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해양박물관 제공바다소년단이 오와 열을 맞춰 홍기와 백기를 번갈아 드는 모습.

 

‘겨울철 물고기잡이 전투를 힘있게 벌리자!’ ‘바다가(바닷가) 양식을 대대적으로 하자!’ ‘남포 갑문 건설을 힘있게 지원하자!’ ‘배마다 만선기 휘날리자!’ ‘모두 다 정어리잡이에로’ ‘청소년들이여! 모두 다 해양체육에로!’

부산 영도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에 가면 이런 낯선 구호가 관람객을 맞는다. 〈잊힌 바다, 또 하나의 바다, 북한의 바다〉전(10월13일까지)에 전시된 북한 포스터에 쓰인 구호다. 요란한 구호 사이로 들어서면 또 다른 선전·선동의 바다가 관람객을 맞는다. 광복절 해양 기념식에서 북한 청소년들이 선상에서 매스게임을 하고 바다소년단이 해양 활동을 하는 사진을 볼 수 있다. 북한 어린이들이 오와 열을 맞춰 절도 있게 백기와 홍기를 들고 있는 모습과 신나게 물놀이를 하는 모습이 대비된다.

ⓒ국립해양박물관 제공북한은 청소년들에게 바다 스포츠를 적극 장려한다

 

북한식 사회주의 프로파간다는 수산업 관련 사진에도 이어진다. ‘맛 좋은 젓갈품을 더 많이 생산 공급하자!’는 구호 아래 젓갈을 담그고, 생선을 갈아 어묵을 만들고, 양식장에서 어패류를 걷어 올리고, 선봉수산사업소에서 어류 연구를 하는 장면을 두루 볼 수 있다. 이어 해금강, 명사십리, 송도원 등 북한이 내세우는 명승지에서 여유를 즐기는 주민 사진도 나온다.

산업항으로 거듭나 대형 크레인이 열을 지어 있는 나진항과 대규모 리조트가 건설 중인 원산 해변 사진도 볼 수 있다. 전시회에서 북한의 변화상을 가늠할 수 있는데, 부럽지는 않다. 오히려 안쓰럽다. 사진 속 ‘억지 행복’이 부자유스러운 것은 그들의 이상이 현실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북한 수산물 생산량은 1985년 242만t을 기록한 뒤 남획으로 생산량이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양어와 양식업을 육성하지만 어선 어업이 감소해 아직 절반 수준밖에 회복하지 못했다.

국립해양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분단 이전의 북한 바다다. 일제가 어업 침탈을 위해 우리 해양 자원을 면밀하게 조사했던 내용이 흥미롭다. 2부는 본전시로, ‘북녘 바다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만날 수 있는 사진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3부는 평화의 바다를 이야기하기 위해 매러디스 호의 흥남 철수 모습을 담았다. 전시장에서는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가 흘러나온다.

ⓒ국립해양박물관 제공배 위에서 북한 주민들이 단체로 체조를 하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국립해양박물관 제공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형상화한 북한 림호철 작가의 〈수난당한 녀성들〉(2004년).
ⓒ국립해양박물관 제공일제강점기 명사십리해수욕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
ⓒ국립해양박물관 제공2016년 3월24일 원산 해안가에 배치된 장사정포의 훈련 모습.

 

북한자료원이 제공한 자료는 ‘열람 불가’

이번 기획전에는 360여 점이 전시되었다. 국립해양박물관은 통일부 북한자료원,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유물을 가져오고 남북역사학자협의회, 한스자이델재단 등에서 북한의 바다 사진을 제공받았다. 의미 있는 시도였고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하지만 남북 교류가 본격적으로 재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진 전시라 전시품이 충분하지 않았다. 국내 여러 박물관이 보유한 유물을 탈탈 털어서 겨우 만들어낸 전시였다.

남과 북이 아직 마음의 빗장을 열지 않았다는 것은 전시된 작품의 성격에서도 알 수 있었다. 북한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이름이 들어간 사진이나 전시물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주강현 국립해양박물관장은 “북한이 외부에 내보낸 자료는 대부분 프로파간다적인 것들이다. 이 중 정치적인 구호가 들어간 것들은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어서 아쉽지만 이번에는 대부분 제외했다”라고 설명했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통일부 북한자료원에서 제공한 자료 대부분은 열람이 불가능했다. 주로 북한 서적이었는데 표지만 볼 수 있고 내용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북한 음식 조리법을 담은 책만 유일하게 내용을 공개했다. 북한자료원이 자료를 제공하면서 내용을 복사하거나 촬영할 수 없는 자료라고 못 박아 연구자들도 자료를 열람할 수 없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북한 연구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 그 가능성이 원천 봉쇄된 셈이다.

북한의 바다와 관련된 자료는 특히 더 부족했다. 군사시설이 포진해 있어서인지 북한은 해안 개방에 유난히 인색했다. 금강산 관광 때 열린 해금강을 빼고는 북한의 바다를 경험한 사람이 드물었다. 김윤아 국립해양박물관 전시팀장은 “북한을 방문했던 분들을 여럿 접촉했다. 그런데 북한을 여러 번 갔던 분들도 바닷가를 가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충분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해 아쉬웠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래도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북한의 바다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북한에는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과 싸웠던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를 비롯해 1045개 섬이 있다. 압록강·청천강·대동강· 예성강 등 큰 강 하류와 리아스식 해안의 만에 주로 분포하는데, 압록강 하구의 비단섬, 황금평, 반성열도가 대표적이다. 비단섬은 작은 섬들이 신도열도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을 섬 북쪽에 제방을 쌓아 연결해 만든 인공섬이다. 황금평도 버려진 갈대밭을 간척 사업해 만든 곳으로 북한 내 단위면적당 수확고가 가장 높은 황금 들판이 되었다. 김승신 국립해양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북한 동해는 서해처럼 큰 섬은 없지만 경관이 수려한 곳이 많다. 원산만 일대에 주로 분포하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섬도 있다”라고 말했다.

북한 동해안에는 명승지가 많다. 관동팔경 중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가 북한 지역에 있다. 원산의 송도원과 갈마반도의 명사십리해수욕장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이름난 휴양지였다. 1914년 서울-원산을 잇는 경원선이 개통되면서 각광받았는데 명사십리에는 서양 선교사를 위한 해수욕장이, 송도원에는 일반인을 위한 해수욕장이 들어섰다. 근대문학가들도 이곳을 다녀간 뒤 찬사를 보냈다. 소설가 현상윤은 “규모로 보나 욕객의 수로 보나 전 조선을 통하여 제일되는 해수욕장”이라고 묘사했고, 소설가 김동인은 “물로 첨벙 뛰어들었고, 물은 소리를 치면서 환영했다. 이것은 젊음이라고밖에는 형용할 수 없는 힘이다. 해수욕장은 젊음의 상징이다”라고 찬양했다.

ⓒ국립해양박물관 제공명사십리 해변을 따라 대규모 리조트가 건설 중인 원산의 최근 모습.

 

북한은 원산에 송도원국제휴양소를 설치하고 외국인 관광객을 받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구상은 더 크다. 원산·갈마지구에 마식령스키장까지 더해서 세계적인 마이스(MICE· 부가가치가 큰 복합 전시 사업) 중심지를 구축하려고 한다. 매년 신년사를 할 때마다 삼지연 지구와 함께 이곳의 공사 진척 상황을 챙기는데 공사가 마무리 국면이다. 현대아산에서 금강산 관광을 총괄했던 심상진 경기대 교수는 전시회 개막과 함께 연 콘퍼런스에서 “관광은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여타 산업과 비교하여 물리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비용도 상대적으로 적게 든다. 북한은 개방 후 관광산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주변국과 관광산업 연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면 원산은 크루즈 기항지로도 각광받는다. 세계적인 크루즈 회사들이 한국을 잠재력 있는 시장으로 보는 이유는 제주·부산 등 이미 검증된 기항지가 있고, 아시아 크루즈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중국이라는 큰 시장이 옆에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북한이 개방을 하지 않아 이가 빠진 상황이었는데 원산항이 열리면 부산-원산-블라디보스토크- 일본으로 이어지는 크루즈 루트가 완성된다.

ⓒ국립해양박물관 제공7월22일 부산 영도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열린 〈잊힌 바다, 또 하나의 바다, 북한의 바다〉전(10월13일까지) 개막식.

 

과거의 바다에 대한 고찰은 이렇게 미래의 바다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선사시대 이래의 북한 바다를 보여주는데, 고구려와 발해의 일본 항로는 앞으로 북한이 개방했을 때 환동해경제권의 물류가 어떻게 이동할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고구려와 발해의 일본 항로는 니가타와 청진을 오가던 북송선 항로와도 대체로 비슷하고, 기항지는 북한이 경제특구로 설정한 나진·선봉지구와도 인접해 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있어서 북한 여행이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젊은 세대에게 북한은 어떤 여행지일까? 팝아티스트 강영민 작가는 북한을 ‘힙스터 나라’로 재해석했다. 그는 “주체적으로 딴 길을 걸었던 북한이 힙스터들의 최애템(최고로 애정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주류 문화에 거리를 두고 반(反)문화를 즐기는 힙스터들에게 ‘나는 당신들이 바라는 방식으로 변화하지 않겠다’고 국가적으로 선언한 북한은 매력적인 여행지다”라고 주장했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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