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의 사건’에 대한 검찰 특별수사단(단장 여환섭 당시 청주지검장) 수사의 핵심 과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 검찰 특별수사단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폭력·뇌물 등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나? 둘째, 김 전 차관을 형사처분 할 수 있다면 2013년(1차 수사)과 2014년(2차 수사) 검찰 수사 때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나?

2013년 당시 박근혜 청와대가 경찰 수사에 외압을 가했다거나, 고위 검사 출신 김학의 전 차관을 검찰이 봐줬다는 의혹이 일었다. 검찰에 집중된 권한(영장청구권·수사권·수사지휘권·수사종결권·기소권 등) 문제도 자연스럽게 불거졌다. 제 식구인 1차·2차 검찰 수사팀에 대한 수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시사IN 이명익2013년 ‘김학의 사건’ 1차 수사 때 경찰 수사팀을 지휘한 이세민 전 수사기획관

 

검찰 특별수사단은 6월4일 김학의 전 차관을 뇌물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첫 번째 과제는 푼 셈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두 번째 과제는 풀지 못했다. 검찰 특별수사단은 박근혜 청와대 시절 수사에 외압을 행사한 의혹을 받은 곽상도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현 자유한국당 의원)과 이중희 전 민정비서관의 직권남용 등 혐의에 대해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들어 불기소했다. 1차·2차 검찰 수사팀의 ‘김학의 봐주기 의혹(직무유기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검찰 특별수사단은 이렇게 밝혔다. “검찰 내·외부의 부당한 개입이나 압력 등 직권남용 의혹에 대해 관계자들 모두 부당한 지시·간섭·외압은 없었다고 진술하고, 압수수색을 통해서도 수사 단서를 발견할 수 없었음.”

이 같은 발표를 두고, 2013년 경찰 수사팀을 지휘한 이세민 전 경찰청 수사기획관이 반발했다. 그는 지난 4월12일, 4월14일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특별수사단에 나가 조사를 받았다(2016년 그는 경찰을 떠났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외압이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검찰 특별수사단이 묵살했다고 주장했다. 검찰 특별수사단의 불기소 결정을 보고, 그는 참고인 진술 내용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검찰에 정보공개 청구를 했다.

〈시사IN〉은 이 전 수사기획관을 두 차례 만나 100쪽이 넘는 참고인 조서 전체를 살폈다. 조서에는 2013년 수사 당시 경찰 지휘관으로서 느낀 외압의 정황이 담겨 있었다. 검찰 특별수사단도 풀지 못한 2013년 경찰 수사 당시 외압과 1차·2차 검찰의 부실 수사 의혹에 대해 이세민 전 수사기획관이 입을 열었다.
 

ⓒ연합뉴스지난 6월4일 '김학의 사건 검찰 특별수사단' 여환섭 단장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2019년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와 검찰 특별수사단에 출석했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지만 한동안 인터뷰를 안 했다.

2013년, 2014년에 이어 올해 세 번째 시작된 검찰 수사는 나로 인해 불거진 게 아니었다.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재수사 권고 끝에 검찰 특별수사단이 꾸려졌다. 검찰 과거사위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수사 외압의 피해자로서 증언을 해달라고 해서 나갔다.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울화를 꺼내야 하는 일이라 굉장히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의미를 생각하며, 당시 업무 노트 등을 찾아 정확하게 진술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검찰 특별수사단에서 수사 상황을 언론에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또한 최대한 협조했다. 당시 언론의 관심이 정말 뜨거웠다. 하루에도 전화가 수십 통씩 오고, 집으로 기자들이 찾아왔다. 검찰이 알아서 잘할 거라 믿고 인터뷰를 자제했다. 공직자 출신으로서 그리고 수사를 해봤던 사람으로서, 이 정도 증언과 자료를 제출하면 검찰이 열심히 수사할 줄 알았다.

검찰 특별수사단은, ‘외압이 없었다’고 관련자들이 다 증언했다고 발표했다.

‘증언을 바탕으로 수사를 했지만, 6년 전 사건이라 관련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불기소한다’라는 식으로라도 발표했으면 답답해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한 진술을 안 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경찰들도 외압의 정황을 진술한 것으로 안다. 그래서 검찰 참고인 조서 정보공개를 신청했다. 이걸 보면 누가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있다. 먼저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대놓고 ‘사건을 그만하라’고 말해야 수사 외압인가? 수사 지휘·실무를 직접 맡지 않은 간부가 ‘그 사건 어떻게 되고 있어? 속도 좀 내야지. ○○○는 언제 부르냐’ 식으로 개별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도 수사 외압이다. 요즘 경찰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면 기록을 남기고 보고하게 되어 있다. 그런 행위 자체가 수사팀의 독립된 판단에 영향을 주거나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13년 3~4월 경찰이 김학의 사건을 수사하던 초기 수사 지휘를 맡았다. 수사기획관을 맡은 지 4개월 만에 갑자기 인사 조치됐다. 수사 진행 도중 이뤄진 이례적인 인사였다. 수사 지휘의 핵심을 담당했다가, 경찰대학교 학생지도부장으로 발령 났다. 임기가 1년가량 남았던 김기용 경찰청장(2012년 5월~2013년 3월 재임)도 경질 통보를 받고 물러났다. 수사 실무를 맡은 강일구 계장(수사팀장)은 김학의 수사 이후 수사부서 내 비수사 분야인 KICS(형사사법포털) 담당으로 이동했다.

검찰 특별수사단에서 수사 착수 전후 외압을 모두 겪었다고 증언했다.

먼저 2013년 경찰 수사 착수 전 상황을 보자. 김학배 당시 경찰청 수사국장은 ‘김학의 사건 관련해서 청와대 곽상도 민정수석과 통화하고 보고했다’라고 이성한 당시 경찰청장(2013년 3월~2014년 8월 재임)에게 말했다. 내 업무 노트를 보면 2013년 3월5일자에 이런 내용이 쓰여 있다. ‘김학배 국장이 말하길 인사권자에게 전화가 왔다.’ 곽상도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추정했다. 사건 당시 2013년 3월15일 김학배 국장이 수사 착수에 미온적이라, 반기수 과장·강일구 계장과 함께 찾아갔다. 김 국장이 계속 보고를 안 받고 딴청을 피워, 강일구 계장이 이렇게까지 말했다. ‘국장님, 예전에 한화 김승연 사건 때 서울청에서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그때 원칙대로 하지 않아서 여러 사람 다치고 그랬는데 제가 그때 뒷마무리 수사를 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강 계장이 사건을 맡을 사람이 없으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고 결국 수사에 들어갔다(이에 대해 김학배 당시 경찰청 수사국장은 〈시사IN〉과 전화통화에서 “너무 예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강일구 당시 계장은 “그런 취지의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와 같은 수사 외압의 정황을 이번 검찰 특별수사단에 가서도 증언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앞줄 오른쪽 두 번째)은 건설업자 윤중천씨 등으로부터 1억6000만원대 뇌물을 수수하고 성접대를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또 다른 일도 있었나?

2013년 3월13일 이전 상황으로 기억한다. 박관천 당시 청와대 행정관이 나를 경찰청 (수사)국장실로 오라고 했다. 박 행정관이 엄지손가락을 올리면서 ‘기획관님, 기획관님 이분이 지금 관심이 많습니다’ ‘큰일납니다, 기획관님. 기획관님’이라며 계속 내 직책을 부르면서 말했다. 당시 김학의 사건 관련 범죄 첩보를 직접 진행하지 말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이나 말로 부담을 줬다. ‘야 이거 상당히 곤란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당시는 김학의 차관을 청와대가 내정하기 이전이었고, 청와대에 첩보 보고를 한 상태였다. 첩보 단계에서 내사 단계로 그리고 수사 단계로 진행되는 것이 부담스럽고 시끄럽겠다고 생각했다.

수사 착수 후에 겪은 외압은 뭔가?

김기용 경찰청장에서 이성한 당시 경찰청장으로 바뀐 다음 관련 회의를 예로 들어보겠다. 내 업무일지에 따르면, 2013년 4월4일 경찰청장·차장·국장·수사기획관 등이 함께하는 회의에서 이성한 경찰청장이 이 사건을 ‘김학의 전 차관 성접대 사건’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다. 대신 ‘건설 브로커 사건’이라고 칭하라고 지시했다. 사건 명칭 자체가 부담스러웠던 것 같았다. 또 같은 해 4월 초 정도에 경찰청장 독대 보고를 했다. 이해하기 쉽게 범죄 인물도까지 그려서 보고했는데, 이성한 경찰청장이 ‘보고하는 내용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경찰청장이 사건에 관심이 없고 수사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성한 경찰청장이 ‘남의 가슴 아프게 하면 벌받는다’고 내게 말해서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이런 이야기를 수사팀에 한마디도 전하지 않았다. 수사팀 사기가 떨어질까 걱정해서다. 이성한 경찰청장의 외압에 대해서는 검찰 특별수사단에 가서 처음으로 진술했다. 수사 착수 후 외압에 대해서는 내가 다 안고 갔기 때문에 증언할 사람이 많지 않지만, 이는 모두 사실이다(이에 대해 이성한 당시 경찰청장은 〈시사IN〉과 전화통화에서 “할 말이 없다”라며 전화를 끊었다). 2013년 3~4월 수사 착수 전후 상황은 모두 검찰 특별수사단에서도 진술했고, 참고인 조서에 기재된 내용이다.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간 지 4개월 만에 경찰대학교 학생지도부장으로 인사 발령이 났다.

경찰대 학생지도부장 발령은 좌천성 인사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경무관 보직 중 가장 말직이라고 소문난 자리다. 내가 김학의 사건을 해서 좌천당했다고 경찰 내에서도 말이 파다했다. 그렇지만 경무관 계급 정년이 3년 정도 남아서 당시 소청이나 행정소송 같은 걸 하질 못했다. 이의를 제기하려면 그만둘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경찰수사연수원장, 그리고 마지막에 충북지방경찰청 차장으로 근무하며 계속 지방을 돌았다. 결국 2016년 경찰을 나왔다. 그럼 그때 경찰이 김학의 사건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지금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사건을 인지하면 수사하는 게 사법경찰관의 임무다. 형사소송법에 명시되어 있다. 원칙대로 한 것뿐이지, 대단한 걸 한 게 아니다. 오히려 범죄를 인지하고도 수사를 개시하지 않으면 그게 직무유기다. 이렇게까지 인사 보복을 당했어야 했나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울화가 남아 있다. 그런데도 검찰 특별수사단은 나의 진술 등에 기반해 왜 이런 부분을 집중해서 수사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외압을 증언한 사람이 없었다고 발표했을까. 결국 당시 이 사건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수사하려 했던 경찰들의 존재가 드러나는 게, 검찰로서는 불편한 일이라 그러지 않았나 싶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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