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봉책 되어가는 성폭력 예방교육
  •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 호수 616
  • 승인 2019.07.10 11:0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폭력의 가장 근본적 대책을 생각하다 보면 교육에 이르게 된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는 게 낫다는 얘기다. 그래서 기관별로 한 해에 한 번씩은 시행하게 되어 있는 교육의 이름은 ‘성희롱 성폭력 예방교육’이다. 미투 운동 이후 각 분야의 피해자 연대는 해당 분야에 성폭력 예방교육을 철저히 실시할 것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미심쩍다. 성폭력이 ‘성’의 문제라기보다는 ‘폭력’의 문제라고 할 때, 어떤 것이든 피해와 가해를 둘러싼 권력 구도 전반을,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문화 전반을 제대로 뜯어보지 않는 교육이 대책이 될 수 있을까?

연간 한두 시간 교육으로 충분한 토의 불가능

ⓒ정켈

여러 번 관련 교육을 수강하고, 교안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면서 느낀 문제점은 이렇다. 먼저, 피해자·가해자의 사례에서 성별을 반반으로 제시하려는 기계적인 노력이다. ‘권력 구도의 우위에서 상대의 의사를 제대로 읽지 않고 자신의 욕망대로 상대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원론이 왜 곧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비율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바뀔까? 이런 교육은 구조를 은폐하고 양성이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서로 조심하자는 다짐으로 끝난다.

다음으로는 성폭력 기준을 피해자가 느끼는 ‘성적 수치심’으로 두는 설명 방식이다. 이 설명 틀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는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이 되고, 피해자는 ‘예스 또는 노’로 그때그때 의사를 잘 밝혀야만 하는 사람이 된다. 문제는 이 수치심이라는 감각이 매우 주관적인 듯해, 강사들은 대개 “상대가 기분 나쁘다고 말하면 하지 말 것”을 기준으로 제시한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꼭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예쁘다’는 말은 칭찬 아닌가요? 그런데 상대가 기분 나쁘다고 하면 어떡하죠?”

마지막으로, 연간 한두 시간의 교육으로는 이런 설왕설래에 대해 사실상 충분한 토의가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있다. 언쟁이 소모적이라고 느끼는 일부 강사는 성폭력이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라는 레토릭에 기대어 성폭력의 심각성을 설명하게 된다. 이런 시도는 피해를 고통으로 치환하고, 이 고통을 설명 불가능한 영역에 놓아버리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런 교육은 조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성별을 기반으로 한 분리주의 문화, ‘펜스 룰’ 같은 것만 강화할 뿐이다.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가 ‘예민해서’ 가해자와 조직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분란을 일으켰다는 식의 논리를 구축하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피해자의 편에 선 사람들은 피해자를 방어하기 위해 그가 당한 고통을 유일하고 강력한 피해 증명의 수단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교착상태에 빠지면, 거기서부터는 누가 개입해도 사건을 해결하기 어렵다. 결국 사법기관의 일방적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어쩌면 지금의 교육은, 사실상 문제를 근본부터 파헤쳐서 바로잡으려면 너무 많은 것을 바꾸어야 하기에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미봉책이 되어가고 있다는 의심이 들 때가 있다. 한국의 구조를 살펴보자. 나이를 중심으로 존비를 나누는 언어 체계. 입학연도, 입사연도, 직위·직급을 따지는 서열 문화. 학력, 학벌, 출신 지역, 거주지, 거주 형태, 부모의 직업을 따지며 그에 따라 상대와 나의 위치를 재는 습관이 든 사람들. 농림어업 규모에 맞먹는 성(性)산업 규모. 여성을 거래하며 각종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는 뿌리 깊은 관행. 차별금지법 제정 하나에 합의하는 일조차 쉽지 않은 나라. 이 모든 문제가 한 해에 한 차례 이런 식의 교육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성폭력은 구조의 문제”라는 말에는 이 모든 맥락이 들어 있고, 이제는 외면할 수 없다.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