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작곡가 겸 지휘자 원일씨는 지난해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음악감독을 맡은 데 이어 올해 제100회 전국체육대회 개·폐회식 총감독을 맡았다. 우리 음악의 차세대 리더로 꼽혔던 그는 명백한 현세대 리더다. 그의 음악적 영역은 국악의 범위를 뛰어넘어 전 장르를 아우르고 음악적 역할도 현재를 넘어 미래의 음악까지 책임지고 있다.

2017년 미국 공영방송 NPR 음악 프로그램인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에 출연해 큰 반향을 일으킨 경기소리꾼 이희문씨는 원일 감독을 잇는 차세대 국악 리더로 꼽힌다(씽씽은 현재 해체됨). 펑키한 가발을 쓰고 여장을 하고 나와 무대를 주름 잡는 그에게 요즘 세대가 열광한다. KBS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오방신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원일과 이희문, 이 두 뮤지션이 올여름 국립극장의 ‘여우락페스티벌’에서 뭉쳤다. 원일 감독이 구성한 ‘13인의 달아나 밴드’에 이씨가 합류해 원숙하면서도 신선한 무대를 보여주었다. 국악을 현대화화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국악을 하고, 다른 음악 장르와 영화, 방송 프로그램, 무용 등 다른 예술 장르와 자유롭게 협업하는 그들에게 오늘의 국악에 대해 물었다.
 

ⓒ시사IN 신선영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음악감독을 맡았던 원일씨(오른쪽)와 경기소리꾼 이희문씨가 서울 인사동 이루향서원에서 만났다.

여우락페스티벌의 ‘여우락’은 원래 ‘여기 우리 국악이 있다’는 의미인데, 이번에 공연할 때 ‘여기 우리 국악이 흐른다’라고 바꿔 말했다.
원일:순간적으로 한 표현이다. 국악은 단순한 재현으로는 의미를 얻기 쉽지 않다. 의미를 못 찾으면 듣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도 없다.

 

이희문:전통이라는 단어 자체를 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음악 중에는 보존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전통을 보존한다는 관념으로 대중에게 다가서기는 어렵다.

전통음악만 접했던 사람들에게 이희문씨의 퍼포먼스는 조금 부담스러울 것 같다.
원일:주변 지인들이 이희문씨를 이미지로만 접하다 이번에 현장에서 처음 보았다. 처음에는 당황했는데 보다 보니 익숙해졌다며, 남녀노소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묘한 매력이 있다’고 하더라. 옛날에는 국악계가 확실한 입장이 있었다. 아니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고 하는 국악인이 별로 없고 다들 자기 것 하느라 바쁘다. 서로 관심도 없다. 20~30년 전이라면 이희문씨를 공격하기도 했을 텐데 지금은 입장이 없다.

이희문:‘도발’이나 ‘파격’을 할 때 왜 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면 그런 극렬한 반발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리서치를 하고 나름 이해를 한 뒤 이걸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생각을 분명히 정리한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여장을 하는데 객석의 반응은 별로 부정적이지 않더라.
이희문:예술가는 백 년 전에도, 천 년 전에도 자유로운 영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시대에도 똑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어느 시대에 오류가 나서 전통을 보존하고 지켜야 하며 예전과 똑같이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을까 생각해보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다. 예술 하는 생각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남자 소리꾼은 어떤 식으로 음악을 했을까 알아보니 지금의 홍대 인디밴드처럼 사랑방에 모여서 같이 연습하고 노래를 만들곤 했다. 특히 잡가는 굉장히 배타적이었다. 내가 하는 노래를 남이 따라할 수 없도록 기교를 많이 넣었다. 스타일이 살아 있는 음악이었던 셈이다.

원일 감독이 예전에 “국악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라는 말을 했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비롯해 그동안 국악이 뭉치는 방법을 연구하는 자리에 있었다. 어떤 결론을 얻었나?
원일:국악 관현악이 있느냐 없느냐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다. 없다고 부정하니까 굉장히 재미있어진다. 전국에 국악 관현악단이 30여 개 있다. 하지만 없다고 생각한다. 국악 관현악단이라는 틀만 있고 국악 관현악이라는 음악적 양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에 ‘음향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음향체를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관심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만의 음향체는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나?
원일:서양 오케스트라 체계에 맞춰서 국악 관현악단을 구성하는데, 사실 우리 국악은 재즈적이다. 즉흥력과 상상력이 음악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열린 양식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시나위 식으로 작곡하기를 실천한다. 우리 국악은 완전하게 기호로 통제하면 안 되는 음악이다. 음향물리학적으로 통제되어서는 안 되고 자연스러움이 살아나야 한다. 연주자의 몸과 악기가 상상하는 방식이 논리적인 세계가 아니라 비선형적인 세계다.

이희문씨도 다양한 콜라보 무대를 선보이는데, 밴드를 구성할 때 본인만의 원칙이 있나?
이희문:내가 보컬이라 뭉치는 형태가 좀 다르다. 국악기와 양악기가 섞이는 것에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콜라보 공연을 할 때도 다른 전통악기를 넣지 않는다. 내 목소리 자체가 하나의 국악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록밴드, 재즈밴드 등과 무대를 해봤는데 작업하는 환경에 따라 뭉치는 형태가 좀 달라진다.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 음악과 함께할 때 내가 내는 소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궁금했다.

이번에 여우락페스티벌에서 구성한 ‘13인의 달아나 밴드’는 국악 어벤저스라 할 만하다. 멤버 대부분이 솔로 활동을 하고 있는 뛰어난 연주자이거나 가수다. 이들을 결합할 때 어떤 원칙을 적용했나?
원일:이 엄청난 연주자 풀을 어떻게 활용할까 생각을 많이 했다. ‘13인의 달아나 밴드’를 구성할 때 네 개의 층위를 두고 결합시켰다. 록의 층위, 전통음악의 층위, 타악기와 현대적인 양식을 결합하는 층위, 그리고 프런트에 선 싱어들의 층위가 서로 받쳐주면서 각각 돋보이게 하면서도 함께 파워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다. 모두 음악 본연의 결이 있는 뮤지션이다. 이상의 시 ‘오감도’에서 나온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를 따서 ‘13인의 달아나 밴드’로 이름을 지었을 때, 멤버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희문씨에게 제일 먼저 전화했다.

가장 먼저 연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원일:기획자의 상상력은 확률의 게임이다. 익숙한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만하게 벌일 때는 잡아주는 축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본인을 콤팩트하게 연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자기 연출력이 있는 이희문씨로부터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희문씨와 이번에 처음 작업을 해보았는데 본인을 연출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보고 무대를 연출한다. 이번에도 이런저런 부탁이 많았다. 그래서 모두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해보면 의도했던 바가 살아났다. 이희문씨가 인생의 후반전을 연출가로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사IN 고재열여우락페스티벌에서 ‘13인의 달아나 밴드’가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이희문:원일 감독님이 들을 건 들어주고 흘릴 것은 흘려버리면서 잘 조율해주었다.

 

이번 무대에 대해 설명하면서 음악 하는 후배들에게 자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원일:그래서 노골적으로 ‘달아나’라는 이름을 밴드에 붙였다. 이름이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중학교 때부터 음악을 해서 대학 졸업할 때까지 음악만 하는데도 답이 안 나온다. 현실이 어둡고 전망이 없을 수 있지만, 음악 본연의 실험을 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 자체가 바로 달아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이뤄내는 완성도 높은 성음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얼마 전 안숙선 선생이 자전적 공연 〈두 사랑〉을 했는데 워커힐호텔 ‘하니비쇼(Honeybee Show)’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버틴 시절 이야기를 했다. 생계는 여전히 뮤지션에게 중요한 숙제인 것 같다.
이희문:우리 어머니(고주랑 명창) 세대가 그렇게 살았다. 그 또래 선생님들은 잔칫집 가서 노래하며 생계를 이었다. 문화재 제도가 생겨나기 전에는 그렇게 무대도 아닌 곳에서 매일 노래했다고들 한다. 6개월 동안 하루도 못 쉬고 소리를 한 적도 있단다. 어머님이 축적해놓은 바탕 위에서 우리는 소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회가 쉽게 열리지는 않는다. 나도 2010년 전국민요경창대회 종합부문 대통령상을 받고 몇 년을 버틴 뒤에야 기회를 얻었다. 후배들이 자주 상담을 부탁하는데 지구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힘들어도 개똥밭에서 구르고 있어야 한다. 뭔가를 계속 하고 있어야 한다. 놀지 말고 계속 굴러야 한다. 그래야 기회가 생긴다고.

남성이 민요를 부르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이희문:민요를 부르는 남성은 더 힘들다. 기관에 들어갈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남성을 아예 뽑지 않는다. 민요 부르는 남성은 설 자리가 없다. 관현악을 해도 남성 키에 맞춰주지 않는다. 남성이 들어오면 피곤해한다. 전부 바꿔야 하니까. 귀찮아서 안 하려고 한다.

둘 다 현대식 국악을 하는데 타 장르 콘텐츠를 많이 접하고 절묘하게 빨아들이는 것 같다. 그래서 둘의 작품을 다른 음악가들이 존중하는 것 같다.
원일:오랫동안 영화감독이 꿈이었다. 영화를 통해 현대적 감각을 키웠던 것 같다. 영화를 무척 많이 보았다. 영화음악 작업을 몇 번 했는데 감독들보다 내가 영화를 더 많이 보았더라. 나는 영화가 음악적이라고 생각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보면 음악으로 장면을 발상한다. 음악과 이미지의 결합이 저절로 훈련되었다.
이희문:쉴 때는 다른 사람들 공연을 보러 다니는데 현대무용 공연을 많이 본다. 무용 공연이 재밌다. 무대의 상상력을 키워주기에 무용만한 것이 없다. 압축되고 함축적이다. 민요의 텍스트와 가장 닮아 있는 것이 무용이라고 생각한다. 판소리는 서사적이어서 다 설명을 하지만 민요는 압축적이다.

이희문씨의 음악을 뜯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포장지는 서양식인데 포장을 벗겨내면 정품 경기민요가 들어 있다. 사람들은 현란한 퓨전 음악을 들었다고 생각하는데 내용은 정통 민요다.
이희문:우리나라에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경기민요를 안 했으면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었을 거다. 그래서 다른 것 할 생각을 안 해봤다. 씽씽밴드를 할 때도 다른 멤버들은 노래를 새로 만들자고 했는데 나는 반대했다. 있는 민요도 다 하지 못했는데 새로운 것을 할 때가 아니라고, 좀 더 무르익었을 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민요라는 장르가 국악에서도 마이너리티 아닌가. 판소리에 비해 불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이희문:해외에 나가보니 민요가 굉장한 무기더라. 우리의 DNA를 오롯이 담고 있어서 더 강력했다. 씽씽밴드도 비주얼이나 사운드는 그들의 것이지만, 보컬의 목소리는 우리 것이었다. 인생 후반에 경기민요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소박한 꿈이 있다. 경기민요는 미개척 분야다.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그런 이야기들을 잘 꺼내지 않는다. 그걸 꺼내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 나중에 영화로 만들고 싶다.

즉흥적이고 거침없는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게 흥미로웠다.
이희문:즉흥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타고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돋보일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만 노는 사람이다. 이렇게 좋은 뮤지션이 함께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그 바운더리 안에서 에너지를 발산하는 스타일이라, 주변에서 콘텐츠형 가수라고 한다. 재담형 가수가 아니라.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도 내 무대는 완벽하게 나의 연출이었다. PD가 모두 맡겨주었다. 12회차를 녹화하는 동안 12번의 쇼를 만들었다. 힘들기는 했지만 많이 공부가 되었다.


원일 감독은 평창동계올림픽 음악감독에 이어 제100회 전국체육대회에서도 예술 총감독을 맡았다. 이번에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원일:이런 체육행사는 굿이면서 제의이면서 또한 예배다. 사람들을 20분 동안 침묵시켜놓고 뭔가를 하고 음악을 감각하게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그때 못 잡으면 끝이다. 스포츠 제전은 젊음에 대한 찬사로 일종의 나라굿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몸의 신화를 즐길 수 있도록 손기정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풀어나가려고 한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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