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무역전쟁 불씨는 박근혜 정부 때 발화했다
  • 이종태 기자
  • 호수 619
  • 승인 2019.07.29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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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정부의 행보를 참의원 선거용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일본 우익이 보기에 한국은 국가안보를 가장 위협하는 나라다. 박근혜 정부 때부터 한국을 ‘비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하며 장기 전략을 세워뒀다.
일본 우익 세력은 아베 정부의 대(對)한국 수출규제로 ‘혼네(본심)’를 벌거숭이로 노출했다. 대내외적으로 한국을 ‘일본의 국가안보를 해치는 비민주주의 국가’로 몰아붙이는 전략이다. 이런 비민주주의 국가에 일본산 전략물자를 제공한다면 어떤 ‘위험한’ 국가로 새어나갈지 모른다. 그래서 이른바 ‘화이트리스트(백색) 국가에서 한국을 배제’하는 방법으로 수출통제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화이트리스트 국가란 시쳇말로 ‘믿고 거래할 수 있는 나라’라는 의미다. 1990년대 이후 국제통상에서 가장 중시된 원칙은 자유무역이다. 정부가 정치적 의도에 따라 민간기업 간의 국제 상거래를 제한하면 안 된다. 물론 예외가 있다. 다른 나라에 ‘자유롭게’ 수출한 물자가 ‘악의 세력’에게 입수되어 ‘총포’로 돌아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즉, 안보를 위해서라면 자유무역도 제한할 수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 다양한 ‘수출통제 국제규범’들이 구축되어 있다. 재래식 무기, 핵무기, 미사일, 생물화학무기는 물론 이런 대량살상무기의 제조로 활용될 수 있는 물품에 대해, 각국 정부 차원에서 책임을 지고 자국 기업들의 수출을 관리해야 한다. 한국 역시 바세나르협약(WA),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핵공급국그룹(NSG) 등 7개 수출통제 규범에 가입해 있다.
ⓒEPA

개별 국가 차원에서 수출 물자를 통제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국제 수출통제 규범에 지정되어 있는 물품·장비·기술 등을 관리하면 된다. 국제규범으로 지정된 물품만 대량살상무기 제조에 악용되리란 법은 없다. ‘산업용’으로 여겨지지만 대량살상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 가능한 물품과 기술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반도체 제조의 핵심 소재인 불화수소는 인명살상용 사린가스에, 안경테 부품인 티타늄은 우라늄 농축으로 전용 가능하다. 그래서 각국은 대량살상무기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물품을 통제하는 ‘캐치올(catch-all)’ 제도를 운영한다. 수출허가 당국이 특정 품목을 찍어서 수출 기업에 통보하거나 혹은 수출 기업 스스로 ‘해당 품목의 수입자나 최종 사용자가 대량살상무기 제조에 활용할 의도를 가졌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수출에 앞서 정부 당국에 통지하고 심사를 받아야 한다. 수입자 처지에서는 상당한 기간과 불확실성(수출이 허가되지 않을)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수출국 정부는 ‘우리가 수출한 물자를 위험한 용도로 사용하거나 다른 불량국가로 유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나라’로 선정한 국가에 대해 캐치올 규제를 면제할 수 있다. 일본은 캐치올을 면제한 한국 등 27개 국가를 ‘화이트리스트 국가’라고 부른다. 국제 공동체의 건전한 일원이며 내부적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외부적으로 국제통상 규범을 지키는 나라로 간주되는, 이른바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이다. ‘일본과 국제사회의 안보에 해를 끼치지 않을’ ‘안보 무해국’들이다.

아베 정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

아베 정부는 남·북·미 판문점 회동 다음 날 7월1일 관보를 통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하는 법령 개정 의사를 예고했다. 7월4일, 1단계로 발동한 3개 반도체 핵심 소재(감광제 리지스트, 불화 폴리이미드, 고순도 불화수소)의 수출규제는 일종의 ‘맛보기’다. 삼성전자 등 한국 반도체 기업으로서는 한번 허가받으면 3년간 일본 당국의 심사 없이 수입할 수 있었던 반도체 소재의 조달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하게 되었다. 신청에서 허가까지 최장 90일이 소요되며 그나마 수출허가가 떨어지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2단계로 아베 정부는 7월24일까지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 제외’ 관련 일본 내 의견을 수렴한 뒤 그 여부를 각의(국무회의)에서 결정·공포할 계획이다. 이 조치는 공포 후 21일이 경과한 뒤부터 시행된다. 빠르면 8월 중순부터 한국이 화이트리스트 국가 명단에서 빠지게 되는 셈이다. 이후부터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수출하려면 캐치올 규제를 받는다. 해당 품목은 1100여 개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으로서는 첨단 IT에서 자동차·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산업 전반에 가해질 충격을 피할 수 없으리라 보인다. 일본 당국은 한국 경제를 가장 예리하게 타격할 수 있는 소재나 부품을 찍어서 자국 기업에 캐치올 규제 대상으로 통보하면 된다. 한국의 산업, 나아가 정치·외교 부문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베 정부가 이런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명분은 결국 국가안보다. ‘한국에 수출하면 일본의 국가안보가 위협받는다’고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 그럴까? 일본의 대한국 수출규제가 예고되었을 때 한국과 일본의 여론 대부분이 그 이유를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로 보았던 것을 감안하면, 아베 정부에는 정당한 명분이 없다.

일제강점기, 일본 전범기업들에 강제징용 당했던 한국인들은 1990년대 말부터 해당 업체인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에 손해배상을 청구해왔다. 일본 측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체결된 ‘청구권협정’에 따라 한국이라는 국가는 물론 개인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까지 모두 마무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 사법부는 대체로 ‘국가(한국) 대 국가(일본)’의 손해배상 문제는 처리되었지만, ‘개인 피해자 대 개별 일본 기업’ 사이의 그것은 해결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집권기(2012~2013년)에도, ‘일본제철(당시엔 신일철주금)이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을 배상해야 한다’라는 취지의 판단이 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내려졌다. 지난 6월엔 미쓰비시중공업에 손해배상을 청구한 피해자들이 고등법원에서 일부 승소했다.
ⓒ시사IN 신선영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와 가족이 2018년 10월30일 대법원 승소 판결에 대한 소감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었 다.

판결이 확정된 뒤에도 일본 기업들이 손해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한국 정부로서는 해당 기업들이 한국에 보유한 자산(특허권, 한국 내 기업에 가진 주식 지분)을 압류·매각한 돈으로 손해배상금을 지불하게 된다. 한국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법적 절차이지만 국제분쟁의 소지를 배제할 수는 없다. 다른 나라의 투자금을 압류하는 조처이기 때문이다. 아베 정부는 이 문제를 ‘제3국 중재위원회’를 통해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문재인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격노한 아베 정부가 수출규제라는 방법으로 보복하게 되었다고, 상당수 국내외 언론들은 추측한다.

아베 정부에 대단히 불리한 상황 인식이다. 자유무역을 제한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는 사실상 국가안보밖에 없다.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로 일본의 국가안보가 심각하게 훼손당했다고 우기기는 힘들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보복 조치로 수출규제를 단행했다면, 정치적 문제에 경제적 무기를 동원한 것으로, 자유무역 관련 국제규범 위반의 소지가 크다. 아베 정부도 이를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7월3일, 참의원 선거 당수 토론회에서 대한국 수출규제를 ‘보복’이라고 말하는 대신 다음과 같이 둘러댔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에게 우대조치를 취할 수는 없다.” 일본의 시각에서 볼 때 한국은 1965년의 청구권협정이라는 약속(개인 차원의 손해배상 문제도 마무리)을 어긴 나라다. 그렇다면 ‘대량살상무기로 전용될 수 있는 일본산 물자를 불량국가로 다시 유출하지 않는다’라는 국제규범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더욱이 무역규제 역시 한국에만 불이익을 줬다기보다 그동안 믿고 부여했던 우대조치(화이트리스트)를 철회한 것뿐이니 국제무역기구(WTO) 규범 위반도 아니라는 것이다.

7월12일 실무협의회에서의 ‘허무 개그’


아베 총리의 발언은 논리적으로 매우 허약하다. ‘한국이 어떤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일본 시각) 다른 약속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추정엔 근거가 없다. 더욱이 송기호 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통상위원장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의 소재 조달에 실제로 치명적 영향을 미치는) ‘사실상의 수출제한’도 WTO 규범을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관련 판례도 있다.

그 자리에서 아베 총리가 기자들에게 털어놓았어야 할 이야기는 ‘이런 나라니 저렇게 할 것이다’ 같은 근거 없는 추정이 아니었다. WTO 판례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는 것을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그는 한국이 자국에 들어온 일본산 물자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위험국가(북한)로 유출해서 일본의 안보를 저해했다는 ‘구체적’ 사유를 내놓아야 했다. 그래서인지 7월10일 전후에는 구체적으로 보일 만한 사유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다만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가 아니라 ‘언론에 흘리기’를 통한 외곽치기 수법이다.

7월9일 공영 방송인 NHK는 익명의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사린가스 등의 화학무기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는 소재가 한국에서 다른 국가(북한)로 흘러 들어갈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수출규제를 단행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반도체의 핵심 소재인 고순도 불화수소가 북한 등 ‘불량국가’의 사린가스 제조로 전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맹독성 신경가스인 사린은 1995년 사이비 종교단체인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에 살포해 13명이 숨지고 부상자 6300여 명을 낸 바 있다. 7월10일에는 일본 후지뉴스네트워크(FNN)가 “한국에서 비롯된 전략물자의 밀수출이 지난 4년 동안 156건”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지난 5월 <조선일보>가 우리공화당 조원진 의원이 입수한 자료를 인용·보도한 기사를 재활용했다. FNN은 한국이나 중국에서 생산 가능한 저순도 불화수소로도 사린가스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값비싼 일본산 고순도 제품을 입수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전략물자 ‘156건’이 불법 수출 건수가 아니라 ‘적발 건수’라는 것에도, 의도적으로 보일 만큼 주목하지 않는다.
ⓒ연합뉴스7월12일 일본 정부의 한국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해 열린 한·일 실무협의회.

7월 중순 현재까지도 일본 정부가 ‘한국의 수출통제 시스템이 엉망’이라는 구체적 증거를 제시한 적은 없다. “부적절한 사안이 있었다”라고 언급할 따름이다. 한국의 대북 제재 위반에 대한 뭔가 구체적 증거를 갖고 있다는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아니면 그런 효과를 의도했거나.

이렇다 보니 7월12일 한·일 실무협의에서는 ‘허무 개그’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한국 측 무역정책관들에 따르면, 일본 측 실무자들은 “부적절한 사안”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제3국(북한) 반출 문제와 연관된 것은 아니다. 다만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기는 어렵다.” 구체적 사례가 없다는 것인지, 있어도 내놓지 않겠다는 것인지 매우 모호하다. 한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한·일 양국 모두 대북 제재 위반 혐의에 대해 공동조사를 받자고 제의했으나 일본 측은 “국제기구에서 조사받을 사안이 아니다”라고 발뺌하고 있다.

사실 국가안보가 이유인 수출금지령에는 최근의 선례가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기업에 대한 미국 업체의 부품 수출을 금지한 명분이 바로 국가안보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대중국 무역 제재 이전에 국방부, 무역대표부, 의회 등의 보고서를 통해 구체적 사실들과 이에 따른 국가안보 침해 가능성을 확고히 밝혔다. 더욱이 미국의 시각에서 중국은 이질적 체제의 국가다. 선거로 정부를 선출하지 않고 삼권분립도 없다. 법치주의도 미숙하다. 중국은 시장경제 국가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국가가 주요 기업의 투자자인 동시에 경영자이며 심판자(규제 당국)이다. 미국이 중국의 통신 네트워크 자이언트인 화웨이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도 명확하다. 중국 정부의 지배하에 있는 기업이 미국과 서방 동맹국들의 통신 인프라(5G)를 장악하게 된다면, 유사시 이질적인 체제의 의도에 따라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혼란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야말로 국가안보와 직결된 문제다.

아베 정부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한국을 공격한다’기보다 ‘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다음 아주 열심히 이유를 찾고 있지만 여의치 않은 상태’로 보일 정도다. 자칫 한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글로벌 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한 조치를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동기는 무엇일까? 단지 7월21일 열리는 일본 참의원 선거에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만 보기에는 사안이 매우 중요하다. 오히려 아베 정부가 한국을 정말로 일본 국가안보의 주적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황당한 상황이 펼쳐진 것은 아닐까?

지난 4월 쇼고 스즈키 교수(영국 맨체스터 대학)가 <케임브리지 국제문제 리뷰>에 게재한 논문 <일본 수정주의자와 ‘한국이라는 위협’(Japanese revisionists and the ‘Korea threat’)>에 따르면, 일본 우익의 역사 수정주의자(revisionist)들은 실제로 한국을 일본의 국가 정체성과 안보에 대한 위협 세력으로 느낀다. 이 논문을 요약하자면, 수정주의자들이 집착하는 일본의 정체성은, 놀랍게도 ‘평화국가’다. 이는 역사 왜곡을 감행하는 핵심적 이유이기도 하다. 예컨대 본질적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일본이 20세기 초에 한반도를 점거하게 된 것은 지정학적 운명으로 인해 외부로의 확장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 국가들과 미국·러시아 같은 열강이 한반도를 점유하면 일본까지 위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35년의 일제강점기는 전적으로 스스로를 서방국가들로부터 지킬 힘도 갖추지 못했던 조선의 잘못이라고 간주된다.

이와 함께 수정주의자들이 중시하는 국가 정체성은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legitimate member)’이다. 서방국가들의 승리로 마감된 냉전 종식 이후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권을 옹호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수정주의자들은 일본이 이 같은 정체성으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평화국가와 ‘당당한 일원’이라는 국가 정체성은, 일본이 이른바 정상국가(합법적으로 군대를 보유하고 다른 나라와 교전권을 가지는)로 변신하고 동아시아의 지도국 지위를 둘러싸고 중국과 경쟁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중국은 공산당이 법률 위에 군림하는, 인권침해가 만연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정주의자들의 시각에 일본의 국가 정체성 및 안보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나라가 중국이나 북한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점이다. 한국이 군사적으로 일본을 위협하지는 않는데도 그렇다. 스즈키 교수는 한국이 수정주의자들의 주적으로 떠오른 이유를 과거사 문제에서 찾는다. 한국의 과거사 거론은 평화국가라는 일본의 정체성을 뒤흔든다. 더욱이 한국은 일본이 전쟁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죄나 보상을 하지 않는다는 국제 여론을 일으켜 인권 옹호 국가이자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대접받고 싶은 일본 수정주의자들의 염원을 짓밟는다.
ⓒ연합뉴스2016년 1월10일 도쿄에서 혐한 시위대 수백명이 ‘일본의 명예를 되찾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물론 중국과 북한도 일본의 과거사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지만 한국의 위력에 비길 바는 아니다. 중국 역시 ‘과거사’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인도·베트남·소련 등에 군사행동을 감행한 바 있다. 지금은 티베트과 신장에 대해 식민지 동화정책을 펼치는 중이며, 남중국해와 센카쿠섬 등에서 위력시위를 펼친다. 인권 측면에서도 중국은 대약진운동, 문화혁명, 톈안먼 사태 등의 전과가 있다. 중국이 일본의 군사주의나 인권 의식을 비판하는 것은 국제사회 차원에선 일종의 ‘내로남불’로 여겨진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군사력으로 외부를 위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스즈키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활력적인 민주주의와 글로벌 경제에서 점증하는 존재감 등은 세기에 걸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감을 뒤흔들고 일본의 존재론적 안보에 직접적 위협을 가한다”.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장 사건이 빌미


이에 따라 일본 수정주의자들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위협’에 대처할 전략을 만들어나갔다. 예컨대 한국을 ‘국제규범을 존중하지 않는 나라’라고 비판한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벌인 민간인 학살, 독도 문제(일본인들은 자국의 고유 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했다고 주장한다) 등은 수정주의자들이 즐겨 활용하는 사례다. 심지어 한국의 ‘반일 시위’를 ‘한국인들의 감정에 치우쳐서 규범을 무시하는 성향(Korean emotionality and unruliness)’을 입증하는 증거로 환기하기도 한다. 이런 ‘한국 폄하하기’ 전략이 국제사회에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스즈키 교수는 평가한다. 그러자 수정주의자들은 급기야 2014년부터는 한국을 ‘비민주주의 국가(undemocratic state)’로 지칭하는 데 이르렀다. 그해, 극우 성향 <산케이 신문>의 가토 다쓰야 서울지국장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과 관련한 칼럼을 썼다가 한국 검찰에 기소당한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평가절하할 수 있는 대단히 좋은 기회였다. 아베 총리는 언론들이 연일 대서특필하는 가운데 귀국한 가토 씨를 관저로 초대해 장시간 위로하는 방법으로 이 사건에 무게를 부여했다. 일본 언론은 한국을 “반일 감정으로 통치되는 비민주주의 국가” “풀뿌리 파시즘” 등으로 호칭했는데, 이는 일본의 공식적 외교정책에 반영된다.

2015년 3월4일 일본 외무성은 홈페이지에서 “한국은 일본과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 기본 가치를 공유하는 중요한 이웃 국가”라는 구절을 삭제했다. 일본 외교 활동과 방침을 기록하는 연차 보고서인 2015년 외교청서(Diplomatic Bluebook) 역시 같은 구절을 제거했고, 이 상태를 2019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아베 정부는 올해 비로소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제외 국가’ 내지 ‘안보 유해국’으로 지정할 움직임을 보인 것이 아니다. 한국을 ‘국제규범을 존중하지 않는 비민주주의 국가’이며 정상적 소통이 불가능한 나라로 몰아붙이려는 우익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전략이 일본 정부의 공식 정책에 관철된 것이다. 그들은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에서 한국을 축출하고 싶어 한다.

이런 측면에서 아베 정부의 최근 움직임을 단지 7월21일의 참의원 선거에 활용하기 위한 단기적 전략에 바탕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문재인 정부의 과격한 대일 외교’ 때문에 지금 같은 사태가 초래되었다고 주장하는 야권은 아베 수출통제 정책의 뿌리가 박근혜 정권 시기에 발아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각종 낙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실제로 소재·부품의 공급선을 죄어나갈 때 한국 산업의 피해는 불가피하다. 그 피해의 정도, 소재 공급선의 다변화와 국산화의 가능성 및 기간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나오고 있을 뿐이다. 물론 아베 정부 역시 한국은 몰라도 글로벌 경제 전반에까지 심각한 피해가 실제로 확산되는 경우를 반길 처지는 아니다. 그러나 일본을 통상 관계에서조차 신뢰하기 힘든 국가로 몰아넣고 있는 아베 정부의 ‘감정에 치우쳐 규범을 무시하는’ 성향을 감안하면 앞으로의 사태 추이를 결코 낙관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민관은, 아베 총리 등 수정주의 세력이 당초 의도를, 한국과 더불어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민주주의 국가인 일본에서 관철할 수 없는 방향으로 대응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일본 수정주의 세력의 주장과 달리 비민주주의적이거나 반일 감정 및 충동에 따라 좌우되는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일본 시민들과 국제사회에 확고하게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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