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관대함과 엄격함이 공존한 해였다. TNS미디어에 따르면 2008년 12월 넷째 주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10개 중 MBC 〈종합병원2〉를 제외한 9개가 모두 낭만적 사랑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이 가운데 시청률 1위 KBS 〈너는 내 운명〉과 5위 SBS 〈아내의 유혹〉은 파격적 사랑을 소재로 시청자의 이목을 끈다. 이를 보는 시청자의 반응도 엇갈린다.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것과 ‘개인의 감정은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는 견해이다.

개인의 감정이 존중받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사랑’에 대한 가치 또한 높아지는 데 반해 법과 제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대학생 정세영씨(29)는 “텔레비전만 켜면 불륜이 아름답게 나오는데 개인이 그런 일을 저지르면 처벌한다는 것이 이상하다”라고 말했다.
                                                                                              -편집자 주

2008년 한국에서 사랑과 가족에 대한 가장 파격적인 소재를 사용한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일 것이다. 동명의 원작 소설(박현욱 저)의 결말은 아내와 나, 아내의 새 남편. 그리고 아버지가 불분명한 아내의 아들이 해외에 나가 한집에 살게 될 가능성을 내비치는 것으로 끝난다. 나는 “당신과 살아보니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았고, 그래서 그 사람과도 결혼하고 싶다”라는 말에 못 이겨 결국 아내의 중혼을 허락하고 만다. 결국 일처다부 형태의 가족을 꾸리고야 마는 ‘아내’. 일부일처를 기반으로 한 결혼제도를 법으로 규정해놓은 한국 사회에서 당연히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영화는 전국에서 관객 180만명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고, 3년 전 나온 원작 소설 역시 다시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

‘사랑’에 대한 국민적 관음증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영화와 드라마 같은 비현실 영역에 머물지 않았다. 탤런트 옥소리씨를 둘러싼 ‘간통죄’ 논란도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였다. 그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간통은 법으로 처벌할 문제가 아니라며 위헌청구소송도 냈지만 헌법재판소는 법의 유효성을 인정했다.

사랑, 학계에서는 오래된 주제

성은 지극히 개인적 영역이다. 아직도 개인의 성에 대한 문제를 공공연히 말하기를 꺼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는 개인의 성생활을 법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부부로 인정한 남녀의 경우 법이 배우자의 성적 배타권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결혼한 남녀가 다른 사람과 하는 성행위를 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위)는 개인의 사랑을 허용하는 범위를 생각하게 한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판결에서 간통죄가 합헌 판정을 받기는 했지만 재판관들의 찬성과 반대가 4대5로 ‘위헌 같은 합헌’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개인의 성적 결정권을 법으로 통제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논란은 증폭되고 있다. 간통죄에 대한 사회 인식이 변하는 것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인식이 관대해지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한국 사회는 남녀의 사랑을 용납할 수 있는 부분과 용납할 수 없는 부분으로 나눈다. 그리고 ‘순수한 사랑’ ‘불륜’ ‘간통’ 따위 단어를 붙이며 도덕성 논란을 부추긴다. 반면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낭만적 사랑’을 개인의 자각과 함께 진행된 근대화의 산물이라며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다.

대표 학자로는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있다. 그는 저서 〈현대사회의 성·사랑·에로티시즘〉에서 “낭만적 사랑은 개인의 삶에 어떤 서사의 관념을 도입한다. 이것은 숭고한 사랑이 가진 성찰성을 근본적으로 확장한 형식이다”라고 설명했다. 로맨스(romance)라는 단어에는 ‘이야기를 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낭만’은 역사적으로 ‘서사’적 요소를 담고 있다.

사람들이 타인의 로맨스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것도 ‘이야기’가 가진 매력 때문이다. 4년 전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정 아무개씨(39)는 이제야 ‘아줌마 모임’이 자연스러워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부들끼리 모이면 다른 사람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다. 몇 동 누구가 바람을 폈다는 이야기를 몇 시간씩 하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요즘은 정씨도 이야기에 집중하고 ‘만약 나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고 한다. 그녀는 “남이 불륜을 저지른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지만 사실 나도 키 크고 잘생긴 남자를 보면 매력을 느낀다. 다른 주부들도 속내는 다르지 않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기든스에 따르면 낭만적 사랑의 애착 속에는 숭고한 사랑의 요소들이 성적인 열정의 요소들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낭만적 사랑은 사랑에서 성을 분리하면서 새로운 방식의 의미를 부여했다. ‘미덕’은 단지 순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특별한 사람’으로 가려내는 특징이 된 것이다. 이 특별한 사람과의 사랑이 현실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단이 된다는 것은 낭만적 사랑의 대표적인 신화를 만들었다.

낭만적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은 서양의 근대화와 함께 나타났다. 근대 이전에는 결혼은 철저히 계급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근대에 들어와 개인의 영역이 확장되고 개인 의사가 존중되기 시작하면서 ‘낭만적 사랑’이라는 개인 감정이 결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상대에 대한 성적 배타성을 제도로 인정하는 ‘결혼’이 성과 사랑을 합치시키는 요소가 된 것도 이때부터다. 함인희 교수(이화여대 사회학과)는 “현대사회에서는 사랑이 종교를 대신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개인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이 종교로 한정되었다면 차차 사랑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됐다.

ⓒ시사IN 윤무영탤런트 고 최진실씨의 삶은 ‘사랑’과 ‘법’이 충돌할 때 생기는 문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근대화 과정이 서양의 그것과 달랐듯 성·사랑·결혼의 관계가 합치되는 과정도 다르게 나타났다. 대학원생 박 아무개씨(31, 남)는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온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이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라는 견해에 동의한다”라고 말했다. 아직도 결혼과 사랑이 함께 갈 수 없다는 의식이 현실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인은 미디어를 통해, 사랑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는 낭만적 사랑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었다. ‘사랑’을 둘러싼 현실과 이상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실적 고려를 우선으로 한 결혼 생활에서 개인은 ‘감정적 공허함’을 호소한다.

정 아무개씨(39)는 13년 전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동네 도서관에서 만나 연애를 시작했지만 키가 작고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 생김새 때문에 사랑하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상위권 대학 출신에 고등학교 선생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었기에 단지 ‘이 사람과 결혼하면 편안하겠다’는 생각으로 남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딱히 좋은 것도 없었지만 마다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주변 사람에게 정씨 남편은 ‘좋은 신랑’으로 정평났다. 매일 퇴근 직후 집에 들어오고, 주말이면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 댁에 내려가 일을 거든다. 그러나 정씨는 “겉으로 보기에 문제는 없지만 사랑한다든가 성관계를 가지면서 만족한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다. 집에만 있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과 결혼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부쩍 많이 했다”라고 고백했다.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은 부부 관계는 상대의 사랑에 대해 관대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아무개씨(36)가 남편과 마지막으로 성관계를 맺은 것은 2년 전쯤이다. 남편은 직장을 옮긴 이후 퇴근시간이 늦어졌다. 이씨는 “늦게 들어온 남편이 씻지도 않고 잠자리에 드는 일이 많았다. 처음에는 버릇을 고쳐보자는 생각으로 관계를 거부했다”라고 말했다. 남편은 이씨가 왜 그러는지 묻지 않은 채 계속 관계를 요구했고 나중에는 이런 요구마저 끊겼다. 이씨는 “가끔 전화가 오면 나가서 받고, 집에 안 들어오는 걸 보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 같다.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씨가 남편의 외도에 너그러운 것은 언젠가는 이혼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혼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양육권과 재산 분할 등 고민해야 할 문제가 많다. 아직 아이는 어리고 경제가 안 좋아 이씨는 이혼을 미뤄뒀다. 그는 “내가 남편과 잠자리를 안 하면서 남편이 다른 사람과도 관계 맺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 문제이고 우리 문제이니까 우리 방식으로 풀고 싶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윤무영가족을 중요시하면서 성매매가 일상화된 한국의 상황은 모순 그 자체이다.
2008 한국, 사랑과 법의 충돌

개인의 감정이 존중받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사랑’에 대한 가치 또한 높아지는 것에 반해 법과 제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탤런트 최진실씨는 전남편 조성민씨와 이혼한 상태였다. 표면으로 드러난 둘의 이혼 사유는 조성민씨의 외도다. 최씨는 두 아이의 양육권을 갖는 조건으로 조씨의 빚 10억여 원을 대신 갚아주고 서로 이혼에 합의했다. 조성민씨는 이혼 이후 당시 외도했던 상대 여성과 함께 살고 있다. 이로써 조씨는 자신의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났고 최진실씨도 과거의 사랑을 정리했다. 최씨 어머니에 따르면 이혼한 이후 2년여 동안 조씨는 아이와 최씨가 있는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사이에 부부 관계와 가족 관계는 해체된 것이다. 그럼에도 최씨의 자살 이후 법은 2년 전 합의 아래 정리된 둘의 관계를 되살려놓았다. ‘친권법’ 역시 사랑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성매매를 둘러싼 상황도 가족제도와 충돌한다. 성매매특별법은 성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모두를 처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성매매 자체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기혼 남성이 성매매 여성과 관계를 가졌을 때 배우자가 처벌을 원한다면 간통죄 역시 성립한다. 그러나 현실은 복잡하다. 결혼 19년차인 정 아무개씨(41)는 남편이 여성 접대원이 나오는 유흥업소에 가는 것에 무감각하다. 그는 “남편 회식이 있는 날이면 으레 그런 곳에 갔겠지라고 생각하고 만다. 일이라고 생각해야지 다 신경 쓰고 살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서울여성재단 이성은 연구원은 “한국 사회의 일상화된 성매매 문화는 남성으로 하여금 결혼 관계 내의 성적 배타성이라는 계약을 망각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라고 지적했다.

낭만적 사랑이 사회 전면에 등장하면서 가족제도 내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지 않던 분위기를 질타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가족 모델이 인정받는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그동안 가족은 부부처럼 혼인으로 맺어지거나, 부모·자식과 같이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을 말했다. 남녀로 구성된 일부일처 제도를 기반으로 한 한국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국민 정서 속에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방송인 허수경씨는 2008년 한 해 ‘싱글맘’으로 유명세를 탔다. 남편과 이혼한 그녀는 정자은행에서 기증받은 정자로 임신했고,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남녀와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아닌 한 여성의 의지만으로 자식을 가진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 등장하는 일처다부제 형태의 가족에 대해 관객이 무조건 비난을 보내지만은 않는 것도 새로운 가족 모델에 대한 고민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대안가족’ 논쟁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관객도 있다.

가족관의 변화는 ‘평생 결혼’의 개념까지 약화시켰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보수적 결혼관의 지배 아래 이혼에 대해 부정적 시선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과거 한국은 처첩제를 바탕으로 한 일부다처제가 용인되었고,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일부일처제가 정착되었지만 앞으로 ‘지속적 일부일처’ 형태가 가장 보편의 결혼양식이 될 것이다”라는 견해도 있다. ‘지속적 일부일처제’란 지금과 같은 일부일처제가 유지는 되지만 개인은 일생 동안 여러 배우자를 만나 일부일처 가정을 여러 개 꾸리며 살게 될 때 실현될 수 있다. 서양의 경우 지금도 이런 형태가 보편적이다.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대통령 취임 후 5개월 만에 부인 세실리아 여사와 이혼했다. 둘은 11년 전 각자의 배우자와 이혼한 뒤 재혼한 사이였다. 세실리아 여사와의 이혼 이후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탈리아 모델 출신 배우 카를라 브루니와 다시 결혼했다. 그러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영을 분리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익숙한 프랑스 사회에서 이는 큰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가족이란 밥을 다 먹은 밥상을 치우지 않고 앞에 둔 채로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관계다.” 얼마 전 발행된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한 대목이다. 이 부분의 화자인 ‘딸’은 도시로 떠난 뒤 시골집을 찾았을 때 ‘엄마’가 어질러진 일상을 보여주는 것을 꺼린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이미 자신은 ‘손님’이 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딸’이 말하는 가족의 정의에 사랑과 혈연관계는 포함되지 않았다.

기자명 박근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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