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문제처럼 보이는 한·일 무역전쟁의 배경에는 일본의 ‘일그러진 민주주의’가 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위태로운 행보 역시 그 위에서 해석해야 좀 더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 최고 지성으로 손꼽히는 우치다 다쓰루 고베 여자대학 명예교수는 아베 총리를 필두로 한 일본 우익의 불가해한 행보에 대해 가장 정확하고 거침없는 ‘주석’을 달고 있는 지식인이다. 스스로는 사상의 좌표를 ‘보수 리버럴’로 놓고 있지만 일본 사회와 정치에 대한 그의 발언과 행동은 특정 ‘이즘(ism)’에 가둬지지 않는다.

질 높은 학술 정보를 대중에게 전하는 데 온 힘을 쏟는 ‘지식 수입업자’ ‘거리의 사상가’를 자임하는 이답게 공저와 번역서를 포함해 출간된 책만 100여 권, 이 중 국내 번역된 책은 30여 권이다. 블로그와 트위터 역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퇴임 후에는 자택을 ‘모든 이의 집’으로 바꾸었다. 자택 1층에 무도관 겸 마을 공부방인 가이후칸(凱風館)을 열고 ‘앎’과 ‘삶’에 다리를 놓는 작업을 쉼 없이 하고 있다.

그는 8년 전부터 매년 한국을 방문했다. 〈하류지향〉 〈교사를 춤추게 하라〉 등이 번역되며 국내에는 교육 문제 전문가로 알려져 있지만, 우치다 교수 스스로는 한국과 일본 시민 사이 커뮤니케이션 통로가 되는 일에 좀 더 마음이 기울어 있다. 옛 종주국의 국민에게는 선대가 저지른 전쟁범죄를 기꺼이 ‘자신의 채무’로 떠안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접점이 늘어나면서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가이후칸 학인들과 한국을 여행하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 번역된, 우치다 교수와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 교수의 대담집 〈사쿠라 진다〉 (우주소년, 2019), 〈속국 민주주의론〉(모요사, 2018)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량배들의 애국주의’다.

아베 총리와 극우 집단이 오염시키고 있는 ‘애국’이라는 단어를 경유해 일본이 가진 정체성에 신랄한 평가를 내린다. 우치다 교수가 일본 사회의 특성과 한계를 짚어낸 역작 〈일본변경론〉(갈라파고스, 2012·절판)의 ‘업데이트’라 할 만하다. 7월16일 고베 가이후칸에서 우치다 다쓰루 교수를 만났다.

 

 

ⓒ시사IN 조남진우치다 다쓰루 교수는 “아베 총리와 우익 세력,
미디어 외에는 한·일 무역전쟁에 관심이 없다”라고 말했다.

 

 

 

 

 


한·일 무역전쟁이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화됐다. 일본 내 분위기가 궁금하다.

안타깝게도 내 주변에는 아베 총리 지지자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에 무슨 생각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웃음). 일반화를 감수하고 말하자면 아베 총리와 우익 세력·미디어 외에는 이 이슈에 관심이 없다.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하는 게 더 옳을지 모르겠다. 케이팝이나 영화·드라마를 통해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정치·경제 문제는 단절이라고 할 정도로 관심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철저히 국내 선거용 이슈라고 확신한다. 아베 총리로서는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혐한’ 세력에게라도 좀 더 단단히 어필할 필요가 있다. 자민당 집권 세력은 정치를 노력이나 재능이 아니라 충성심으로 한다. 국익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쿠라 진다〉와 〈속국 민주주의론〉을 통해 일본을 미국의 ‘속국’이라고 비판했지만, 아베 총리의 현재 행보를 보면 주변국은 물론 무엇 하나 개의치 않는 듯하다. 혹시 아베 총리는 이번 사태를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려는 건 아닐까?

일본을 한국과 같은 주권국가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74년간 사실상 ‘점령’ 상태다. 미군의 일본(오키나와) 주둔을 골자로 한 일·미 안보조약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에도 미군 기지가 있지만 협상을 통해 점점 축소하고 있지 않나. 일본은 협상 자체가 불가능하다. 전후 일본은 ‘대미 종속을 통해 대미 자립을 이룬다’라는 교묘한 기조로, 나중에라도 언젠가는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노력이 드물지만 있었다. 자민당 일당의 ‘55년 체제’가 유지되는 동안 자립은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말이다. 2009년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민주당)가 집권 후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밝히며 미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했지만, 일본 내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미국 외교 라인이 발목을 잡았다. 뒤이어 집권한 아베 총리는 일본을 주권국가로 회복할 생각이 없다. 미국과 맞서려 한 하토야마 전 총리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경제제재도 미국이 “그만둬”라고 하면 바로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한다.

ⓒAP Photo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8년 10월14일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자위대 사열식에 참석한 모습.


상대국이 있는 무역을 국내 정치용으로 쓰기에는 스케일이 크지 않나. 장기전이 될수록 일본에도 부담이 될 텐데.

아베 총리는 매우 단순하다. 자신의 말이 역사적 문맥 속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나 권력자가 궁지에 몰리면 가장 국수주의적(nationalistic)인 정책을 취한다. 반드시 ‘적’을 만드는 식이다. 아베 총리도 지지율이 떨어지는 와중에 개헌(헌법 제9조)도 불투명하고, 2020년 도쿄 올림픽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선거 승리 카드가 없다고 판단되니까 한반도나 중국을 적으로 취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자신의 지지층을 부추기는 거다. 그는 미래를 보지 않는다. 당장 지금만 극복하면 그만이다.

남북 평화 무드가 무르익으면서 더 이상 ‘북한 카드’를 쓸 수 없게 된 것도 이번 사태에 영향을 미쳤을까?

북한 위협이 추후 확실히 사라진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누구든 구실 삼을 거다. 미국이 파는 무기를 국민 세금으로 살 명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거의 모든 무기를 미국에서 구입한다. 옛날에는 북한이 핵실험을 하니까 막대한 무기 구입비용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현재로서 다음 타깃은 중국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우익 세력이 중국은 일본 국력으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한반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다’라는 사고방식이 은연중 작동해 이런 사달이 벌어졌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분리주의다. 일본·한국·중국·타이완 등 아시아 국가가 동맹이라 하더라도 우호적 관계 맺는 걸 원치 않는다. 그렇다고 아주 적대관계가 되도록 놔두지도 않는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의 수준으로 관리하는 거다. 문제가 생겼을 때 미국이 개입해서 결정할 수 있도록, 당사국끼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하는 거다. 이번 사태도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일 관계’는 없다. 미국은 아베 총리가 이번 사태를 국내용으로 쓰는 걸 어느 정도는 허용하겠지만, 언제 ‘선’을 넘는지 주목하고 있다가 개입할 거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대한(對韓) 정책은 매우 제한적이다.

한국과 일본은 탈냉전 이후 다른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인다. 한국이 독재·군사 정권을 거치면서 비틀거리긴 했으나 민주화라는 과제를 풀어나가고 있다면, 일본은 이른바 ‘평화헌법’이라는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한 가치를 저버리면서 퇴행 움직임을 보인다.

정치뿐만 아니라 전 분야에서 급격히 ‘열화’되었다. 아베 총리가 무능력한 정치인이지만, 현재 일본 사회의 퇴행을 모두 아베 총리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애초 아베 총리 같은 사람이 계속 정권을 잡을 수 있도록 허용한 국민의 문제이기도 하다. 2015년 전후 일본에서 가장 큰 시위가 있었다. 평화헌법 개정을 반대하며 조직된 ‘실즈’(SEALDs: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racy-s·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가 주도한 시위 참여 인원이 35만명이다. 2016~2017년 정권교체를 만든 한국 촛불집회에 참여한 인원이 100만명이었다. 단적으로 이게 일본 대중행동의 한계다.

 

ⓒ시사IN 신선영2015년 9월19일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일본 대학생 단체 실즈(SEALDs)가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이고 있 다.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과 경험이 다른 데서 오는 차이일까?

외부에서는 일본을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일본은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없다. 실즈의 주요 멤버 중 한 사람인 오쿠다 아키의 경우 당사자는 물론 가족까지 살해 협박을 받았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가혹한 비판이 이어졌다. 단지 더 많은 시민에게 호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직접행동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상당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온건한 운동이 없었는데, 여론은 실즈가 너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무시무시하게 몰아붙였다. 홍콩·타이완·한국 같은 시위가 일본에만 존재하지 않는 건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속국의 마인드와 말하기가 일상화되어 있다. 태어나서부터 계속 미국의 속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이 없고,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하기도 어렵다.

〈니혼게이자이〉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베 총리에 대한 20대 지지율이 70%가 넘는다. 60대 이상 고령층 지지율 49%에 비해 상당히 높다.

취업률은 좋아졌을지 몰라도 고용조건이나 환경은 더 나빠졌다. 일본 학생들은 눈에 띄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매우 강하다. 남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가이후칸에서 수련하는 중국인 대학교수가 있는데, 어느 겨울날 1교시 수업에 들어갔더니 교실이 캄캄하더란다. 아무도 안 온 줄 알고 불을 켰는데 학생들이 다 앉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의아했지만 일단 넘어갔는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길래 물어봤단다. 아무도 불을 켜려고 하지 않는데 나서면 ‘튀기 때문에’ 모두 가만히 있었던 거다. 학생들도 일본 사회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사회 모순을 바꾸자가 아니라 ‘모른다’고 한다. 모르면 알고 싶어야 하는데, 적극적으로 모르고자 한다. 바꿀 수 없으니까 적응한다는 거다. 사대주의가 만연하다. 그런 사회는 굉장히 단순하다. 예스맨을 양산하니까. 무의미하고 유해한 지시라도 따른다. 사회뿐만 아니라 가정도, 학교도, 심지어 동아리 활동 안에서도 명령만 있다. 그러면 성공한다. 의외로 쉽게 출세가 가능하다(웃음).

과거에는 한·일 관계가 정치·경제적 위기에 처했어도 문화적 연결이 일종의 보완 또는 완충작용을 했던 것 같다. 현재는 그 힘 자체가 약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 무역전쟁으로 인해 앞으로 한·일 관계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날까?

분위기나 감정은 파도 같다. 그때그때 파고가 있다. 어떤 나라를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건 휩쓸림에 따라 오르내린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1972년 중·일 공동성명 이후 일본에서는 친중 분위기가, 중국에서는 친일 분위기가 놀라울 정도로 고조됐었다. 2002년께 시작된 일본 내 한류 열풍은 여전하다. 시민사회에서는 문화적 친밀감의 역사를 쌓아가고 있고 이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미디어는 양국 시민의 친근한 분위기를 절대 보도하지 않는다. ‘으르렁’대는 모습을 더 선호한다(웃음). 과거 악연이 있으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한편으로 실제 혐중·혐한 세력이 존재한다. 요란해 보이지만 따지자면 10% 정도다. 이들을 필두로 양국 모두에서 관찰되는 민족주의는 한·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민족주의 속성상 위기일 때 고조된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자긍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웃 나라를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태도는 시민교육의 실패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나라에도 유익이 되지 않는다.

 

ⓒ시사IN 조남진7월21일 열리는 일본 참의원 선거 벽보가 고베시 한 골목에 붙어 있다.


한·일 양국이 이번 갈등을 딛고 협력의 ‘새판’을 짤 수 있을까?

미국이 일본에게 지시하면 가능할 것이다(웃음). 일본이 스스로 그렇게 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넷우익’에게 공격을 많이 받는다고 들었다.

넷우익의 반응은 절대로, 단 하나도 읽지 않는다(웃음). 일일이 반론하고 재반론하는 과정에서 그쪽 세(勢)만 불려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기자명 고베·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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