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추줍은’ 손이 바다에 배를 띄웠다
  • 김만석 (독립연구자)
  • 호수 621
  • 승인 2019.08.16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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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도에는 많은 선박 수리 업체가 있다. 이곳에서 한광식씨는 20년 넘게 1000척가량의 배를 수리했다. 중소 어선 등을 수리하는 기술자의 노하우가 조명받는 날은 언제쯤 올까.
ⓒ김만석 제공한광식씨(사진)는 1997년부터 정동기계사에서 일하며 해양 경비정, 어선, 상선 등의 엔진을 수리했다. 어림잡아 1000척은 된다.

 

1971년생 한광식의 아버지(한진성, 1927~1988)는 함경남도 북청 출신이다. 지병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남 장성 출신인 어머니가 이북식 김치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남쪽 김치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부산 좌천동 산복도로에서 바닷바람을 받아내면서 산 것도 피란민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터이다. 그의 아버지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내려왔는지 전쟁 중에 피란을 왔는지는 불확실했다. 부산으로 피란 온 친척 어른한테 아버지가 중학생 시절 역도를 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한광식의 둘째 형 한충식은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 대회 마루운동에서 동메달을 땄고, 1986년 아시안게임 체조 단체전에선 숙적 일본을 누르고 은메달을 따기도 했으니 아버지의 운동 DNA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둘째 형이 메달을 땄을 당시, 한광식의 막냇동생이 기억하기로는 좌천동 산복도로에서 마을 사람들이 축하 인사를 건넸고 플래카드도 걸렸다고 한다. 당시 여러 신문과 인터뷰했는데 <동아일보>는 “엔지니어인 한진성(57, 부산시 동구 좌천1동)씨의 6형제 중 둘째다”로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아버지 이름이 기록된다(<동아일보> 1980년 8월25일). 물론 이 기사를 접하고 ‘엔지니어’라는 거창한 말로 아버지가 수식되는 것을 막냇동생은 낯설어했다. 부산 지역 여러 곳에 흩어져 세탁소를 하던 친척들과 달리 아버지는 미군이 주둔하던 ‘하야리아 부대’에 기술직으로 취업해 6형제를 먹여 살렸으니, 저 자부심을 우스꽝스럽게 치부할 순 없다. 물론 버려진 폐타이어로 고무줄을 만들어서 파는 모습을 눈여겨본 미군 장교가 부대 내에서 일해볼 것을 권했고 그길로 하야리아 부대에서 일했기 때문에 딱히 전문직 기술자로 취업한 것은 아니었다. 이북 출신이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며 정년까지 일했던 것이야말로 존중할 만한 일이다.

비밀스럽게 형제들 사이에 전하는 말로는 하야리아 부대에 취업하기 전 아버지는 영도에서 밀수에 몸담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집 안에 보관해둔 용도를 알 수 없는 부품에 손댔다가 호되게 맞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밀무역은 1950년대 부산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생존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해방 직후 일본인 가운데 부산에 밀항해 들어와 이름을 조선인으로 바꾸어 직물공장 직공으로 살다가 횡령으로 잡혀 부산 외국인수용소에 수감되는 이도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한·일 사이에 ‘평화 라인’을 임의적으로 설정하고 일본인 어부들을 나포해 부산 외국인수용소에 수감했지만 수없이 뚫린 구멍을 메우지는 못했다. 1958년 국무회의에서 제출된 밀무역 검거 통계에 따르면 해마다 많게는 5000여 건씩 밀수입이 적발되곤 했다. 당시 밀수 지역은 ‘일본, 홍콩, 타이완, 미국, 기타 지역’이었고 밀수 품목으로는 ‘직물류 48%, 장식용품류 11%, 식료품 7%, 화장품류 9%, 약품류 4%, 기타 잡화류 5%, 학용품 및 사무용품 1%, 탄피 및 유류 1%, 기타 14%로 소비재가 다수를 차지했다(<부산일보> 1953년 10월20일).’

영도에서 밀수에 몸담았던 한광식의 아버지가 ‘기술’ 취업을 택한 것은 이런 생필품이 생산되지 않는 당시 피란 현실에 몸서리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진 것 없이 몸만으로 세파를 헤쳐가야 했던 이북 피란민에게 기술은 생존과 등가의 의미였으리라. 바다 위에 둥둥 떠 강한 파도에 밀려 더 나아가지 못할 때, 기술은 바다에 길을 내며 파도 너머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원리였다. 그런 점에서 운동과 기술은 아버지에게 서로 다른 영역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한광식씨 역시 영도에 터를 잡았다. 그는 지금 배 엔진 수리 업체 ‘정동기계사’(대표 김수영)에서 일하고 있다. 영도는 일제강점기부터 배와 관련한 제조업체들이 자리를 잡았던 지역이다. 남항 쪽에 배 외관 정비 시설이 몰려 있고 북항 방면을 바라보는 쪽으로 내연기관 수리 업체들이 모여 있다. 녹슨 배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깡, 깡, 깡” 쇠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해서 ‘깡깡이 마을’이라 불린 선박 수리 업체 밀집 지역도 영도에 있다.

배 엔진 한 대 익히는 데 최소 10년 

한광식씨는 고등학교 재학 때부터 자동차 엔진 수리를 익히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보탰다. 학교 공부에 썩 흥미가 없어 좌천동의 복잡한 골목을 제법 주름잡기도 했고 막내가 골목길에서 동네 형들에게 어깨동무를 당해 푼돈을 빼앗기기라도 하면, 골목길을 무섭게 질주하면서 ‘빌려준 돈’을 되찾아 오기도 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인 1986년부터 1995년까지 자동차 정비업체에 취업해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일이 너무 고되어선지 광복동의 신발 점포에서 1년간 일하기도 한다. 어쩌면 신발 역시 그에겐 엔진의 신체 버전이었을지 모른다. 이후 간판 업체에서 일을 하다가 그 업체 사장의 소개로 1997년부터 정동기계사에 취업해 배 엔진을 익히기 시작했다. 배 엔진을 완전히 익히는 데는 적어도 10년 이상 경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자동차 엔진에 비해 배 엔진은 다양한 연료가 복합적으로 이용된다. 디젤엔진 2대와 가스터빈 2대를 결합해 엔진으로 구성하거나, 디젤-전기와 가스터빈을 결합하는 방식, 심지어 원자로와 증기터빈을 결합하는 방식 등 매우 다양하다. 일반적으로는 디젤엔진이 여전히 가장 많이 사용된다. 소음과 매연 문제가 있지만 통상 중소형 배 엔진으로 고속 추진이 필요하지 않을 때 디젤엔진이 주로 사용되며, 초대형 선박의 경우 벙커시유를 연료로 한 엔진이 장착된다.

한광식씨에 따르면 바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전기를 이용한 엔진까지 나온 상황이고 디젤엔진에서 나오는 매연을 정화하는 장치도 개발됐다. 그가 가장 최근에 만진 엔진은 해양경찰청에서 운용하는 일명 ‘세라정’에 들어 있는 고속엔진이었다. 일반적인 선박에 사용하는 디젤엔진에 비해 마력이 높은데, 피스톤이 크고 터보차저 (과급기)와 인터쿨러(열교환기)가 있어 고속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고 했다.

선박 엔진을 익히는 데에는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특히 외국 엔진을 수리하려면 ‘오퍼레이팅 시스템’ 책자를 번역해서 봐야 할 뿐만 아니라 부품도 수입해야 한다. 배 한 척에 있는 어떤 엔진 하나를 속속들이 알아도 다른 배 엔진을 고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꾸준히 엔진 공부를 하지 않으면 현장에 남기 어렵다고 했다. 같은 디젤엔진이라도 구성 방식이 현저히 다른 경우가 많기에 각각의 엔진에 대한 정밀한 이해와 판단 없이는 수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엔진 하나를 수리하는 데 드는 시간 역시 만만치 않다. 크기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공기가 한 달 걸리는 것은 예사다. 바쁘면 보름 만에 수리하기도 한다지만, 길게는 800일가량 소요되는 엔진도 있다. 엔진을 수리하기 위해서는 선체에서 엔진을 분리해 공장으로 옮긴 다음 엔진 전체를 분해하고 고장 난 부위를 찾아낸다. 그 부위를 고친 뒤 다시 결합해 시운전을 거쳐 인도함으로써 수리가 이루어진다. 각 과정마다 복잡한 절차와 예민하고 섬세한 관리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정동기계사에는 한광식씨 외에도 20년 이상 베테랑급인 엔진 수리기사가 프리랜서로 함께 일한다. 1966년생인 이승헌씨는 경남 거창 출신으로 원래 경운기 엔진 수리를 하다가 스물여섯에 군함 등에 사용되는 거대한 GM6-71 엔진을 보고는 반해 그길로 배 엔진 수리기사가 되었다. 올해로 28년째 배 엔진을 만지는 그는 현장이 점점 고령화되고 있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이야기했다. 20대는 바라지도 않고 30대조차 현장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지금 정동기계사의 막내 일꾼 나이가 마흔둘이다. 그는 배 엔진 만지는 일이 “기름때가 빠지지 않아 추줍고(더럽고) 월급이 적어서” 젊은 엔지니어들의 선호도가 낮다고 했다. 실제로 선박 수리에 관한 여러 논문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사실이 선박 수리 기술자들에 대한 처우였다.  

그럼에도 배 엔진 수리 업체가 몰려 있는 부산, 특히 영도의 공장은 아주 바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부산 지역은 물론 군산, 목포, 여수, 제주까지 가서 선박을 수리한다. 특히 배 엔진 전체를 총괄할 수 있는 ‘총대(베테랑 엔지니어)’ 가운데 프리랜서들은 해외 출장까지 다닌다고 했다.

ⓒ깡깡이예술마을사업단 제공선박 수리 업체가 밀집한 부산시 영도구 대평동 전경. ‘깡깡이 마을’이라 불린다.

 

‘재생산 노동’으로 취급받은 선박 수리 

영도에는 정동기계사 외에도 많은 중소 제조업체가 있다. 선박 구성 부분품 제조업으로 명시된 업체만 2019년 현재 436개 업체가 몰려 있다. 영도의 공장시설 총 735곳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다. 그 외 선박 관련 업체만 해도 290여 업체나 된다. 사실상 영도에 있는 제조업 전체가 배와 연관되어 있고 영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배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제조업들이 한국의 해양수산 환경의 변화에 따라 서서히 위축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영도의 제조업체 수는 2007년 이후 2016년까지 점진적으로 감소해왔다. 2017년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제조업체 수가 늘어나기는 하지만, 이는 영도의 도시 재생 사업으로 소규모 업체가 늘어난 데다 그간 통계로 잡히지 않은 업체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해양플랜트 산업이 각광을 받으면서 특수 선박의 설계와 건조가 활발히 이루어져 최근 몇 년간 한국은 선박건조 수주 세계 1위에 올랐다. 2000년대 초반부터 유조선 등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대규모 선박 수리시설이 확충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부산시에서는 부산신항 인근에 수리시설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중소 어선이나 경비정 등을 수리하는 한광식씨 같은
기술자의 노하우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배 엔진을 만지는 일이 여전히 ‘추줍은’ 일로 취급받는 한 이들의 이야기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쉽사리 잊힐 것이다.  

한광식씨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배 엔진을 수리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1년간 직장 동료들과 수리하는 엔진 수를 대략 한 달에 한 대로 잡고, 한 달 평균 3회 출장을 다녔음을 고려하면 20여 년 동안 1000대쯤은 만졌을 것이다. 해양 경비정과 어선, 상선 등의 엔진을 수리했다는 것은 거기에 탄 사람들의 안전을 그간 책임져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각종 수산물과 여러 상품까지 포함하면 육지를 건사하는 데 그가 기여해온 노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937년 조선중공업이 영도에 들어선 이래 한진중공업부터 소규모 제조업체까지 대체로 ‘생산’이나 ‘생산노동’이 주목받아왔던 것을 기억해보자. 선박 수리나 배 엔진 수리는 ‘재생산’이나 ‘재생산 노동’의 영역으로 취급받았다. 우리는 이들 재생산 노동을, 생산노동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재생산의 테크놀로지는 세계를 보살피고 아끼며 살아가도록, 지속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바다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들 바다의 기술자 덕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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