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리버럴’의 책임을 묻다
  • 엄기호 (문화 연구자)
  • 호수 622
  • 승인 2019.08.23 17:3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이니치로서 비판적 지식인인 서경식은 오래전부터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일본의 저항 세력인 ‘리버럴’의 책임을 끈질기게 질문하던 사람이다. 그는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인 다카하시 데쓰야와 나눈 대담을 묶은 책 <책임에 대하여>에서 일본이 왜 이렇게 극우화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리버럴의 책임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묻고 있다.

먼저 이 두 사람은 일본이 일종의 ‘도금(鍍金)’된 상태였다고 진단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 사회는 전쟁을 낳은 근본 원인을 돌아보고 철저히 발본색원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이런 불철저한 반성과 청산의 결과, 전후 미국에 의해 강요된 민주주의와 헌법이 지닌 ‘도금’이 벗겨지고 그 ‘본성(地金)’이 지금 드러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들은 이것을 ‘수십 년의 시차를 두고 표출된 일본의 패전’이라고 표현한다.

ⓒ이우일 그림

전쟁에 대해 철저히 청산하고 책임을 지지 못한 원인이자 결과로 이들이 지목하는 것은 윤리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만드는 데 일본이 실패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제목이 <책임에 대하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에 대해서만 묻는 것이 아니다. 패전 이후 일본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책임에 대해 판단(judgement)하는 주체, 윤리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일본의 좌파 세력이다. 냉전이 해체되기 전에는 일본의 전교조인 일본교직원조합이 소위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를 가르치는 구실을 했다. 이때에는 이런 방식으로 평화교육이나 인권교육이 이뤄져 일본 사회에 대한 좌파들의 대응이 가능했고 어느 정도 활발했다.

냉전의 붕괴는 전 세계 어디나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좌익이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사건이었다. 그 결과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으로 싸워 나갈 수 있을지 시험대에 오른 국면이 도래했다. 그러자 좌익의 초라한 실력이 그대로 드러났다. 한 명 한 명이 “스스로 따져보고 판단해서 선택”하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조직에서 공유되는 것”을 따라한 것에 불과했다. “조직이 목표를 잃어버리면 개인에게도 목표가 남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히노마루·기미가요 강제에 저항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가 되어버리고 오히려 보수적인 기독교인 음악 교사 같은 사람들이 저항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전쟁 책임에 대해 한 명 한 명 개인들도 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유의 말이 아니다. 서경식은 “너희 일본 사람 하나하나가 다 나쁜 놈들이고 책임을 져야 해”라고 전체주의화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 방식이야말로 개인의 책임을 묻는 듯하면서 개인을 전체화하는, 서경식이 가장 반대하는 언어다.

이런 언어의 단적인 사례가 일본의 식민 지배와 북한의 납치 문제이다. 납치 문제가 터지고 난 다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조선총련)와 친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180°로 돌변하는 사례가 왕왕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서경식은 “납치 문제로 인해 식민 지배에 대한 자신들의 감정적인 죄책감이 반전될 계기가 주어진 것”이라고 진단한다. 북조선이 순수하게 완전무결한 피해자에서 천하의 나쁜 놈이자 가해자로 돌변함으로써 자신들의 죄책감도 같이 씻어버리며 책임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개인이 윤리적 주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윤리적 주체로서 개인은 다카하시의 개념으로 본다면 판단을 하는 것이다. 판단을 한다는 의미는 쪼갠다는 것이고 쪼갠 것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서경식의 말처럼 책임을 분절화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관해, 어떤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로,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느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책임의 분절화다.

냉소적 주체로서만 존재하는 ‘무력한 리버럴’

이 책임의 분절화가 되지 않는다면 “국가의 정체성과 개인의 정체성이 뒤섞인 정신”이 되어버리며 주어가 자기 자신에서 ‘우리’로 바뀐다. “우리 일본인만 나쁘다고 하지만 너희 조선인도(…)라는 유치한 논리”가 들어서게 된다. ‘그저 송구스럽다는 태도’나 ‘무한한 부끄러움’과 같은 말은 책임을 지는 말이 아니다. 이런 말에는 내용이 없다. 서경식은 이것을 “내용은 없이 그저 죄송하다는 일종의 코드밖에 없”으므로 “그것이 역전되는 순간에 내용도 사라져”버린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에 변화의 가능성은 없다.

서경식이 구원의 가능성을 집단이 아니라 개인의 윤리적 선택에 두고 있다는 것은 책의 중간에 소개되는 프리모 레비의 소설 <릴리트>에 나오는, 아우슈비츠에서 만난 로렌초라는 이탈리아 노동자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로렌초는 “완전히 자율적인 자신의 윤리관을 토대로 그런 궁극의 현장(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에게 음식을 나눠주었다”라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의 가장 큰 메시지는 “인간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라는 점이다. 단 한 명이라고 해도 이런 인간의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가 “인간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냉소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저항”이 된다.

나는 일본 리버럴에 대한 서경식의 비판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서경식이 일본의 리버럴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그들이 일본 사회의 책임을 근본까지 파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행간을 통해 내가 독해한 바에 따르면, 정치적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적 윤리로서 스스로를 리버럴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두 가지 역할을 해야 한다.

하나는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완벽히 분리해 종교적 수준으로 보일 정도로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따지고 판단하는 ‘고독한 존재’가 됨으로써 소위 그 사회의 ‘양심’으로 윤리적 주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주체로서의 리버럴로, 윤리적 책임을 지는 개인이 탄생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리버럴의 역사적 역할이다. 일본의 리버럴들은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

대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냉소적 주체로서의 개인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책에서 다카하시가 비판하는 우치다 다쓰루다. 우치다 다쓰루는 불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선 이들에게 ‘그렇다면 정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냐’고 반문한다. 자기처럼 식민주의자로 지목된 사람의 고통에 관해서는 어떠냐고 질문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매우 의미심장하게 괄호에 넣어 이런 말을 붙인다. “뭐 별로 상관없지만.”

이 마지막 말이 사실은 리버럴들의 존재 방식을 잘 드러낸다. 다카하시는 이에 대해 우치다가 “일견 겸허해 보이지만 실은 냉소적인” 태도라고 말한다. 윤리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형성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로부터 발을 빼고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그건 내셔널리즘이죠” “민족과 국가는 낡은 것입니다”를 반복하는 냉소적 주체로서만 리버럴이 무력하게 존재하는 것에 책임을 묻고 있는 게 아닐까.

이게 어디 일본만의 문제인가. 만일 이것을 보고 ‘역시 일본은…’ 하고 중얼거린다면 바로 그런 독해를 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책이 비판하는 함정에 빠질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그냥 통째로 일본인이 옳은가, 조선인이 옳은가라는 식의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다수의 반대편에 무엇이든 그것을 집단주의·민족주의라고 냉소하며 무기력하게 사회에서 발을 빼는 존재들이 있다. 만일 개인이 이런 냉소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의 존재 양식이라면, 이것은 슬픈 일이며 비극이다. 서경식의 글은 이 절망에 저항하며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한다. 책임을 분절할 줄 알고, 분절된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기에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주체, 그런 개인의 가능성 말이다.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