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30주년’ 독일은 지금
  • 베를린·남문희 기자
  • 호수 618
  • 승인 2019.07.2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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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초반 ‘유로존 위기’를 계기로 유럽의 절대 강자로 떠오른 독일을 보며 유럽인들은 ‘독일의 과거’를 떠올린다. 극우 정당 AfD가 세력을 키우면서 걱정은 두려움이 되고 있다.
드디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섰다. 30년 만이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굳게 닫혔던 저 문도 활짝 열렸다. 20대 후반의 초년 기자 시절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개방된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울려 퍼진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는 초년 기자의 가슴에 선명한 화인을 남겼다. 남북관계가 뒷걸음질할 때마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환호하던 독일인들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쓰렸다.

6월22일 오후 5시인데도 태양은 여전히 이글거렸다. ‘독일의 관문’에서 ‘유럽의 관문’으로 승격했다는 브란덴부르크 문의 명성답게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이 넘쳐났다. “환희가 날개를 펼치면 모든 인간이 형제가 된다”라는 환희의 송가는 들리지 않는다. 관광객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 너머에서 곧 어둠이 몰려올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6월21일 오후에 만난 하네스 모슬러 교수(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과)의 발언이 귓전에 맴돌았다. 모슬러 교수는 서울대에서 ‘한국정치’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통일 30주년’에 대해 독일인으로서 느끼는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통일은 역사적 사건이고 이젠 과거다. 지금은 현 사회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

ⓒ시사IN 남문희분단의 상징에서 통일의 상징으로 바뀐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평범하고 밋밋하지만 의미심장했다. 묘하게 귓전에 맴돌았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독일 통일로부터 뭔가를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인에게 독일 통일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독일인인 모슬러 교수에게는 ‘과거의 역사’일 뿐이다.

정범구 독일 주재 한국 대사도 비슷한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최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으로, 주독일 한국 대사관과 베를린 훔볼트 대학이 학술행사를 공동 주최했다. 그런데 독일인 참가자들이 상당히 곤혹스러워했다고 한다. 학술대회의 주제를 들으니 ‘그럴 만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장벽은 과연 사라졌는가’라는 주제에 ‘독일 통일에서 (한국은) 과연 무엇을 배워야 하나’가 부제였다.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은 독일 통일 경험을 흡수해 국내에 전파하는 창구 구실을 해왔다. 통일부에서 파견된 주재관들이 그 역할을 주로 담당했다. 1990년대 이후 주재관으로 파견된 통일부 공무원 중에는 독일 통
ⓒ조대근 제공정범구 독일 주재 한국 대사(위)는 “서독의
시각이 아닌 동독의 시각에서 독일 통일을
보면 문제가 많다”라고 말한다.
일 전문가가 된 사람들이 꽤 있다. 그동안 배우는 처지에 서 있던 주독일 한국 대사관 측이 독일 사람들에게 거꾸로 ‘장벽이 사라졌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정범구 대사는 “독일 참가자들이 내적 통합에 대한 문제 제기를 주로 했다. ‘눈에 보이는 장벽은 사라졌지만 머릿속 장벽은 더 높아졌다’는 얘기가 나왔다”라고 말했다. 정 대사는 다음과 같은 신선한 화두도 제기했다. “그동안은 주로 서독의 시각에서 (독일 통일을) 봐왔다. 동독의 시각에서 보니 고려할 문제가 많다.”

동독의 시각이라! 지난 30년간 독일 통일에 대한 한국의 관심은, 정 대사 언급대로 주로 서독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마저도 1970년대 브란트 총리가 추구한 동방정책에 국한됐다. 일부 보수 쪽에서 이에 반발해 ‘동방정책보다 기민당의 힘의 우위 정책이 통일에 더욱 기여했다’라는 반론을 펴기도 했으나 크게 설득력을 갖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흡수된 동독이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내 한 독일 전문가는 “우리는 독일의 반만 알았다. 동독은 미지의 상태로 사라져버렸다”라고 말했다.

유럽에 던져진 ‘새로운 독일 문제’

지금은 동독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1990년 10월3일 서독 체제에 편입되어 지내온 동독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작업이, 독일의 국가 정체성 차원에서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거대한 정치·경제적 지각변동에서 동독 사람들이 캐스팅보트를 쥐었기 때문이다.

앙케 피들러 교수(베를린 자유대학 언론·커뮤니케이션학과)는 통일 당시 서독이 동독 언론 시스템을 흡수한 사례를 통해 통일에 대한 독일인의 회한과 우려를 설명했다. “동독 사람들은 1989년 평화시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 기간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들만의 새로운 미디어 시스템에 대한 논의가 오가는 중이었는데 통일이 되면서 서독의 시스템이 동독을 삼켜버렸다. 미디어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서독의 영토를 넓히는 형태로 통일이 진행됐다. 왜 공동의 비전을 만들어가지 못했을까. 역사를 되돌릴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전환기다. 그때의 실수가 정치에서 의석수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걱정을 넘어서는 불안감이, 불안감을 넘어서는 공포감이 느껴졌다. 공포감은 구체적이다. 그 대상은 옛 동독 지역을 무대로 세력을 넓혀가는 극우 정당이다. 2013년 창당한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지지세가 심상치 않다. 2013년 총선을 앞두고 함부르크 대학 경제학과 교수 출신인 베른트 뤼케 교수를 공동 대표로 AfD가 창당되었다. 초기에는 메르켈 총리의 유로존 정책을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데 중점
ⓒ조대근 제공한스 모드로 전 동독 총리(아래)는
‘전쟁을 회피하지 않고 감수하는 독일’이
될까 봐 걱정한다.
을 두어 자유주의 성향 지식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2015년 메르켈 총리의 시리아 난민 포용정책을 계기로 반이슬람주의·인종차별주의·신나치 등 극우 성향 인사들이 AfD 지도부를 장악했다. 물론 ‘반이민 극우세력’의 창궐은 유럽 정치에 보편적 현상이다. 미국의 트럼프 정부나 영국의 브렉시트 역시 같은 맥락이다. 특별히 새롭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독일에서만은 ‘또 다른’ 의미를 띤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동안 봉인되었던 나치즘과 인종차별주의가 지각을 뚫고 분출되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무서운 일이다. 더 근원적으로는, 극우세력의 창궐이 근대 이후 유럽의 골칫거리였던 ‘독일 문제’와 접목될 가능성이 있다.

지금의 독일은 통일 이전의 독일이 아니다. 2010년대 초반의 ‘유로존 위기’를 계기로 유럽연합(EU)을 자신들의 안마당으로 만들어버린 공룡화된 독일이다. 그 독일의 정체성이 어디로 향할지 모른다는 불투명성 자체가 공포다.

올해 92세인 한스 모드로 전 동독 총리는 이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제기한다. 그는 1989년 평화혁명기부터 1990년 4월12일까지 동독의 마지막 총리직을 담당했다. 옛 동독의 운명을 책임진 인물답게 비상한 기억력과 열정의 소유자였다. 그는 당시 자신의 통일 구상과 그것이 무산된 뒤 30년이 지난 지금의 독일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1989년 당시 콜 서독 총리와 교섭할 때 모드로 총리가 내세운 것은 3단계 통일방안이었다. 동·서독이 3~4년에 걸친 조약공동체를 구성한 다음 국가연합 단계를 거쳐 연방제 통일로 가는 구상이었다. 당시 모드로 총리는 즉각적인 통일에는 부정적이었다. 고르바초프식 사회주의 개혁을 통해 동독 사회의 자생력을 키우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급박한 정세에서 이런 이상주의적 접근이 실현되기 어려웠다. 동독 주민의 통일 열기를 확인한 콜 총리는 그의 제안을 외면했다.

30년이 지난 오늘날 모드로 전 총리는 ‘잘못된 통일 과정’의 후과로 “지금 유럽에서 ‘새로운 독일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라고 말한다. “냉전 시절에도 ‘독일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독일과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느냐’의 문제였다. 통일 이후 독일은 더 크고 강력해지면서 2015년쯤에는 정치·경제·군사 측면에서 모두 거대한 나라로 재탄생했다. 유럽의 지도적 권력이다. 현재 브뤼셀 유럽의회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의안을 결정하는 주체는 독일이다.” 모드로 전 총리는 이런 변화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EPA2017년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극우 정당인 AfD는 94석을 얻으며 제3당으로 약진했다. 위는 선거 당시의 AfD 지도부 모습.
그에 따르면 2015년 이후 네오파시즘 세력이 독일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은 “과거의 독일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잘못되었다. (이런 과거사가) 더 이상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앞으로 독일은 책임을 지는 국가로 전환하겠다”라고 선언했다. 모드로 전 총리는 이 ‘책임을 지는 국가’를 “전쟁을 회피하지 않고 감수하는 독일”로 해석했다.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분단과 통일을 거치며 과거와 결별하는 듯했던 독일이 ‘통일 과정의 잘못’으로 인해 결국 이전 모습으로 회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언급한 ‘새로운 독일 문제’라는 말 속에 그 심각성이 함축돼 있다. 유럽에서 언급하는 ‘독일 문제’란, ‘독일이 통일되면 힘을 갖게 되고, 그러면 유럽의 평화가 깨진다’는 근대 유럽의 고질병을 의미한다.

6월22일 오후 들렀던 독일역사박물관은 바로 독일 문제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장소였다. 독일 문제의 시작은 1000년 동안 유지된 신성로마제국이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붕괴되면서다. 많은 왕국과 제후국으로 이루어져 유럽 전체를 지배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후예들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새로운 통일 국가의 구성원은 누구이고 국경선은 어디이며 영국·프랑스 등 서유럽과 동유럽 사이에서 어떤 정체성을 선택해야 하는가 등이 독일 문제의 원점이었다.

역사박물관에는 신성로마제국 이래 독일제국의 영토 변천사가 지도로 나열되어 있었다. 유럽 중앙부에 위치한 독일의 지도가 한번 바뀔 때마다 주변국은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1871년 소독일주의를 내세운 프로이센이 대독일주의를 내세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통일을 이뤘다. 독일인에게는 독일 문제의 종결이었지만 유럽 국가들에게는 독일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 결과는 1, 2차 세계대전이었다. 독일 문제는 ‘강한 독일의 등장으로 인한 유럽의 분란’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주변 열강의 해법 역시 똑같은 형태로 반복되어왔다. 분할 점령과 분단으로 독일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법이다. 즉, ‘독일의 통일은 유럽의 평화와 양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독일 문제는 ‘발칸 문제’와 더불어 유럽의 양대 난제 중 하나로 인식되어왔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유럽이 내놓은 독일 문제의 해법은 바로 독일 분할이었다. 즉 분할과 분단으로 독일 민족의 힘을 빼놓지 않으면 언제 무슨 일이 또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EPA1989년 11월10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 동·서독 주민들이 장벽 위에 올라가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독일 지성들 중에서도 민족국가 형태의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귄터 그라스가 대표 인물이다. 그는 “민족국가 형태의 독일 통일은 전후 반세기 유럽의 평화를 유지해온 세력균형을 파괴할 것이다. 새로운 독일은 과거의 군사력으로 불가능했던 유럽 지배를 경제력으로 달성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라스가 제시한 해법은 동독과 서독이 ‘유럽이라는 하나의 집에 동거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럽화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었다(<한겨레> 2015년 7월26일).

1990년대 통일 당시만 해도 귄터 그라스를 비롯한 좌파 지식인들은 ‘반통일주의자’로 몰매를 맞았다. 새로운 통일 독일은 ‘서방과의 일체화’ ‘폴란드와의 국경선인 오데르나이세강 동쪽 영토 포기’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의 병행을 통한 독일의 유럽화’ 등으로 주변 국가의 동의를 받을 수 있었다. 독일 문제가 극복된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역사학자 빈클러는 “독일 통일을 통해서 비로소 독일 문제와 작별하게 되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을 유럽에 붙들어두기 위해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밀어붙였던 ‘유로존 계획’이 역설적으로 귄터 그라스의 예언을 현실화하고 말았다. 통일과 함께 불어닥친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독일의 거대 자본들은 임금수준이 비슷한 동독을 외면하고 동유럽으로 달려갔다. 여기서 여러 문제가 파생되었다. 동유럽이 독일 자본에 저임금 숙련노동자를 공급하는 지역으로 전락하면서 독일 제조업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이와 함께 독일의 투자를 받은 동유럽 국가들이 EU에서 독일 쪽으로 기운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그만큼 독
ⓒ시사IN 남문희게지네 올트만 평화혁명재단 이사(아래)는 1989년 동독 지역에서 평화적인 대중 시위를 이끌었다.
일의 발언권이 강력해졌다. 그 결과, 2010년 터진 ‘그리스 사태’는 경제력으로 무장한 독일의 ‘지리·경제학적 패권’을 유럽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의 현실을 무시하고 국제통화기금(IMF)식의 긴축 재정을 밀어붙였다. 메르켈 총리의 코밑에 히틀러식 콧수염을 그린 신문 만평이 넘쳐났다. ‘히틀러 메르켈’의 등장이야말로 모드로 전 총리가 언급한 ‘새로운 독일 문제’의 출현이다.

서독 자본이 통일 후 동독을 건너뛰고 임금이 더 낮은 동유럽으로 쏠린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바로 통일 독일의 식구로 편입된 동독 주민의 소외다. 라이프치히(1989년 평화혁명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다)에서 만난 게지네 올트만 평화혁명재단 이사는 당시 대중 시위의 중심부였던 니콜라이 교회를 배경으로 평화 시위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1983년 유럽 전역에서 미국과 소련의 중거리 핵전력 배치 문제로 반핵평화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자, 평화운동에 눈을 떴다. 당시 18세였던 그는 라이프치히로 옮겨 니콜라이 교회 청소년부에서 활동하며 운동의 불씨를 키워갔다. 동독 정권과 동독의 복음주의 교회 간에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나름의 신사협정이 체결돼 있었다. 반체제 운동을 준비하던 그룹들에게 교회는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1985년 소련에 고르바초프 정권이 등장한 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던 운동가들은 1989년 초부터 본격적인 대중 시위에 불을 붙였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더불어 통일의 도화선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동독인들, ‘마음의 분단’은 더 깊어져

시위대는 당초 자신들을 ‘라우디(정신 나간 범죄자들)’로 몰아붙인 동독 정권에 맞서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 구호는 ‘우리는 하나의 인민이다(Wir sind eine Volk)’로 변경된다. 시위대의 열망이 ‘자유’에서 ‘서독과의 즉각적 통일’로 바뀐 것이다. 당시의 동독 대중이 원한 것은 서독인과 같은 경제적 풍요였다. 서독 텔레비전 시청을 통해 과대 포장된 서독 사회 이미지가 동독 인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있다. 동독 시위대는, 모드로 총리나 동독의 평화운동가들이 바랐던 동독 사회주의의 개혁, 귄터 그라스나 하버마스, 브란트, 에곤 바르 같은 서독의 지성과 사민주의자들이 두려워했던 ‘독일 문제의 귀환’ 같은 의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동독 시위대의 이런 성향은 장기적으로 자충수로 작용했다. 동독 체제를 이끌거나 평화혁명을 주도한 지도자 30~40명 중 대다수가 통일 이후 역할을 상실했다. 동독의 정치·경제·군사·언론 등 모든 부문이 서독에 장악됐다. 정치·행정 쪽 고위층도 대부분 서독 출신이다. 동독 시민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상실한 대중으로 전락했다. 동독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거의 이력은 물론 기존 사회주의 특유의 교육·의료·주택 제도들이 모두 폐기되었다. 더욱이 서독의 대기업은 임금수준이 싼 동유럽으로 쏠렸다. 동독으로 진출하는 서독 자본은 주로 중소기업이었다. 젊은이들과 여성들이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나면서 동독 지역엔 나이 든 사람만 남았다. 물론 동독의 생활수준은 다른 동유럽 국가보다 높은 편이다. 그러나 동독인들이 바라보는 것은 동유럽이 아니라 서독이다. 생산성의 격차로 동독이 서독 수준을 따라잡는 것은 요원하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속의 분단은 오히려 더욱 깊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5년 메르켈 총리가 중동 난민 100만명을 받아들여 각 연방주에 할당하는 과정에서 동독 지역에도 난민들이 밀려왔다. 서독과 달리 외국인과의 공존을 학습하지 못한 동독 지역의 문화적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동독 시절 ‘붉은 작센’으로 불렸던 작센주가 극우 세력인 AfD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현재 AfD는 작센주에서 자유당 다음의 지지를 받고 있다. 올해 9월 작센주 선거에서는 다수당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독일 국가의 정체성이 당장 극우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지금까지는 지배적이다. 독일의 독특한 의원내각제 제도에서는 제3당이나 제4당이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된다. 분단 시절엔 제3, 제4당이었던 녹색당이 연립내각의 일원이 되어 분단 독일의 정체성을 좌우하는 풍향계 구실을 할 수 있었다. 녹색당이 대변한 독일의 정체성은 ‘국제사회와 대화할 수 있는 평화 지향 국가’라는 이미지였다. 과거 녹색당의 위치를 AfD가 차지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AfD는 2017년 9월 연방하원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켜 일약 제3당으로 의회 진출에 성공했다. 당시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민·기사당 연합은 전체 709석 중 33%(246석), 그다음이 사회민주당(사민당)으로 21%(153석), AfD가 13%(94석)를 얻었다.

현재 독일 연립여당은 기민·기사당 연합에 사민당까지 합류해 있으므로, AfD는 사실상의 제1 야당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메르켈 총리는 AfD를 국정 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기민당 내에서 이미 AfD와의 연정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럴 경우 반무슬림·반이민·신나치를 공공연히 표방하는 AfD가 드러낼 독일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더욱이 그 독일은 어제의 독일이 아니다. 유럽을 경제적으로 석권한 강력한 독일이다.

유로존 사태 이후 메르켈 총리는 ‘독일은 강한 유럽을 생각한다’라고 말해왔다. 유럽 사람들은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강한 독일과 강한 유럽은 병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메르켈 총리의 이야기 속에서 유럽인들이 떠올린 것은 유럽의 미래가 아니라 독일의 과거였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평화저널리즘 교육과정’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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