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가 주목한 아시안 히어로
  • 임지영 기자
  • 호수 621
  • 승인 2019.08.1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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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21세기 인어공주 역은 흑인이 맡았다. 아시아계 배우들이 영화와 드라마의 주요 배역을 꿰차고 있다. 유색인종 히어로의 등장은 시대 변화와 관객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인어공주> 아리엘 역의 핼리 베일리, <알라딘> 재스민 역의 나오미 스콧, <샹치 앤 더 레전드 오브 더 텐 링스> 샹치 역의 시무 리우, <이터널스> 길가메시 역의 마동석(위 왼쪽부터).

1966년 12월 <뉴욕타임스>에 월트 디즈니의 부고 기사가 실렸다. “그는 (생전에) 7년 주기로 매 세대가 자신의 기존 작품들을 보러 극장으로 몰려들 거라고 주장했다. 실제로도 이를 통해 상당한 수익을 거두었다.” 그가 떠난 지 50여 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디즈니’를 보러 극장에 간다. 어릴 때 <알라딘>과 <라이온 킹> 애니메이션을 보러 갔던 30~40대가 실사 영화를 다시 찾고 있다. 디즈니의 ‘신규 고객’인 아이들을 동반하기도 한다. 1995년에 시리즈의 첫 편을 발표한 <토이 스토리 4>도 마찬가지였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디즈니)의 실사 영화는 원작의 설정을 살리되 캐릭터 변화를 통해 달라진 현재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1990년대의 원작과 완전히 같지 않다는 점이 신선함을 주지만 스스로 창조한 세계관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혹평을 받기도 한다. 최근에는 인어공주 캐스팅으로 논란이 일었다. 실사 영화 <인어공주>의 주인공 아리엘 역에 흑인 래퍼이자 배우인 핼리 베일리가 캐스팅되었다는 소식 때문이다. SNS상에선 ‘#내 아리엘이 아니야(#NotMyAriel)’라는 해시태그가 돌기도 했다.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보던 흰 얼굴과 빨간 머리카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1세기 인어공주’의 탄생을 두고 참신하다는 평가와 원작의 설정을 무너뜨렸다는 반발이 이어졌다. 디즈니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과도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디즈니의 방침은 확고했다. 디즈니 소유의 방송국 프리폼(Freeform)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불쌍하고 불행한 영혼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덴마크인은 흑인일 수 없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일단 인어는 물속에 산다는 점을 환기하며 덴마크인이라고 가정하더라도 흑인에 빨간 머리카락일 수 있고 무엇보다 아리엘이 픽션 속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도 과거에 갇혀 애니메이션에 나온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놀랍고 뛰어난 재능을 갖춘, 아름다운 핼리 베일리를 캐스팅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오 저런….”

지금이야 ‘정치적 올바름’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디즈니는 오랫동안 정반대 이유로 비판을 받아왔다.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1994)에서 사자들이 미국식 억양을 쓰는 반면 악역인 하이에나는 흑인이나 히스패닉 억양을 썼다. 디즈니 최초로 ‘현실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 <모아나>(2016)조차 남자 주인공에 대한 외양 묘사가 폴리네시아인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보여준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작품 속 공주들은 대체로 전통적인 성 역할을 답습했다. 배우 키라 나이틀리는 딸에게 디즈니의 일부 작품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밝혔다. 단적으로 인어공주는 남자 때문에 목소리를 포기한다. ‘예쁘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못생기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신화를 반복해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상 첫 유색인종 공주는 1992년 개봉된 <알라딘>의 재스민이다. 이후 <포카혼타스>(1995), <뮬란>(1998)이 등장했고 <라푼젤>(2010)과 <겨울왕국>(2013) 등을 통해 여성 캐릭터의 성격에 변화를 주었다. 종전의 공주보다 주체적이고 강인한 이미지였다. 올해 개봉한 실사 영화 <알라딘>이 한국에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배경으로 아버지에 이어 술탄의 자리에 앉으려는 재스민 공주의 달라진 캐릭터가 한몫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토이 스토리 4>에 등장하는 여성 장난감 보핍 역시 지난 시리즈의 수동적인 성격과 달랐다.

실종된 딸을 찾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서치>(위)는 지난해 8월 개봉해 박스오피스 4위에 올랐다.

 

디즈니, ‘정치적 올바름’ 전략 선택

디즈니가 본격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전략으로 삼게 된 배경에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차례로 인수한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마블 스튜디오, 루카스 필름이 있다. 인수 합병을 주도한 로버트 아이거 디즈니 최고경영자는 10년 전 <아이언맨>으로 주가를 올리던 마블 스튜디오 인수 당시 “5000개가 넘는 캐릭터를 보유한 보물상자”라며 전략적 관점에서 완벽하다고 말했다. 이후 회사 고유의 색깔을 살리면서도 다양한 캐릭터를 활용해 인종·민족·젠더의 편견에 맞서는 콘텐츠를 제작했고 이는 요즘 관객들의 요구와도 맞닿았다. 아이거는 “다양성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회사의 핵심 전략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디즈니의 이러한 세계관이 겉치레가 아닌지 의심하는 눈길도 있다. 다양성을 내세운 디즈니가 올해 영화 제작사 20세기폭스까지 인수하면서 영화산업 생태계 내 다양성을 해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건 아이러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의 전략이 주효했다는 점이다. 디즈니는 올해에만 최고 흥행작 6편 중 5편을 제작했다.

다양성을 기치로 내건 디즈니의 최근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이번의 흑인 인어공주 캐스팅을 비롯한 유색인종 히어로의 등장이다. 지난해 개봉한 <블랙 팬서>는 북미 영화 흥행 순위에서 역대 세 번째 스코어를 기록했다. 마블 시리즈 최초의 흑인 히어로였다. 캐스팅의 90% 역시 흑인이다. 아시아계 히어로도 곧 등장을 앞두고 있다. 7월20일 마블 스튜디오는 앞으로 선보일 영화 10편의 라인업을 발표했다. 어벤저스의 여성 멤버였던 블랙 위도우를 비롯해 흑인(팔콘), 성소수자(발키리), 청각장애인(마카리)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히어로가 대기 중이다. 2021년 개봉 예정인 <샹치 앤 더 레전드 오브 더 텐 링스>의 주인공인 샹치 역은 중국계 캐나다인 시무 리우에게 돌아갔다. 세계 최고의 쿵후 실력을 지닌 히어로다.

시무 리우는 캐스팅 전부터 SNS를 통해 마블에 대시하기도 했다. “‘캡틴 아메리카’와 ‘토르’ 잘 봤다. 이제 아시아계 미국인 히어로 영화를 만드는 게 어떤가?” 2014년 그가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5년 만에 현실이 되었다. 캐스팅 소감을 묻자 그는 “내가 (아시아계 배우들이 맡을 법한) 의사 역할이 아니라는 게 기쁘다”라고 말했다. 그는 SNS를 통해 “여기에 속할 권리를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말하기도 했다. 과거 <아이언맨 3>에 판빙빙이 출연했지만 중국 개봉 버전에만 모습을 드러냈고, 한국 배우 수현이 <어벤저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의사로 출연했으나 비중이 크지 않았다. 2024년 개봉할 <이터널스>에 캐스팅된 마동석 역시 눈길을 끌었다. 그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길가메시 역을 맡았다.

디즈니의 변화는 그들이 견인하는 할리우드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동안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배우들은 대체로 비중이 적은 조연이었다. 특히 ‘모범 소수민족 신화(Model Minority Myth)’ 이미지에 갇혀 역할이 한정되었다. ‘모범 소수민족 신화’란 사회학자 윌리엄 피터슨이 일본계 미국인의 사회경제적 성공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용어다. 아시아계 미국인이 ‘이상적인 소수자’라는 의미다. 미국 사회의 인종 문제를 다룬 책 <인종토크> (이제오마 올루오, 2019)에 따르면 이 신화의 고정관념에는 ‘높은 학력과 경제적 성공, 정치적 온건함, 근면 성실함, 수학과 과학 성적의 우수함, 엄한 양육방식’ 등이 포함된다.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저자 이제오마 올루오는 이 용어가 ‘인종차별을 덮는 예쁜 담요가 되어 (아시아계 미국인을) 백인우월주의 사회구조에서 고통받는 다른 유색인종과 분리해낸다’고 지적한다.

아시아계 배우는 정확히 그런 이미지로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했다. 2000년 방영이 시작된 드라마 <길모어 걸스>에서 주인공 로리의 단짝 친구로 등장하는 레인 킴은 극중 한국인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의 한국인 엄마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그런 점에서 자유분방한 로리의 엄마 로렐라이와 대비된다. 2004년 방영된 미국 드라마 <로스트>에도 한국계 배우 대니얼 대 김과 김윤진이 부부로 나왔다. 어색한 한국어로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회자된 대사가 있다. “페이퍼 타월이 요기 잉네?” “요태까지 날 미앵한 고야?”

국내에서 성대모사가 될 정도로 어색한 한국어가 그대로 전파를 탈 수 있었던 건 한국어가 그만큼 소수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극중 남편 진수(대니얼 대 김)는 영어를 못하고 가부장적이며 가정폭력을 일삼는다. 아내 선화(김윤진)는 시즌을 거듭하면서 강인한 캐릭터로 바뀌지만 처음에는 대단히 의존적인 인물이다. ‘전형성’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이런 작품들에는 어쨌든 아시아계 배우가 등장했다. 김지미 영화평론가는 “흑인들에게 스크린 위의 다양성이 균형 획득이라면 아시아인들에게 다양성은 존재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황해문화> 2018년 겨울호). 이후 스티븐 연이 <워킹 데드>에, 대니얼 헤니가 <크리미널 마인드>에 주요 캐릭터로도 등장했다.

2018년 8월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영화를 만든 존 추 감독은 “단순히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움직임이다”라고 말했다. 개봉 첫 주에 속편 제작이 확정되었고 3주 만에 누적 흥행수입 1억 달러를 넘어섰다. 뉴욕 대학 교수인 레이첼 추가 싱가포르의 엄청난 부자 남자친구 닉 영의 가족을 만나며 벌어지는 일을 담은 작품이다. 아시아계 배우로만 캐스팅된 영화가 극장을 통해 개봉한 건 웨인 왕 감독의 <조이럭 클럽> 이후 25년 만이었다.

주요 인물이 모두 아시아계 배우인 넷플릭스의 <우리 사이 어쩌면>(위)은 한 달 만에 3200만 뷰를 넘어섰다.

 

아시아인·흑인의 구매력 막강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이 영화로 자신들의 구매력을 증명했다. 개봉 첫 주, 관객의 44%가 아시아계였다. 아시안 커뮤니티에서 관람을 독려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미국 콘텐츠 산업동향’에서 이 현상을 두고 “그동안 할리우드가 백인 남성을 타깃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전략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과 무관심했던 아시아계 관객층이 티켓 구매력을 가졌다는 것을 시사한다”라고 분석했다. <블랙 팬서> 역시 첫 주 관객의 58%는 흑인이었다.

미국 영화계는 2018년 8월을 ‘아시안 오거스트(Asian August)’라 부르기도 했다. 실종된 딸을 찾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스릴러 영화 <서치>가 같은 달 개봉해 박스오피스 4위에 올랐다. 라나 콘도르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 인도계 미국인인 아니시 차간티 <서치> 감독은  존 조를 캐스팅하기 위해 주인공을 한국계 미국인으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스타트렉:더 비기닝>에서 술루 역을 맡기도 한 존 조는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줄거리의 한 부분, 스토리텔링으로 소비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게 중요하다. 여타 미국 배우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시안 오거스트’를 환영하며 “더 많이 만들어져서 그 현상을 주목할 필요도 없을 만큼 충분한 성공을 거두기 바란다”라고도 했다.

최근 몇 년간 할리우드에는 인종과 젠더의 다양성을 요구하는 흐름이 있었다. 동양인 캐릭터에 백인 배우를 캐스팅하거나(White Washing) 아카데미상 수상자들이 대부분 백인(Oscar So White)인 걸 비판하는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진 게 대표적이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은 과장이 아니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USC) 스테이시 스미스 교수의 2016년 연구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5년까지 할리우드에서 개봉한 영화 800편의 캐릭터 중 73.7%가 백인, 12.2%가 흑인, 5.3%가 라틴계, 3.9%가 아시아인이다. 아시아계 이민자가 미국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8%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12월 한국계 미국인 샌드라 오가 <킬링 이브>로 골든글로브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아시아계 여배우로는 40여 년 만이다. 그는 시상식의 진행을 맡기도 했는데 시작에 앞서 “오늘 밤 무대에 오르는 것이 두려웠지만 여러분 앞에 서서 변화의 순간을 지켜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올해도 흐름은 이어졌다. 2019년 상반기 넷플릭스는 <우리 사이 어쩌면>을 선보였다. 어린 시절 단짝 친구이던 샤샤와 마커스가 15년 만에 재회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로맨틱 코미디다. 주연배우 앨리 웡 부모의 출신지는 각각 중국과 베트남이고 남자 주연 랜들 박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주요 인물이 모두 아시아계 배우인 가운데 카메오로 등장하는 키아누 리브스의 아버지 역시 하와이 원주민과 중국인 혈통이고, 어머니는 영국인이다. 두 남녀의 인연을 너무 꼬아놓지 않은 이 유쾌한 영화는 한 달 만에 3200만 뷰 넘게 소비됐다.

미국에서 지난 7월12일 개봉한 아콰피나 주연의 <더 페어웰>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중국계 미국인 빌리가 폐암 선고를 받은 할머니를 찾아 중국에 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가족 영화는 개봉 3주 만에 박스오피스 10위에 진입했다. 중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를 둔 배우 아콰피나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도 출연했고 올해 발표된 마블의 영화에도 캐스팅되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속편은 내년 촬영을 앞두고 있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가는 길이 꽤 멀었다. ‘주인공의 친구’에서 주인공으로 옮겨가는 최근의 흐름은 고무적이지만 여전히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수가 적다.

키아누 리브스처럼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도 복잡할 혈통을 지니고 있다. 8분의 1은 백인, 8분의 1은 원주민, 4분의 1은 타이인, 4분의 1은 중국인이고, 4분의 1이 흑인으로 알려졌지만 그냥 흑인으로 불린다. 원 드롭 룰(One-drop rule) 때문이다. 어떤 인종이든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이라는 의미로 백인의 우월적 지위를 긍정하는 용어다. 다시 인어공주로 돌아갈 차례다. 안데르센 원작의 <인어공주>에는 공주의 머리카락이 길다는 얘기만 나온다. 인종에 관한 언급은 없다. 덴마크 전문 미디어 <네이키드 덴마크>의 탄야 닐슨 에디터는 말한다. “순수 혈통(pure bloods)은 없다. 그러니 모든 인종이 인어공주가 될 기회를 공평하게 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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