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기억하는 목소리가 있다. 발표된 지 벌써 20년을 훌쩍 넘긴 S.E.S.의 노래들을 듣다 보면 기억보다 몸이, 귀가 먼저 반응하는 구간들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해 언제까지나 Baby you always in my heart’라며 몸이 부서져라 외치는 ‘아임 유어 걸(I’m Your Girl)’의 하이라이트, 유로 댄스팝 ‘드림스 컴 트루(Dreams Come True)’가 빚은 꿈과 몽환의 세계의 문을 여는 주문 ‘Baby~’, 고급스러운 뉴 질 스윙 사운드에 맞춰 곡 도입부와 후반부 긴 시간 이어지는 ‘Love’의 애드리브 등 이 모든 구간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한 사람, 바로 바다이다.

대중이 처음 바다를 기억한 건 1997년, 케이팝의 ‘조상님’ S.E.S.의 데뷔를 통해서다. 소리꾼인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남다른 목청을 자랑하던 바다는 중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예술고등학교(예고) 진학을 꿈꿨다. 부모의 사업 실패로 집이 아닌 성당 부속 건물에서 10대 시절을 보내야 할 정도로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지만 그만큼 바다의 재능은 더욱 크고 강하게 다듬어졌다.

ⓒ시사IN 양한모


실기 1등을 차지하며 당당히 입학한 예고는 바다에게 운명 같은 기회를 제공했다. 예고 축제 때 학교를 방문한 캐스팅 디렉터의 손에 이끌려 SM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한 그는 이후 케이팝의 역사가 되는 S.E.S.의 주춧돌이었다. 당시 세계적 인기를 끌던 R&B 트리오 T.L.C를 모티브로 삼은 그룹은 메인 보컬 바다를 중심에 놓고 유진과 슈를 서브 보컬로 갖추며 형태를 잡았다. 세 사람의 멋진 균형감은 물론 어떤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는, 훌륭한 검처럼 잘 벼려진 바다의 수준급 보컬이 S.E.S.의 도시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완성하는 데 적잖이 기여했다.

지금도 특유의 발성이나 제스처를 따라 하는 예능인들이 있을 정도로 독보적인 바다의 목소리와 무대연출은 그룹 활동 이후에도 꾸준히 그의 커리어를 뒷받침했다. 2010년을 전후로 무사히 안착한 뮤지컬 시장에서의 존재감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숨어서 듣는 명곡’으로 다시금 회자되는 솔로곡 ‘매드(Mad, 2009)는 그런 바다만의 개성을 극대화한 노래다. 발표 당시만 해도 다소 난해하다는 평가를 들었던 이 곡은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과 끝없이 증폭시키는 바다의 목소리가 가진 과잉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며 바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인상적인 순간을 연출한다.

타고난 능력에 비해 가수로서의 활약은 생각보다 활발하지 않았던 그가 최근 다시 한번 대중에게 존재감을 드러낸 건 유튜브 덕분이다. 올해 초부터 일상 브이로그, 커버곡 등을 간헐적으로 업데이트 중인 유튜브 채널 ‘BADA OFFICIAL’에서 가장 반응이 좋았던 건 바다가 직접 부른 커버곡 영상이다. 특히 영화 〈알라딘〉의 삽입곡인 나오미 스콧의 ‘스피치리스(Speechless)’는 영상 개시 열흘 만에 조회 수 120만을 넘기며 화제를 모았다.

몇 해 전 음악 프로그램 〈히든 싱어〉에 출연했을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바다는 모창 가수들의 신출귀몰한 노래를 들으며 “제 목소리가 유일무이하다는 아버지 말은 틀렸어요!”라고 소리쳤다. 그 말은 틀렸다. 바다, 최성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기자명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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