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 설계한 거인 김대중
  • 전혜원 기자
  • 호수 621
  • 승인 2019.08.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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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형 복지국가의 설계자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국민연금, 국민건강보험 등은 혁명적 변화였다. 10주기를 맞아 그의 복지국가 설계를 되짚어본다.
ⓒ연합뉴스

우리는 ‘김대중 체제’를 살아가고 있다. 김대중이라는 대통령의 탄생으로,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그의 햇볕정책과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은 한반도 평화를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 그리고 김대중은 ‘한국형 복지국가’의 설계자다. 그는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라는 국가적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정치인이자 복지국가의 기틀을 만든 사람이다.

김대중은 19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외환위기 직후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취임한 뒤 알아보니까 대한민국이라는 “금고에 39억 달러밖에 없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 한국은 단기적으로도 수백억 달러의 빚을 외국에 갚아야 하는 실정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 대신 수많은 국내 제도를 바꿔야 했다. 그가 ‘노동시장 유연화’를 포함한 이른바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던 이유다.

IMF의 요구에 따라 금리를 올리고 재정지출을 줄이면서 경제난이 한국을 덮쳤다. 부도, 폐업, 구조조정으로 대량 실업이 현실화되었다. 1997년 11월 2.6%(57만명)였던 실업률이 1년 3개월여 뒤인 1999년 2월에는 사상 최고 수준인 8.6%(178만명)를 기록했다. 외환위기 이후 빈곤율은 2배 이상 증가했다(보건복지부, <보건복지 70년사>, 2015). 보험료 1000만원을 타려고 아버지가 초등학생 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사건은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외환위기는 성장률이 두 자릿수에 이르기도 하던 한국의 고도 성장기가 끝났다는 징후였다. 고도 성장기의 노동시장은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였다. 실질임금도 가파르게 올랐다. 고도 성장기의 종언으로 실업률이 크게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더욱이 ‘IMF 개혁’에 따른 노동시장 유연화는 실업자를 더 크게 늘릴 터였다.

김대중 시대 이전 공적인 복지제도는 실업과 빈곤의 안전망으로는 턱없이 미비했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61년 제정된 ‘생활보호법’에 따르면, 18세 이상 64세 이하인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아무리 빈곤해도 현금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일할 능력’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할 능력이 있어도 일할 수 없는 수많은 실업자는 복지제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 그리고 ‘생산적 복지’를 국정 지표로 삼았다. 이전 시대까지 ‘복지’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국가의 시혜로 여겨졌다. 국가 재정의 측면에서 보면 그냥 땅으로 사라지는 돈, 즉 ‘낭비’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현금 형태로 제공되는 ‘복지급여’의 수는 물론 그 규모도 변변치 않았다. 복지라는 글자가 붙은 목욕탕, 회관 등의 시설은 ‘싸지만 허름한’ 곳이었다. 이랬던 ‘복지’라는 용어에 김대중은 혁명적인 의미 변화를 시도한다. ‘생산적’이라는 용어까지 붙여가면서.

그에 따르면, 복지는 “시장경제의 부작용, 폐해를 시정하고 보완”하는 장치다. “복지는 자선이 아니라 인권이다. 복지는 수혜자들에게 자활 의지를 북돋아준다. 복지를 통해 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김대중 자서전>).”

즉 복지는 ‘생산적이냐, 비생산적이냐’를 따지기에 앞서 인권, 즉 인간의 기본권이다. 더욱이 복지는 생산적이다. 시장 실패를 시정해서 망가진 경제 시스템을 복구하고 작동시키며, 경제의 기본 단위인 ‘사람’이 창의적으로 일해서 생산성을 높이도록 돕는다. 그래서 생산적 복지다.

ⓒ연합뉴스김대중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가 2000년 9월 서울 홍제동 개미마을을 방문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인권으로서의 복지’라는 김대중의 생각은 2000년 10월부터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으로 결실을 맺는다. “생활이 어려운 자에게 필요한 급여를 행하여 최저 생활을 보장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수혜자가 보험료를 내야 지급되는 보험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생활이 어려운 자’에게 제공되는 공공부조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든(심지어 가난해서 세금을 내지 못한 시민이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제도에 따르면 연령과 일할 능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소득인정액이 최저생계비보다 적으면 자활공동체 사업 등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제도 시행 첫해인 2000년, 4인 가구의 월 최저생계비는 93만원이었다. 소득인정액이 93만원 미만인 경우 국가가 그 차액을 지원했다.

다만 수급권자를 부양할 의무가 있는 자녀나 부모 등이 있는 경우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부양의무자’ 기준은 유지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이 제도를 ‘자활’과 연계했다.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일을 해야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해서 최저생계비 이상을 벌면 국가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없다. ‘일할 유인’과 ‘자활 계획’을 강조하는, 이른바 ‘근로 연계 복지’ 제도다. 이 법의 탄생은 비로소 복지라는 개념이 ‘시혜적 보호’에서 ‘국가의 의무이자 시민의 권리’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집권 여당 내부에서도 엄청난 반발

당시로서는 거의 혁명적 변화였다. 심지어 집권 여당 내부에서도 엄청난 반발이 있었을 정도다. 1987년부터 김대중의 정책자문관 구실을 했고, 그의 집권 이후엔 민정수석과 정책기획수석을 맡은 김성재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전 문화관광부 장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당시 야당뿐 아니라 정부·여당에서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굉장히 반대했다. 자민련과 연립정부를 이룬 당시 경제 부처 장관들이 전부 자민련 계열이었다. 이 사람들이 과거의 성장 위주 사고를 하니까, 복지 확대가 성장에 반대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왜 돈을 공짜로 주느냐, 재정을 생산적인 곳에 써야지’ 하는 식이었다.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하자는 입장이었고, 나에게 ‘잘 설명하고 좀 이해시키라’고 했다. 헌법을 갖고 다니면서 야당과 정부를 설득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한국노총·민주노총 등 양대 노총이 벌인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운동이 큰 기여를 했지만, 재정 당국은 예산이 급증할 것을 우려해 반대했고 법안 통과는 난망해 보였다. 이때 동력을 만들어낸 주인공이 바로 대통령이었다. 1999년 6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만들어 국민이 생활에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가 대책을 세우겠다”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이른바 ‘울산 발언’ 이후 법안 통과가 기정사실화되었다. “보수층 일각에서는 ‘사회주의적 접근 방식’이라고 공격했다. 정부 내에서도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김대중 자서전>). 대통령 김대중은 기초생활보장법에 서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돈이 없어 굶어 죽거나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일이 없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4대 보험(산재·의료·고용·연금)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함께 ‘김대중 복지’의 또 다른 핵심 축이었다. 산재보험과 의료보험은 박정희 정권, 국민연금은 노태우 정권, 고용보험은 김영삼 정권 때 시행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 때 ‘전 국민’으로 확대된 의료보험을 제외하면 3개 사회보험은 ‘전 국민’ 대상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있었다. 의료보험도 지금 우리가 아는 ‘국가 단일 건강보험’이 아니었다.

4대 보험은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서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안전망의 기틀을 확립한다. 고용보험은 1998년 10월, 산재보험은 2000년 7월부터 1인 이상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 적용되었다. 그동안 행정력이 닿지 않아 세금도 제대로 걷을 수 없던 ‘거대한 비공식 영역’으로부터 보험료를 받고 급여를 줘야 하는 임무가 김대중 정부에게 떨어졌다.

ⓒ연합뉴스1997년 12월3일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가 한국에 긴급자금을 투입한다고 밝히고 있다.

 

국민연금이 대표적인 경우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4월, 900만명에 이르는 도시의 영세 자영업자와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을 국민연금 대상자로 포함했다. 이렇게 ‘전 국민 연금시대’가 개막된다. 문제가 있었다. 연금 보험료를 받으려면 그 대상자들의 소득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도시지역 주민 가입대상자의 70%는 소득을 파악할 자료가 없었다. 대부분 영세 자영업자와 저소득 비정규직으로 소득이 불안정한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소득신고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한국노총은 임금노동자가 불리하다고 반발했다. 야당과 언론은 ‘준비 안 된 국민연금’을 질타했다. 급기야 국민연금 확대를 연기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예정대로 시행했다. 다만 가입 대상 확대 이후에도 낮은 소득신고율과 거대한 규모의 납부예외자는 숙제로 남았다.

의료보험이 우리가 아는 지금의 ‘국민건강보험’으로 탄생한 것 역시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기존 의료보험은 1977년 강제가입으로 출범한 당시부터 지역과 직장, 공무원·교원 등으로 나뉘어 각자 조합을 만드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지역별로, 직장별로 재정 격차가 심각했다. 돈이 남아도는 조합일수록 더 적은 보험료를 내는가 하면 건강보험 혜택을 강화하기도 힘들었다. ‘사회적 위험에 대비한 연대’라는 보험의 원리가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의료보험 통합 운동은 1988년 과다 보험료에 대한 농민들의 항의로 시작해 시민사회에서 줄기차게 전개되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노태우 정권 때 ‘국민의료보험법’이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되기도 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김대중은 조합 수백 곳으로 쪼개진 의료보험을 국민건강보험으로 통합하겠다고 대선에서 공약했었다. 하지만 통합은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수백억원에 이르는 적립금을 기업 의료보험조합에 쌓아두고 ‘사금고’처럼 사용하던 기업들과 이들을 대변하는 전경련, 경총 등이 강력하게 저항했다. 의료보험 재정이 넉넉한 편이던 직장의료보험조합들과 한국노총도 반대했다. 직장 노동자들의 의료비 부담이 높아진다는 이유였다. 1999년, 직장의료보험조합 등은 건강보험 통합이 헌법에 규정된 평등권과 재산권을 침해한다며 헌법 소원까지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지역·직장 가입자 간 평등한 부담을 위한 정책과 제도 개선은 필요하지만 통합이 위헌은 아니라고 판정했다. 대통령 김대중은 통합을 관철해냈다. 그는 자서전에서 “옳은 길이면, 또 뜻이 바르면 가야 했다. (중략) 건강보험의 통합은 국민의 정부의 가장 의미 있는 개혁 정책 중 하나였다. 20년 동안 계속 미루기만 한 숙제를 국민의 정부에서 풀었다”라고 술회했다.

ⓒ연합뉴스2003년 2월25일 제16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화하고 있다.

 

세계은행 권고 무시하며 복지국가 추진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김대중은 한국 복지국가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가 퇴임한 지 16년이 지났다. 오는 8월18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 10주기다. 김대중 시대 이후 한국 복지국가는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그가 천명했던 ‘생산적 복지’의 철학은 지금 한국 사회에도 유효할까.

양재진 연세대 교수(행정학)는 “한국 복지국가는 어느 한 사람, 한 정부가 만들었다기보다 누적적으로 발전해왔다. 그럼에도 김대중 정부는 한국 복지국가 역사에서 새로운 발전의 큰 분기점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양 교수에 따르면, 당시 한국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세계은행의 권고까지 무시하면서 김대중은 복지제도에서 독자적 업적을 이뤄냈다. 양재진 교수의 설명이다. “고용보험의 경우 IMF와 양대 노총이 모두 요구했고, 실업 대란이었기에 기능상 필요했다. 하지만 의료보험 통합이나 국민연금 확장은 꼭 지금의 형태로 이뤄지지 않았을 수 있다. 세계은행의 요구는 국민연금을 대폭 축소하고 민영화하거나 사적 연금 형태로 개편하라는 것이었지만 김대중 정부는 이를 사실상 거부했다. 의료보험 통합 역시 분권화와 사보험화를 지향하는 국제 흐름에는 배치되는 개혁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IMF 위기에 대응함과 동시에, ‘보편주의’에 입각해 민주화 세력이 요구했던 복지 의제를 실현해갔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고용 시스템이 변화하면서 ‘김대중 복지’ 역시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최근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 1, 2, 3>을 펴낸 윤홍식 인하대 교수(사회복지학)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의 복지 확대가 주로 사회보험과 최빈곤층에 대한 최소한의 공공부조를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사진공동취재단2009년 8월20일 국회에 마련된 김대중 전 대통령 공식 빈소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문제는 외환위기 이후 주로 재벌 대기업에서 만들어내던 ‘좋은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었다는 데 있다. 더욱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 구조도 만들어지지 못했다. 이에 따라 제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축소되고 그 일자리마저 불안정해지는 한편 하청기업과 영세 자영업, 프랜차이즈, 플랫폼 노동 등에 종사하는 불안정 노동자의 비중은 계속 증가했다.

이 같은 경제 및 일자리 구조의 변화가 복지제도에서도 질곡을 만들어낸다. 김대중 복지의 큰 축인 4대 보험은 아무래도 사회보험료를 안정적으로 낼 수 있는 정규직 노동자에게 가장 적합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 교수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사회보험 확대는 노동시장에서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일과 함께 가야 한다. 부품과 소재를 해외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국내 중소기업이 일정 부분 담당할 수 있는 구조가 된다면, 이번 한·일 무역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 또한 사회보험에서 배제된 자영업자나 비정규직이 실업이나 폐업에 직면했을 때 공공부조를 제공하는 일도 필요하다.”

김대중은 한국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복지국가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고 후임 대통령이 계승하려 노력한 그 업적들이 허물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비통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그가 남겨둔 일은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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