가 매우 약한 선천적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30세기에도 장애를 치료하기 어려운 상황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 현실에서 기술과 의학이 모든 장애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환상에 가까운 것 아닐까.

ⓒ연합뉴스6월24일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보행 보조용 로봇 장비 시연이 열리고 있다.

 

불완전함, 연약함, 의존성의 세계

어떤 장애는 선택의 문제이자 정체성의 문제가 된다. 기술 발전이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같은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다. 무르 래퍼티의 장편소설 <식스웨이크>에 등장하는 의사 조애나는 유전적으로 작고 뒤틀린 다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식스웨이크>의 세계는 DNA가 동일한 클론으로 정신을 옮겨 몇 번이고 다시 사는 것이 보편화한 미래로, 조애나는 DNA의 결함을 수정한 클론을 만들어 평범한 몸으로 살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조애나는 새로운 다리가 어색한 나머지 자신의 몸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조애나는 결국 다음번 클론은 다시 타고난 대로 뒤틀린 다리를 달겠다고 결정한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겠지만, 장애의 경험이 삶 전반에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있을 법한 결정이다.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는 <화성의 인류학자>에서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다가 수술로 시력을 회복했지만, 그 이후 보이는 삶에 적응하지 못해 오히려 우울해진 버질이라는 남자를 소개한다. 그는 낯선 자극의 세계에서 혼란을 겪다가 다른 질병으로 다시 실명하고, 비로소 그가 속해 있던 친밀한 감각의 세계로 돌아온다.

소설이 보여주는 장애와 기술에 대한 사고실험은 현실의 사례들과도 맞닿아 있다. 기술 발전은 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시하고 고통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장애가 소멸된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미래에도 여전히 장애를 지닌 몸으로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표준형 인간에서 밀려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주목해야 할 문제는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표준의 장벽을 세우는, 그 범위 밖의 사람들을 밀어내는 이 세계 자체다.

우리가 미래를 설계할 때 그 미래가 건강하고 자율적인 개인들만의 미래가 아니기를 바란다. 우리는 어쩌면 다른 종류의 세계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서로의 불완전함, 서로의 연약함, 서로의 의존성을 받아들이는 세계를. 그곳에서는 삐거덕거리는 로봇도, 기계 부품을 드러낸 사이보그도 완전한 타자가 아닐 것이다.

※ 이번 호로 ‘김초엽·김원영의 사이보그가 되다’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하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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