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잡던 사내 물고기를 지키다
  • 김만석 (독립연구자)
  • 호수 619
  • 승인 2019.08.0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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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양어선 선장으로 평생 일했던 이윤길은 귓속말로만 전해졌던 선원들의 이야기를 문학을 통해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수산자원을 보호하는 ‘국제 옵서버’가 되어 다시 바다를 누빈다.

이윤길은 원양어선 선장이었다. 1959년 강원도 주문진에서 태어나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부모덕에 밥 굶는 일은 면하고 살았다. 가난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이 원양어선을 타는 일이라고 믿은 그는 1975년 주문진수산고등학교 어업과에 입학한다. 1977년 뱃사람에게 여권이나 다름없는 ‘선원수첩’을 발급받았다. 그는 어선 면장(5급 항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1979년 남아메리카 북부 수리남공화국의 새우 트롤선에 승선해 원양어선에 첫발을 들인다. 배고픔과 가난을 넘어 자유롭게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들뜨면서 말이다.

배에 오른 뒤 그는 좌절한다. 아무리 5급 선원이지만, 선장 어깨너머로 원양어선의 모든 것을 관리·조절· 통제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다고 믿었는데, 조리장을 맡으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배 터지게 쌀밥을 먹는 것은 좋았지만, 그는 선장이 되기 위해서이지, 조리장이 되려고 배를 탄 것은 아니었다. 원양어선에서 불만을 품는 것과 반항을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는 조리장을 할 수 없다고 버텼고 밤마다 선배 선원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그 지옥을 견뎠다.

ⓒ이윤길 제공이윤길은 1977년 선원수첩(아래)을 발급받고 뱃사람의 자격을 얻었다.
이후 2014년까지 전 세계를 누비며 원양어선 선장으로 일했다.

역설적으로 선장을 들이받은 덕에 그는 자격을 가진 선원으로 배에 남을 수 있었다. 이 일로 그는 자신이 선장이 되면 절대 ‘폭력’으로 선원들을 통제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첫 항해에서 그는 스페인 영해를 침범해 나포되기도 했다. 석방된 뒤 프랑스령 기아나와 브라질 근해에서 조업하고 귀국한다. 선배 선원들에게 밤마다 맞으면서도 선장이 되고자 의지를 불태웠지만 노동강도에 비해 벌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하선하자마자 도망치듯 서울 구로공단에 취업한다. 두 달 일하고 그만두었지만 말이다.

당시 원양어선 승선에 필요한 선원수첩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경찰 ‘외사과’의 조사를 받고 허가가 나야 했다. 가족과 친인척 조사를 거친 뒤에야 원양어선을 탈 수 있었다(지금은 승선 교육을 따로 받고 간단한 서류만 작성하면 선원수첩이 문제없이 발급된다). 당시 바다는 냉전으로 얼어서 철저히 갈라져 있었으며 쇄빙선으로도 갈 수 없는 곳이 있었다.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영역이 바로 원양이었다. 1982년 이란 호르무즈해협 입구 반다라바스 어장에서 처음으로 ‘북한 선원’을 보고 놀랐던 경험을 그는 잊지 못한다. 그가 원양어선을 타기 이전부터 그리고 이후로도 바다는 이념과 생존의 각축장이었다.

‘국민들에게 신선한 단백질을 제공한다’는 국가로부터 하달된 신념은 가끔 자부심이 되기도 했지만, 하급 선원에겐 소용이 닿지 않는 슬로건일 뿐이었다. 바다만 보고 살아서인지 하선 후 그는 육지 생활이 견디기 어려웠다. 구로공단의 닭장 같은 곳에서 하는 노동이 더욱 원양어선행을 부채질했다.

 

한국의 원양어업은 1957년 제동산업주식회사(사장 심상준) 소속의 230t급 지남호(선장 윤정구)가 인도양의 니코바르 안다만 해구 어장에서 다랑어류 10t을 수확하면서 첫걸음을 뗐다. 지남호에서 잡은 다랑어는 이승만 정권 때 경무대에 가져가 사진을 찍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윤길이 배에 오를 무렵에는 원양어업에 대한 관심도 많이 사그라졌다. 그는 처음 선원수첩을 발급받은 지 15년 만인 1992년 선장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원양어업은 체질 개선과 인적 재편이 본격화하면서 전반적인 하락세로 들어섰다. 선장으로서 그의 항로도 불안정했다. 선주와의 갈등이나 기관실 침수로 배가 침몰하기도 했고, 승선하던 배가 매각되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1999년에는 일본 해역에서 봉수망 조업 도중 영해 침범으로 나포되어 센다이 형무소에서 보름을 보내고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바다에서 ‘갈등’을 처리하고 조율하는 일이 물고기를 잡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선상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반란과 폭력

1952년 이승만의 ‘평화선’ 선언에서부터 1982년 채택되어 1996년 실시된 배타적 경제수역(국제협약에 따라 경제적인 주권이 미치는 수역)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원양어업은 점차 위축되어가는 실정이었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인 선원이 줄고 외국인 선원으로 대체되었으며 원양에는 중국 어선들이 대거 진출했다.

2014년 〈원양산업총조사〉에 따르면, 원양어선 회사는 총 86곳, 해상직에 종사하는 한국인은 2210명이고 외국인은 6276명이었다. 회사 수는 1970~1980년대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한국인 선원도 크게 감소했다. 이윤길은 그동안 피지·통가· 포클랜드·케이프타운·더반· 포트엘리자베스·모리셔스·싱가포르 등지를 누비며 물고기를 쫓았지만, 원양어업의 불황을 타개할 방법은 별로 없었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이 모든 경험을 흘려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글로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숱한 동료들과 선원들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도 필요했다.
그렇게 2007년부터 꾸준히 바다와
관련된 시와 소설,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문학을 통해서 원양 경험을 남기고자 한 것은 자신의 이력을 집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간 바다와 분리되어 있는 대지에 바다를 접속하는 일이 물고기 잡는 일만큼 중요하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선장의 자부심은 남달랐다. 뱃사람에게 자부심이라는 건, 성정 또한 더럽다는 뜻과도 동일했다. 어획을 위해서라면 폭력적이기도 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외국 선원들이 배에 불을 질렀다. 한 번만이 아니라 그가 트롤선에서 선장을 하는 동안 배 세 척이 선원들이 지른 방화로 사라졌다. 승선하는 배마다 불바다가 되자 선주들은 선장을 기피했다.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사주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선장은 선장이 아니다.” 이윤길이 지난해 발표한 〈하선자들〉이라는 소설의 한 대목이다. 배 위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관계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이는 그가 당한 경험을 토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원양어선이란, 서로 다른 민족이나 인종이 이합집산하는 영역이자 사주와 선장의 긴장이 점철되어 있으며 선원들 사이의 위계적 관계와 권력이 교차하는 장소다. 소설은 방화를 일삼는 선상 ‘반란’과 이를 제압하는 ‘폭력’ 역시 무시로 일어난다는 것을 묘사함으로써, 제도적 관계가 고정되어 있기보다 관계 양상에 따라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세세한 기록은 ‘뱃놈’으로 치부된 선원들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뱃사람들에게 갖는 부정적 표지가 ‘규칙’이나 ‘규범’ 바깥에 놓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낙인이어서, 2000년대까지 사실상 선원들에 대한 이야기는 귓속말로만 전해질 뿐이었다. 육지를 보살펴왔던 원양어선을 탄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사자의 자기 진술이라는 차원에서 중요한 기록물이다.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영도의 하리를 지나 태종대로 가는 길 바다 쪽 언덕에 1979년 건립된 순직선원위령탑이 있다. 여기에 2006년에 준공된 순직선원위패봉안소가 함께 마련되어 있다. “이곳을 우리 전 해양인의 성역으로 삼아 선령들의 고귀한 희생을 숭앙 위로하고 도약, 한국 해양의 정신지표로 삼는다”라는 안내문의 거창한 목소리에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까지 자아내는 곳이다. 냉전체제 아래 해안선이 철책으로 둘러싸이면서 바다가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합뉴스한국의 원양어업은 1990년대 이후 크게 위축됐다. 위는 참치 원양어선의 조업 모습.

근대 예술의 주요한 상상력의 원천이 바다였음에도 우리는 바다를 잃어가고 있다. 부산 근대미술사에서 부산항과 바다를 그린 작품이 많은데 해방을 지나면서 ‘바다’를 그리는 게 아니라 ‘항만시설’과 ‘도시’를 그린 작품이 더 많아졌다. 그만큼 원양 경험이 도시 내부로 들어오는 게 쉽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시선은 바다 너머로 나아간 게 아니라, 중심화한 도시로 함몰되어갔다고 해도 좋다. 바다는 간첩이 잠입해 들어오거나, 밀항이 일어나는 불법적 영역이거나,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린 공포의 공간으로 인지되고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다. 원양어업이 쇠퇴하고 선원들 대다수가 외국인 노동자로 채워지면서 일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먼바다의 기록은 완전히 사라지기에 이른다.

물론 연근해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각광받는 곳 가운데 하나다. 해수욕장이나 캠핑, 레저스포츠, 식재료, 아름다운 풍경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모으는 것도 분명하다. 원양은 다르다. 예컨대 이자카야에서 흔히 주문하는 ‘메로구이’의 메로가 남극해의 수천 미터 심해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에게 메로구이란 바다의 경험이 지워진, 하나의 먹을거리일 뿐이다. 메로구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식탁에 오르는지 좀체 알기 어렵다. 메로구이는 ‘메로(Merulza Negra:검은 대구, 파타고니아 이빨고기)’ 머리 부위의 살을 구워서 내는데, 몸통은 대체로 일본과 미국, 유럽으로 거의 전량 수출한다고 한다. 생물학적으로도 귀하고 상품으로도 비싼 물고기인데, 몸통 부위를 한국에서는 먹어보기 어렵다. ‘메로보다 맛있는 물고기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는 이윤길의 말처럼 원양어선에 오른 사람들만이 라면에 넣어
귀하게 먹어보았을 뿐이다. 한국은 남극해에서 메로를 불법 조업하다가 2013년 미국으로부터 예비불법어업국으로 지정되었다. 2015년 2월에야 해제되었다.

“물고기의 눈으로 물고기 보호하겠다”

2014년 마지막 항해에서 동남아 선원이 그물에 휘말려 죽은 뒤, 이윤길은 원양어선 타는 일을 그만두었다. ‘땅 멀미’가 겨우 진정될 즈음 바다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기라도 했는지 이윤길은 ‘국제 옵서버(International Scientific Fisheries Observer)’로 다시 6개월여를 바다에 나가 산다. 국제 옵서버는 ‘공해상의 수산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조업의 관리·감독 및 과학적 조사를 목적으로 국제기구 또는 국가의 권한을 받아 선박에 승선하는 사람’이다. 2001년 유엔 공해어업협정 발효 후 수산자원 보존 및 관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도입된 직업이다. 한국에는 34명(2018년 1월 기준)이 활동하고 있는데, 국제기구의 규제 강화로 2022년까지 국내에서만 110명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제적인 직업이다 (〈한국수산신문〉 2018년 1월8일).

우리나라도 2002년부터 국제 옵서버 제도를 시행했다. 수개월 동안 바다에 나가 있어야 하는 옵서버 자격증을 따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관련 학과를 졸업하거나 2년간의 유관 경험이 있어야 하고 자격증 시험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국제 옵서버가 되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국제 옵서버의 수요가 국가 차원에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수산자원이 그만큼 불충분하며 보호와 관리가 시급함을 알려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명태는 물론이거니와 대구 역시 방류를 하고 있는 실정이니 ‘국민 생선’이 된 물고기들의 운명은 앞으로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물고기를 잡던 이윤길은 이제 국제적으로 물고기를 보호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오어(吾魚) 선장’이라고 불렀다. 자기 자신이 곧 물고기라는 뜻이다. 어족자원 멸종의 시대에 물고기의 눈으로 물고기를 보호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렇게 그는 물고기 같은 사내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는 지금 남극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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