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최고의 솜씨 보여주는
두 중견 작가

배명훈 (SF 작가·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부대표)

 

아직도 SF 불모지 타령을 하는 사람이 가끔 눈에 띄기는 한다. 업데이트가 안 된 탓이다. 요즘 SF는 일종의 붐이다. 재능 있는 신인들이 다시 배출되기 시작했고 SF 작가 지망생도 많아졌다. 양이 질로 전환되는 징후도 뚜렷해서 공모전을 거듭할 때마다 응모작의 수준이 눈에 띄게 높아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데뷔한 작가들의 작품 수준이 높아진 것은 물론이다.

 

다만 SF계에는 아직 비평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보니 출판사의 홍보 문구나, 기사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타이틀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 “이 작품이야말로 한국 최고의 SF”라는 식이다. SF 작가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추천하는 경우에도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수작을 소개하는 일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이런 과정에서 은근슬쩍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명제가 있다. 원래 SF를 써오던 작가들은 이제 예전만큼 반짝이지 않게 된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오늘의 테마는 모던 클래식, ‘원래 있던 작가들’이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듀나가 SF도 써?”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영화평론가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듀나는 현대 한국 SF의 중시조 같은 작가다. PC 통신을 매개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SF 독자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 중 일부가 자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아직 충분히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흥미로운 작품이 하나둘 나타나던 시절, 듀나는 홀로 프로 수준의 SF를 써내는 작가였다고 한다. 이 문장이 간접인용으로 끝나는 것은 내가 그 시절의 한국 SF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2005년에 내가 SF 작가로 데뷔했을 때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은 대체로 이미 듀나의 팬이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모두 동시대의 동료 작가가 되었다. 한국 SF는 그런 모자이크다. 이제는 정말로 세대를 넘는 작가들이 선후배 개념 없이 나란히 선 동료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 데뷔한 신인 작가보다는 예전 세대의 태도에 더 크게 좌우되는 모자이크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거의 유일했던 프로 작가’가 ‘여럿 중 하나’로 포지션을 옮기는 일이니까.

물론 듀나가 좋은 작가인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지금도 현역에서 빼어난 SF를 써낸다는 점이 우선이다. 〈아직은 신이 아니야〉는 ‘듀나가 요즘은 상대적으로 덜 평가되나’ 하는 암묵적 의심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수작이다. 개인차는 있지만 사람들이 저마다 특수한 능력을 갖게 된 시대, 그리고 스스로는 별 능력을 갖지 못하지만 대신 다른 사람의 능력을 극적으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는, ‘배터리’라는 이름의 능력자들. 이 책은 이런 설정을 공유하는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옴니버스다(장편소설 〈민트의 세계〉에서 갈무리된다). 혼란과 성장, 욕망과 음모, 투쟁과 복수, 그리고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인류의 미래. 이런 소재를 풀어내는 듀나의 솜씨는 현대 한국 SF의 정점 수준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또 다른 동료인 정재은 작가는 2005년 제2회 과학기술창작문예로 데뷔한 동화작가다. 복잡한 이름을 가진 이 공모전은 딱 3년 동안만 열렸던 SF 등용문이다. 현재 우리 SF의 중심에 있는 정소연 작가, 그리고 내가 같은 해에 이 공모전으로 데뷔했다. 이후 활동 영역이 멀어졌다가 2017년에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가 만들어지고 이 단체에 정재은 작가가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재회가 이루어졌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에는 어린이책이나 청소년 소설, 혹은 영 어덜트 소설을 쓰는 작가가 적지 않다. 지금의 SF 붐이 일어나기 전에도 어린이책 작가들은 SF에 가장 관심이 많은 창작자군이었다. 또한 청소년 소설을 주로 다루는 출판사에서 기존 SF 작가들과 함께 일한 예도 많다. 이처럼 어린이·청소년 독자와 SF를 연결하는 일은 왠지 자연스러운 시너지를 일으킬 것으로 전망되곤 한다.
문제는 “어떻게?”다. 결국은 이루어질 일, 쉽게 성사될 것처럼 보이는 일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저절로 되는 법은 없다. 누군가 조합을 찾아내고 그 결과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되고 나면, 바퀴나 활을 본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똑같은 것을 만들어내듯 모두의 인식과 가능성의 범위가 한 걸음씩 더 확장된다.
정재은의 동화집 〈내 여자 친구의 다리〉는 많은 작가들이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비법이 담긴 책이다. 특히 돋보이는 이 책의 장점은 이른바 ‘어린이용 SF 소재’를 찾기 위해 고심하지 않고 SF가 일반적으로 다룰 법한 주제를 동화의 문법으로 능숙하게 풀어내는 데 있다. 작가는 책을 통해 어린이 독자들의 마음을 이끄는 동화의 다정함이, 두근두근 들뜨고 경이로운 감정으로 가득한 SF와 어떤 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핵심은 역시 “엉뚱함이 아니라 섬세함으로 공략하라” 정도가 아닐까.
이처럼 한국 SF는 빨리 늙지 않는다. 저마다의 빛깔로 반짝이며 조용히 독자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과학은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오정연 (SF 작가)

인류 최초의 이야기는 SF였으리라고 제법 진지하게 믿는 편이다. 말 그대로 헐벗은 채,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내던져졌을 우리의 조상을 떠올려보자. 주어진 뇌의 모든 용량을 오로지 생존을 위해 풀가동해도 모자랐을 와중에 누군가는 이야기를 만들고 누군가는 그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는 걸 떠올리면 매번 마음이 설렌다. 불가해한 세상을 자신의 깜냥으로 이해하여 설명해내기 위해, 그렇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하여 끝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태어난 첫 이야기. 이번에는 그 ‘세상’의 자리에, 새로 알게 된 지식, 과학 혹은 기술을 집어넣어보자. 최초의 인류가 지었을 이야기는 근대적인 의미의 SF와 다를 바 없어진다. 같은 이유로 어린이·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의 상당수가 SF 친화적인 것도 당연하다고 여긴다.

 

세상물정이라고 편리하게 호명하는 것들이 모두에게 당연하리라는 것은 어른의 흔한 편견 중 하나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어떤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법이 없다. 우리는 모두 한때 아이였고, 어느 정도는 평생 그 아이의 일부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발을 내디딜 세상, 자기
앞에 펼쳐질 미래를 가늠했고 그 안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자신의 자리를 모색해왔다. 마치 최초의 인류처럼.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은 성장이라고 불러도 별 무리가 없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는 그렇게 SF와 겹쳐진다. 이른바 ‘청소년 소설’로 포장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불리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두 편의 소설, 구병모 작가의 〈한 스푼의 시간〉과 이종산 작가의 〈커스터머〉는 이 일반화가 성급하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인간이 처한 현실이 달라지면 인간이 상상하는 이야기도 달라진다. ‘내가 지금 다루려는 과학 혹은 기술은 그것을 낳은 인간·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또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이는 많은 SF 작가들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분명히 그렇다. 적지 않은 경우 이에 대한 대답, 혹은 대답을 찾는 과정 자체가 훌륭한 플롯이 되기도 한다. 다음의 질문은 두 편의 소설을 소개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한 스푼의 시간〉과 〈커스터머〉가 다루는 기술은 무엇이고, 그 기술을 품은 세상은 어떤 곳이며, 그 안에서 인물들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한 스푼의 시간〉의 세상과 그 기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동네 세탁소’ 주인과 함께 살게 된 가정용 로봇 은결이다. 17세 소년의 외양으로 태어난 그는 끝없이 주변을 관찰하며 인간의 언어와 습성을 꾸준히 학습하고 또 습득해나간다. 재개발 열풍으로 골목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골목 세탁소가 근처에 들어선 최고급 아파트의 최신식 무인 세탁소에 자리를 내어주는 와중에도 아이들은 좌절하고 상처받으며 자라서 어른이 된다. 지금 우리의 현실과 다르지 않은 풍경. 그러나 세탁소 골목은 분명 가정용 소년 로봇을 탄생시킨 세상의 일부이며, 그 골목의 이웃들은 로봇에 대한 딱 그만큼의 이해력을 당연하게 지니고 있다. 등장인물 모두는 갑자기 자신들의 세계에 뛰어든 로봇과 위로를 주고받은 끝에 로봇과 함께 성장해나간다. 여기서 성장은 “증가한 신장이나 피부 트러블 같은 신규 정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 주어는 남녀노소를 불문한다.

〈커스터머〉는 모래폭풍이라는 대재앙을 극복한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재앙에 대처한, 다양한 구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고향을 벗어나 도시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커스텀’이라는 일종의 유전공학 기반 신체 변형 기술이 문신만큼이나 일반화된 세상이다. 커스텀에 열광하여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을 ‘커스터머’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커스터머〉는 익숙하고 사랑하는 것에 이별을 고한 뒤 더 넓은 세상으로 스스로를 쏘아올린 아이들, 그리고 “아직 자기가 누군지 잘 모르는” 그들이 결국 자신의 ‘진짜’ 모습에 가까워지는 이야기다. 몇 번은 들어본 듯 익숙한 이 학원 성장물은, 정교하게 고안된 시공간적 배경 및 그 안의 기술과 인물을 씨실과 날실 삼아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깃을 펼쳐낸다. 누구도 선택한 바 없는 출생 지역과 신체적 특성,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방식을 소개하는 소설 구석구석에서, 타고난 것과 선택한 것에 대해 사회가 견지한 각종 혐오의 시선이 촘촘하게 묘사된다. 분명 낯선 세상인데 혐오의 작동은 소름끼치게 낯익다.

흔히 기술과 과학을 주된 동력으로 삼는 SF는 차갑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이 두 성장소설 속 세상 역시 쓸쓸하기 그지없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공평하게 따스하다. 그곳에서는 감정 역시 당연히 지식이어서 오랫동안 면밀히 관찰하고 성실하게 학습하면 로봇도 그 중심에 닿을 수 있다. 아이는 결국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날개를 선택할 것이고 날개보다 중요한 것은 그 날개를 자유자재로 펼칠 만한 근육이라는 사실 또한 이해할 것이다. 아무리 망가진 세상일지라도, (그것이 인간이든 로봇이든, 돌연변이든 커스터머든) 기꺼이 변하고 성장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세계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한 스푼의 시간〉과 〈커스터머〉의 세상에서 우리는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정켈 그림

눈부시게 흥미진진
여성이 창조하는 세계

정보라 (SF 작가)

 

 

 

김초엽 작가와 원샨 작가를 주제로 뭔가 일관성 있는 글을 써보겠다고 생각한 발상 자체가 무리였다. 두 사람은 동양인이고 여성이라는 점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김초엽 작가는 한국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여성 과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과학소설을 주로 쓴다. 원샨 작가는 홍콩 사람이고 금융업에 종사하며, 그래서인지 SF와 금융사기 추리소설을 섞어놓은 것 같은 작품을 쓴다. 공통점을 하나 더 찾자면, 김초엽 작가의 작품도 원샨 작가의 작품도 대단히 재미있다.

 

김초엽 작가의 첫 작품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가작을 수상한 동명의 단편과, 같은 해 대상을 수상한 ‘관내분실’과 함께 김초엽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모아놓은 중단편집이다. 김초엽 작가의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고, 주로 과학자이며, 언제나 뭔가를 찾고 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와 ‘관내분실’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의 근원적 진실을 추구하고, ‘감정의 물성’도 어느 정도는 그런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스펙트럼’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공생가설’의 주인공들은 우주 저편 어딘가의 다른 세계를, 유토피아를 추구한다. ‘유토피아’는 사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을 포용할 수 있는 주제이며 내가 김초엽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초엽 작가의 주인공들은 심지어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주인공처럼 완벽한 세계에 살고 있을 때에도 계속해서 어딘가 다른 곳을 추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목말라한다. 이 작품은 ‘유토피아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측면에서 어슐러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혹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단편 〈우스운 사람의 꿈〉과도 비견할 수 있는 수작이다.

그런데 김초엽 작가의 유토피아에 대한 관점은 매우 독창적이며 르 귄이나 도스토옙스키와는 전혀 다르다. 르 귄과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세계에서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기만적인 유토피아와 인간이라는 존재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에 비해 김초엽 작가의 세계는 선하고 아름답다. 김초엽 작가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세상과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새롭고 다양하고 다른 것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초엽 작가의 인물들은 고통에서조차 이해와 의미와 사랑을 발견한다.
원샨 작가의 세계는 이와 정반대이다. 나는 원샨 작가의 〈사장을 죽이고 싶나〉를 매우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도입부에서 사장이 진짜로 죽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대한민국의 모든 직장인들에게 널리 권하고 싶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작품의 진짜 재미는 사장이 죽은 뒤에 시작된다. 사장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뒤 등장인물들은 악천후로 인해 최첨단 시설을 갖춘 88층 빌딩 안에 갇혀버리고, 임시방편으로 숨긴 사장의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밀실 살인은 언제나 흥미진진한 소재인데, 〈사장을 죽이고 싶나〉에서 독자들은 이제 범인뿐 아니라 시체까지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아니 사실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략과 계책과 온갖 속임수와 트릭과 거짓과 기만을 선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추리소설이나 SF라기보다 마술 쇼와 같다고 생각했다. 본디 마술이란 마술사가 의도한 대로 관중의 눈길을 어디로 쏠리게 하고 정신을 어느 방향으로 쏙 빼놓느냐의 싸움이다. 그렇게 눈길과 정신을 이쪽 방향으로 집중하게 해놓고 그사이에 진짜 사건들은 저쪽에서 벌어지게 마련이며, 관중은 마술사가 화려한 몸짓과 손짓으로 유혹하는 곳으로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향하면서도 내가 모르는 일들이 저 뒤편에서 벌어지고 있으리라 상상하며 머릿속이 바빠지게 된다. 〈사장을 죽이고 싶나〉는 바로 그렇게 정신없이 흥미진진한 마술 쇼와 같은 작품이다.

작가는 실제로 금융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업계 내부자만이 알 수 있는 금융계의 지저분한 속사정과 금융업 종사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딱히 아름답거나 선하지는 않은 본질을 가차 없이 묘사한다. 작가가 바라보는 인간 세계의 본질은 협잡(그릇된 짓으로 남을 속임)이다. 여기에 최첨단, 혹은 최첨단인 것처럼 보이는 기술이 개입되면 살인자의 마술 쇼가 시작된다. 시체를 숨긴 88층 마천루는 이 마술 쇼의 배경이자 중요한 장치인데 어찌 보면 그 자체로 현대 과학기술 디스토피아의 상징이다.

일반적인 성역할 구분의 통념에 기대어 평가하자면 김초엽 작가의 작품들 밑바탕에 깔린 기본적인 정서는 상당히 여성적이다. 원샨 작가의 작품은 반대로 전혀 여성적이지 않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여성 작가의 작품을 함께 소개하고 싶었다. 삶과 인간에 대해 전혀 다른 정서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세계를 묘사하는 관점 자체는 두 작가 모두 정밀하고 과학적이다. 여성이 창조하는 세계, 여성이 이끌어나가는 이야기의 그 눈부시고 흥미진진한 다양함을 꼭 경험해보시기 바란다.


이 작은 책에 담긴
세계의 멸망과 시작

정소연 (SF 작가·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

미메시스에서 출간한 ‘테이크아웃’ 시리즈는 단편소설 한 편을 일러스트와 묶어 낸 기획이다. 권당 내 한 손 크기다. 들어보면 가벼운데, 찾아보니 무게는 100g 정도라고 한다. 작고 예쁜 시리즈다. 시리즈명인 테이크아웃은 아마 이처럼 가볍게 들고 나갈 수 있는 크기와 무게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지금까지 스무 권이 나왔다. 보통 소설집에 단편 7~8편이 실리니, 테이크아웃 시리즈 스무 권은 분량으로 보면 대강 소설집 세 권 정도 된다.
이 시리즈에는 SF가 몇 편 있다. 첫 번째 이야기인 정세랑의 〈섬의 애슐리〉, 두 번째 이야기인 배명훈의 〈춤추는 사신〉,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온 스무 번째 이야기 〈아무도 없는 숲〉(김이환)이다. 모두 SF이고, 모두 하위 장르로는 재난이나 멸망 혹은 그 전후의 세계를 다루는 아포칼립스물이다.

 

부담 없는 무게를 지향한 시리즈에서 세계가 이렇게 자주 멸망한다니! 일견 다소 어색할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SF야말로 이런 기획에 잘 어울리는 장르다. SF는 원고지 100장 안에, 아니, 원한다면 10장 안에도 충분히 세계를 담을 수 있다. 게다가 수록 순서나 수록 작품에 따라 맥락이 생기는 단독 소설집이나 여러 작가들 간의 합에 따라 독법이 자연스레 달라지는 공동 소설집과 달리, 테이크아웃 시리즈는 단편소설 한 편을 책 한 권으로 만들어 물리적인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즉, 소설 안팎으로 닫힌 종말이 가능하다. 이는 독자에게 결코 흔치 않은 경험이다.

김이환의 〈아무도 없는 숲〉은 원자력발전소 사고지를 다룬다. 피폭 위험 때문에 출입이 금지된 발전소 주변. 주인공은 출입금지 철책을 넘어 멸망한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커다란 가족사진이 걸린 빈집, 아무도 쓰지 않는 공중전화, 깨끗한 컵과 빛바랜 신문. 모든 것이 사고일에 멈추어 있는, 아무도 없는 숲. 멸망한 세계.
주인공은 자살하고 싶어 멸망한 세계와 멸망하지 않은 세계를 가르는 허술한 철책을 스스로 넘어 그 숲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빈집에서 약을 삼키고 죽음을 기다리다가, 난데없이 어린아이를 만난다. 아버지가 가족을 살해한 후 자살을 하려고 자기 자식을 데리고 숲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사람을 구하러 온 게 아니야. 죽으러 왔지.” 주인공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그 아버지와 아이를 따라간다. 아무도 없는 숲은 출입금지 구역이니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외부에 알리면 군인이 와서 아이를 구할 것이다. 그렇지만 주인공 자신은 구출되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만, 먼저 죽으면 무고한 아이를 살릴 수 없다. 아이를 살해하려는 아버지는 죽을 작정으로 오염구역까지 들어온 사람이다. 죽을 생각으로 죽일 마음을 먹은 사람을 이기기란 쉽지 않다. 주인공은 고민을 계속하면서도 아버지가 갔을 법한 길을 더듬어 따라간다. 아무도 없는 숲을 지나 발전소가 있던 도시로 간다. 모든 것이 피폭된, 심지어 오염구역을 감시하기 위해 남겨두었던 로봇들마저 피폭으로 오작동하는 도시에서, 생전 처음 만난 한 아이를 멸망한 세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죽음을 미루며 분투한다. 살려내도, 아이는 평생 피폭 후유증에 시달릴지 모르는데도. 그 삶이 어쩌면 더 불행할지 모르는데도. 막상 주인공은 이미 죽음을 단호히 결심하고 숲으로 들어왔는데도.배명훈의 〈춤추는 사신〉은 멸망해가는 세계에 찾아온 사신(使臣)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멸망한 곳은 인구가 50만명인 섬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를 맞으며 대책 없이 멸망해가던 이 천하에 한 사신이 찾아온다. 사신은 불덩이가 떨어진 곳에 홀로 나타났다. 조정은 항복과 종전을 원하지만 사신과 소통할 수 없다. 임금이 고개를 숙여도 무인들이 엎드려 빌어도 하늘에서는 불덩이가 계속 떨어지고, 사신은 기도에도 애원에도 응답하지 않고 이따금 춤만 출 뿐이다.

이것이 전쟁이 아니라 종말이라는 현실을 마침내 깨달은 권력자는 종말을 멈추는 방법을 알아내고자 학자들을 소환한다. 천하 세 나라의 여러 학자들이 둘러앉아 사신을 관찰한다. 그중에는 이미 첫 번째 종말을 본 적이 있는 노학자가 자기 대신 도성으로 보낸 제자도 있는데, 이 제자는 사신의 춤에서 규칙을 발견한다. 사신의 춤은 어떤 몸짓언어인 것이다. 제자는, 아니 스승 대신 영빈관에 왔지만 말석에 앉아 사신의 등을 더 많이 보아야 했던 젊은 여성 학자는 사신의 춤이라는 언어를 풀어나간다.

두 권만 추천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쉽지만 제목만 언급하는 정세랑의 〈섬의 애슐리〉 또한 이런, 어떤 세계의 끝에 관한 이야기이다.
테이크아웃 시리즈의 SF들은 SF가 짧은 분량 안에 ‘멸망하기에 충분한 작은 세계’를 만들 수 있고, 그 세계의 멸망뿐 아니라 다른 세계의 시작까지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장르라는 점을 선명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매력적이다. 닫힌 멸망에, 손에 가벼이 쥘 수 있는 물성을 부여한 아름다운 책이다. 

기자명 배명훈 (SF 작가·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부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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