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를 위해 최근 글쓰기 과외를 시작했다. 40대에 막 접어든 두 분이 수강생이다. 한 수강생은 국회에서 오래 일하며 많은 글을 써왔다. 처음 그의 글을 보았을 때는 왜 과외를 받으려고 하는지 의아했다. 문장도 형식도 나무랄 데 없었다. 같은 글을 두 번째 읽고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의 글은 언제나 그 자신을 비켜나 있었다. 전문용어가 가득한 문장과 단정한 형식 사이에 자신의 목소리를 꼭꼭 숨겼다. 그는 “저는 텅 빈 사람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수업에서는 그가 자신의 몸을 직접 통과한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함께 연습한다.

반면 또 다른 이는 어떤 주제를 던져도 개인 경험에 국한된 글을 썼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시댁과 육아 그리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의 에피소드로 자주 한정됐다. 주부로 오랜 세월을 보낸 그의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는 딱딱한 글쓰기의 언어가 적합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훌륭하지만 거기서 그친다면 조금 아쉽다고 조언했다. 개인의 경험 뒤에는 언제나 집단의 경험이 놓여 있기 마련이니까. 그와는 자신의 경험이 어떻게 사회와 세상을 향해 확장될 수 있을지 함께 궁리한다.

오랜 세월 여성을 배제해온 활자의 세계  

ⓒ정켈


사적 글쓰기와 공적 글쓰기가 공존하는 글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자주 실패한다. 대학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훈련한 글쓰기 덕에 나는 기존 지식을 습득하고 잘 정리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나 역시 ‘나’라는 주어를 꺼내기 두려웠다. 페미니즘 수업에서는 달랐다. 그 수업에서만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었다. 활자화된 세계에서는 오랜 세월 여성을 배제해왔다. 그 단단한 세계에 균열을 내는 일은 지식보다 자신의 경험을 믿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서 시작된다. 내 이야기로 시작해 사회와 세상으로 확장된 이야기로 끝맺는 것도 가능했다. 내 이야기를 잘하기란 몹시 어렵다. 글 속에서 자신이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나머지 자꾸만 변명하고 만다. 다른 사람에게 주목해야 할 때 자신에게 도취하고 만다. 나를 너무 아낀 글쓰기는 자주 연민, 자랑, 하소연이 뒤섞인다. 자기애와 자기 연민으로 똘똘 뭉쳐 도저히 다시 볼 수 없는 글도 있다.

자기 보호에 앞장서느라 진실을 감추는 글이 지면으로 공표될 때는 더욱 악해진다. 누구에게나 발언권을 주지 않으므로. 지면을 갖는 것은 권력이고, 그 속에 등장한 인물은 독자에게 일일이 해명할 수 없다.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같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한동안 몹시 두려웠다. 혹시라도 그런 글을 쓰게 되진 않을까? 또 그것이 들통 나 낱낱이 파헤쳐지진 않을까? 둘 중에 무엇을 더 두려워하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두려운 마음에 지금까지 쓴 글을 모조리 불태우고 싶을 정도였다.

여성으로 살아오며 차곡차곡 쌓인 분노와 슬픔은 펜을 들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반대로 글을 쓰는 나와 실제의 나를 분리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침착하게 글을 써야 하는 순간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현명하게 글을 써야 하는 순간에 분별력을 잃고 만다.

내가 그동안 만나온 수많은 여자들은 갈라지고 떨리는 목소리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해냈다. 글쓰기 수강생 두 분은 각자 자신들의 글에 결핍된 부분을 채우고자 부끄러움을 이기고 내게 글을 보인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며 두려운 마음을 안고 이 글을 쓴다. 개인의 고통을 목격하고 기억하며 동시에 이를 공공의 영역에서 침착하고 현명하게 전달하기. 이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을 잘 이어나가길 바라면서.

기자명 김민아 (페미당당 활동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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