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속사회〉를 내고 나서 사람들은 종종 나를 ‘곁의 인문학자·사회학자’라고 소개한다. 상찬 같아서 감사하지만 그 자리에서 늘 우려를 전하곤 했다. 곁은 곁일 뿐 사회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곁으로 사회의 문제를 대체하거나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시도를 위험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인스빌 이야기〉는 공장이 문을 닫고 난 다음 지역사회가 서로의 곁을 지키고 만들며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제인스빌은 자동차 기업 제너럴모터스(GM)의 미국 최대 공장이 있던 곳이다. 금융위기 이후에 GM은 미국 내 많은 공장의 문을 닫았다. 제인스빌도 그중 하나였다. 삶의 기반이 사라진 이후 그 여파를 지역 사람들이 어떻게 겪고 있는지,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그 노력은 어떻게 또 서서히 부식되어 가는지 치밀하면서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제인스빌 이야기〉는 한 번에 정리하고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여러 번 다른 각도에서 다양한 이론의 지원을 받으며 다층적으로 읽어야 한다. 친밀한 공간이 구조조정 이후 어떻게 변하는지에서부터 지역 정치와 중앙 정치, 지구적 자본과 정치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층적으로 읽어야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이우일


먼저 교육의 의미를 짚어보자. 공장이 사라지고 난 다음 국가가 가장 많이 도입하는 정책 중 하나가 ‘직업 재교육 프로그램’이다. 대학이나 전문대, 혹은 다른 교육기관이 그 틈을 파고 들어간다. 교육은 넘쳐나는데 구직자들의 취업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교육을 받고 난 다음 임금 상승 효과도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중앙정부와 지역정부 모두 ‘뭐라도 해야 하는’ 처지인지라 가장 생색내기 좋은 분야인 교육에 열을 올린다. 한국에도 넘쳐나는 직업 재교육, 창업 교육 등을 생각해보면 저성장·고실업 사회에서 교육의 의미를 재개념화할 필요를 느낀다.

책이 다루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이 글에서는 내가 곁이라고 부르는 공동체와 사회의 관계에 집중하고 싶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회를 구름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멀리서 보면 형체가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면 그 경계는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자칫하면 구름처럼 흩어지기 쉬운 게 사회다.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사회가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바우만은 코뮤니타스, 즉 공동체라고 부른다. 그는 코뮤니타스(공동체)가 양복의 안감과 같은 구실을 해 소시에타스(사회)의 형체를 유지시킨다고 말한다.

제인스빌에는 많은 코뮤니타스가 있다. 노조가 근간을 이루고 있고, 지역 방송국과 신문사가 있다. 여러 자선단체가 있고, 학교와 같은 교육기관도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모이고 교류하고 관계를 맺고 결속한다. 또한 코뮤니타스는 실업이나 가족 해체와 같은 사고를 당했을 때 개인적 불운으로 치부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서로를 구조하는 안전망 구실을 한다. 금융위기 이후, 제인스빌의 많은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자 전통적인 코뮤니타스들이 작동했다. 대표적으로 한 교사가 시작한 학교의 ‘벽장 프로젝트(파커의 벽장)’가 있다. 지역사회에서 생필품을 기부받아 벽장 안에 두면 삶의 위기를 겪는 학생들이 아무도 모르게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존재감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전통적 코뮤니타스가 붕괴하는 이유

제인스빌에는 새로운 코뮤니타스도 만들어진다. 코뮤니타스라기보다 네트워크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할 수 있다. 정파와 계층, 계급을 가리지 않고 제인스빌 자체를 살려보겠다고 모인 시민들의 자발적인 도시재생·재건 네트워크다. 예를 들면 ‘록 카운티 5.0’이라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 도시를 살리기 위해 뭐든 해보려는 정치인에서부터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개인들이 모여 의기투합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네트워크는 ‘경계’를 넘기가 쉽지 않다. 누구는 공장을 다시 살리고 싶어 한다. 또 다른 누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다른 기업을 유치하자고 한다. 이를 위해서 누가 무엇을 희생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르다.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경계를 넘어 만나지만 이들 사이에 그어진 전통적인 경계는 그리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주도권은 대체로 ‘혁신’을 주장하는 사람들 손에 넘어간다.

제인스빌도 다르지 않다. ‘혁신’이나 ‘신산업’을 내건 자본이 유혹하고 협박한다. 자기들에게 숱한 혜택을 주면 도시를 다시 살릴 수 있다며 청사진을 내보인다. 동시에 그 혜택이 충분하지 않으면 다른 도시로 떠나겠다고 협박한다. 그들이 약속하는 일자리와 미래는 모호하다. 도시가 그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혜택은 엄청난 규모다. 그 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도시의 다른 재정이 삭감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교육이나 의료 복지와 같은 재정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현금 주고 어음 받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코뮤니타스는 서서히 붕괴해간다. 자선단체 자금이나 활동도 점점 고갈된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제인스빌의 전통적인 의례 행위였던 노동절 행진이 상징적이다. 언제나 노조와 노동자들이 중심이었던 노동절 행사에 노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공장이 없는데 노동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신 홈리스 아이들이 행진한다. 문제는 이들의 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채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코뮤니타스는 소시에타스를 유지하는 안감이다. 코뮤니타스가 활성화된다고 해서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제인스빌 이야기〉는 냉정하게 알려주고 있다. 전통적인 코뮤니타스가 탄탄하게 조직되어 활동하고 새로운 네트워크와 코뮤니타스들이 만들어져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전통적 코뮤니타스는 부식되고, 새로운 코뮤니타스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들러리가 되고 농락당하기기 쉽다.

왜 그럴까. 이 역시 바우만의 이야기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바우만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가장 큰 특징을 권력과 정치가 ‘이혼’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권력을 가진 자본은 비(非)장소성을 향유하며 자유롭게 떠돌아다닌다. 반면 여전히 장소에 얽매여 있는 권력은 자본을 통제하지 못한다. 통제는커녕 애걸해야 할 판이다. 그 결과 정치에 아무리 참여하더라도 삶의 근본이 흔들리는 것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 사람들은 점점 더 무력해져간다. 저 수많은 코뮤니타스가 노력하는데도 말이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에는 지역마다 코뮤니타스가 있는가? 울산 동구에는 코뮤니타스가 몇 개 있을까? 그 코뮤니타스들은 어떻게 얽혀 있고 어떤 일을 할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어떻게 부식되고 있는가? 우리는 이런 것을 알고 있는가? 알고자 하는가? 혹 하룻밤 이야기를 듣고 돌아와서 적당히 아는 이야기로 지어내는 식의 취재와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닌가? 글을 통해 사람의 삶을 다루는 자를 매우 부끄럽게 만드는 책이다.

기자명 엄기호 (문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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