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6월이면 경기도 일산에 사는 전술손씨(73)는 마산 앞바다로 향한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희생된 아버지 전호극 소령을 기리기 위해서다.

전호극은 1946년 2월 입대해 1948년 진해 해군통신학교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전호극은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께 진해 해군통신학교장 관사에서 가족이 보는 가운데 특무대에 붙잡혀 갔다. 이른바 ‘해상의용군 사건’으로 조사를 받은 그는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마산형무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1950년 7월 그는 군 헌병대에 끌려가 학살당했다. 군 특무대(CIC)에 체포돼 저마다 이런저런 군내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이 수감된 이들을 집단 학살한 것이다. 학살당하기 두 달 전 면회를 온 아내에게 “곧 풀려날 테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켜 돌려보낸 것이 가족과 마지막 만남이었다.

전술손씨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의 배경에 대해 자주 들었다. 전호극은 광복 전부터 김구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1946년 가을에는 김구 선생이 진해 해군기지에 내려와 이상규 소령(‘해상인민군 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당함) 등 전호극의 동료 해군 장교단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초기 이른바 ‘숙군’ 과정에서 전호극, 이상규 소령처럼 희생된 군 장교들은 백범 김구 선생을 따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사IN 조남진아버지 전호극 소령을 ‘빨갱이’로 알고 살아온 전술손씨는
아버지의 억울한 삶을 확인한 뒤 사진을 다시 붙여 고이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김구 선생을 암살하기 위해 네 아버지가 억울하게 당했다. 암살 전에 먼저 군내에서 백범을 따르던 장교들을 찾아내 숙군이라는 말로 체포했다’라며 원통해했다. 아버지가 끌려간 뒤 김구 선생이 석 달 동안 우리 모녀의 생활비를 보내줬다. 그러다 1949년 6월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하신 뒤 지원이 끊겼다.”

전호극은 1913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해군 병적기록에 따르면, 1934년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43년 도쿄 통신전문학교 무선과를 졸업했다. 일본에서 경남 창녕 출신인 조소순을 만나 결혼했다. 당시 전호극은 도쿄 중앙전신국 외체과에 근무하며 지하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 한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전호극·조소순 부부는 귀국선을 탔다.

전호극은 영어와 일어에 능통했다. 고향에 도착한 전호극은 영어책 여러 권과 사전을 소지했다. 이로 인해 ‘미제 간첩’으로 의심받아 북한 당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풀려난 전호극은 아내를 남겨둔 채 단신으로 월남했다. 서울에 도착한 전호극은 경성중앙통신 무선과에 취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조선해양경비대 입대를 결심했다. “나중에 내려온 어머니가 ‘좋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왜 해군에 입대했느냐’고 아버지께 물었더니 ‘김구 선생이 권유해서’라고 하셨다더라.” 전호극은 해군 창설 작업을 위해 손원일(초대 해군참모총장) 등 해군 창설 멤버 70여 명에 포함돼 진해로 내려갔다.

전호극 소령의 반란행위 입증된 바 없어

전호극은 1946년 2월 조선해양경비대에 입대했다. 이어 진해 통신분대 분대사와 해군병학교 교관을 거쳐 진해 통신분대장과 고등갑판교육사관을 역임했다. 1948년 8월15일 소령으로 진급한 전호극은 해군통신학교 설립의 중추적 인물이었다.

전호극이 월남한 뒤 함경남도 북청에 남은 부인은 딸을 낳았다. 갈수록 정세가 엄혹해지자 전호극의 부친은 1946년 말 둘째 아들 전호철을 시켜 며느리와 손녀를 형에게 데려다주도록 했다. 1947년 1월 가족과 진해에서 상봉한 전호극은 이후 2년 정도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1948년 11월 전호극은 소령 진급 3개월여 만에 체포됐다. 병조장 이항표가 주도한 ‘해상의용군이라는 반란 단체에 동조했다’는 혐의였다. “여순 사건(1948년 10월)이 일어난 직후였다. 어머니는 그날부터 아버지를 찾으러 다녔지만 소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1년 반이 지나서야 마산형무소에 수감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겨우 면회를 했다.” 전 소령은 1949년 5월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강제 예편되었다. 민간인 신분으로 마산형무소에 수감된 것이다.

곧 돌아오리라던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수소문 끝에 ‘아버지가 마산 인근 괭이바다에서 집단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체를 못 찾았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전쟁 통에 숨어 살거나 고향인 이북으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60년을 살았다. 이승만부터 박정희 정부 때까지는 정보 경찰이 내 일터인 병원(간호조무사)에 찾아오는 등 연좌제가 이어졌다.”

아버지가 사라진 뒤 모녀의 삶은 피폐해졌다. 아버지가 실종된 뒤 숙부 전호철의 양녀로 입적한 전술손은 회갑 때까지는 아버지에 대해 숨기고 살았다. 연좌제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2005년경 큰이모가 찾아와 ‘네 아버지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이제 나만 남았다’라고 하셨다. 진해 해군통신학교 관사에서 함께 지냈던 큰이모는 ‘아버지가 한국 해군 창설의 주역이고 김구 선생 지지자였다’며 자식 된 도리로 아버지의 공적을 조사하라고 타일렀다. 귀가 번쩍 뜨였다.”

ⓒ시사IN 조남진전술손씨(위)는 이승만 정권이 백범 암살 전에
전호극 소령 등 백범 지지파를 ‘숙군’했다고 말했다.

전씨는 어릴 적 어머니의 넋두리로만 듣고 넘겼던 아버지의 행적을 찾기 위해 해군본부를 찾았다. 병적 기록부터 조회했다. “해군본부 관계자가 첫마디로 ‘전호극 소령님인데, 참 억울하게 당하셨네요’라고 하더라. 이유를 물었더니 ‘전 소령님이 당시에 통신학교 교장이었는데 학생 몇 명이 여순반란 사건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 책임자로서 옷을 벗었습니다. 저는 여기까지밖에 말 못합니다’라고 했다.”

전술손씨의 채근에 해군본부 관계자는 전화번호를 하나 주었다. 해군사관학교 역사자료실이었다. 그곳에서 확인한 전호극 소령의 군번은 80058번이었다. “해군사관학교 역사자료실에 문의했더니 아버지가 해군통신학교 설립을 주도한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인데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며 ‘후손이 왜 이제야 나타났느냐’고 안타깝다고 했다.” 전술손씨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아버지 사건 관련 판결문을 입수했다. 50여 년 만에 확보한 판결문 등 관련 자료는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로 넘어갔다.

진화위 조사 결과, 당시 전호극 소령과 함께 해상의용군 사건으로 체포된 해군 장교는 37명이었다. 37명의 혐의는 ‘조선경비법 제21조 위반’이었다. 탈옥 등에 대한 규정이다. 하지만 판결문에는 피고인의 범죄 사실이 육하원칙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두 문장만 반복됐다. “1946년 11월 중순경부터 1948년 8월 중순경에 걸쳐 정당한 군권을 파괴할 목적으로 부정단체인 해상의용군을 계획, 조직해 폭동 반란을 기행하였음” “해안경비대 내에서 정당한 군권을 파괴할 목적으로 결당 및 폭동의 정세를 사전에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상관에게 신속히 보고하지 않았음.”

판결문에는 언제 어디서 반란단체를 조직했는지, 폭동과 반란을 언제 어디서 모의했는지가 나와 있지 않았다. 과정은 생략된 채 폭동과 반란을 계획했다는 결론만 나와 있었다. 판결문에는 이들이 저지른 반란행위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주장이나 입증 자료가 하나도 적시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범죄 사실이 적혀 있지 않은 판결문이었다. 당시 해군 장교 37명은 자신들은 무죄라고 항변했다. 2명을 제외하고 전원 2~10년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무죄를 받은 이들까지 포함해 37명 전원이 헌병대에 학살당했다.

전국적으로 자행된 ‘재소자 불법 학살’

진화위 조사 결과, 마산형무소에서는 진해해군헌병대와 마산육군헌병대에 의해 1950년 7월5일과 21~24일, 8월24일, 9월21일 네 차례에 걸쳐 재소자 296명이 학살당했다. 1차 학살인 7월5일 마산 괭이바다에서 희생된 이들은 모두 해군 장교나 문관 출신이었다. 이들은 모두 마산형무소 재소자 인명부에서도 확인됐다. 전호극 소령은 이날 학살된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진화위는 또 다른 조작 의혹이 있는 ‘해상인민군’ 사건으로 구속된 동료 이상규 소령과 같은 시기에 전호극 소령이 총살당했다고 결론지었다.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을 지지했던 전호극과 이상규는 나란히 조작 의혹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뒤 한국전쟁 개전과 함께 처형당했다.

형무소 재소자에 대한 불법 학살은 전국적으로 자행됐다. 6·25 전쟁 발발 사흘 만인 6월28일부터 7월16일까지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다. 충남 육군 특무대와 제2사단 헌병대는 대전형무소에 수용된 4·3 사건 관련자와 보도연맹원 등 미결수 6000여 명을 야산 구덩이에 몰아넣고 죽였다. 같은 날 전주형무소에서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과 여순 사건 관련자 등 수천명이 집단 학살당했다. 국방부의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숙청당한 국군은 장교 242명, 사병 4133명으로 모두 4375명이다. 실제는 8000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국방부 통계는 신원이 확인되는 최소치일 가능성이 높다.

사건 당시 다섯 살이었던 전술손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한동안 연좌제가 두려워 아버지를 애써 외면하기도 했다. 전씨는 망각과 통곡의 세월을 딛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기 위해 뛰어다녔다. 2006년부터 해군본부와 해군사관학교·국가인권위·진화위 등을 찾아다녔고, 결국 ‘국가권력에 의해 적법 절차 없이 살해된 억울한 사건’이라는 진화위의 진상 규명 결론을 끌어냈다.

이를 토대로 전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13년 대법원은 전호극 소령이 국가의 불법행위로 학살당했다며 1억2800만원 배상 결정을 내렸다. 이 판결로 전호극을 비롯한 수많은 백범 지지 군 장교를 불법 처형한 이승만 정부의 실상이 일부 드러났다. 하지만 당초 전호극 소령에게 씌워졌던 해상의용군 사건 진상이 제대로 밝혀진 것은 아니다. 기자와 만난 전술손씨는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진실 규명은 이제 시작이다. 내가 죽으면 자손들에게 유언을 남겨서라도 조작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9년이 지났다. 전호극 소령 등이 억울하게 숨진 지도 69년이 되었다. 전씨는 이제라도 해군이나 정부가 진상을 밝혀주기를 바란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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