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방문 노동자가 날마다 겪는 일
  • 박수현 (다큐멘터리 감독)
  • 호수 615
  • 승인 2019.07.05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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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이 소란스러워 잠에서 깼다. 옆집에 누가 온 모양이었다. 잠결에 들리는 말들로 짐작하건대 이웃이 맡긴 매물의 재개발 건을 이야기하러 부동산에서 나온 듯했다. ‘서명을 해주셔야 하는데 자꾸 전화를 안 받으셔서 직접 찾아왔다’고 설명하는 직원의 말을 옆집 남자가 한사코 들으려 하지 않아 승강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직원이 성실하게 설명을 반복하는데도 남자는 자꾸 “왜 왔냐”라고만 묻다가 끝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여자가 왜 혼자 왔어! 내가 무슨 짓 하면 어떡할 거야!” 순간 정적이 흘렀지만 벽 건너의 여성은 곧바로 웃으며 일로 화제를 돌렸다.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찾았다. 112를 입력한 핸드폰을 쥐고 사람이 나가는 발소리가 들릴 때까지 숨죽여 문 앞에 서 있었다.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난 5월17일 경동도시가스 서비스센터에서 근무하던 여성 점검원이 성추행을 당한 뒤 자살을 기도했다. 한 원룸에서 가스 안전 점검을 마치고 나가려고 하자 거주 남성이 “진짜로 점검만 하러 왔느냐”라며 1시간여 동안 감금하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가까스로 탈출한 피해자에게 경찰은 “몸에 터치도 없고 추행이 없었으니 조사하기가 애매하다”라고 답했다. 회사는 일주일간 휴무를 주고 성교육을 실시한 뒤 곧바로 업무에 투입했다고 한다.

ⓒ정켈

2015년 유사한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회사는 ‘고객이 신체적 접촉을 시도할 경우 신속히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함을 알리고 자리를 떠난다’ ‘음담패설을 할 경우 당황하지 말고 못 들은 척 담담하게 업무적으로 말을 돌린다’ 따위 매뉴얼과 함께 호루라기를 지급했을 뿐이다. 그것으로는 팬티 바람으로 문을 여는 남성, 속옷을 벗고 자위하는 남성, ‘남자 혼자 있는데 자신 있느냐’고 묻는 남성을 막을 수 없었다.

방문 노동자에 대해 “고객의 집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혼자 수행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성희롱과 추행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라고 말할 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러한 업무 특성이 성희롱과 추행의 위험으로 연결되려면 성별이라는 요소가 추가되어야 한다. 만연한 성폭력은 방문 노동자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방문 노동자의 문제다.

경동도시가스는 2인 1조로 근무하게 해달라는 점검원들의 요구에 남자 점검원을 추가 채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여성 점검원은 2인 1조로 업무를 하더라도 성범죄를 완전히 막을 수 없지만, 남성 점검원이 업무를 한다면 성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여성 방문 노동자들이 겪는 일이 ‘성별화된 폭력’이라는 사실을 이만큼 명확하게 드러내는 대책도 없을 것이다.

방문 노동자에게 고객의 집은 일터이자 공적 공간

도시가스 안전 점검원, 수도 검침원, 재가 요양보호사, 공기청정기·정수기 점검원 등 여성 방문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고용 불안정과 성차별, 저임금을 넘어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성폭력의 위협에 일상적으로 맞닿아 있다. 그 저변에는 여성을 남성의 지배 대상으로 바라보는 뿌리 깊은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강간 문화가 자리한다. 방문 노동자에게 고객의 집은 일터이자 공적 공간이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의 눈에 여성은 노동자로도 사람으로도 존중받지 못하고 오직 여성으로 존재할 뿐이다.

결국 변해야 하는 쪽은 가해의 축이다. 개별 폭력들은 한국 사회의 기본 값인 남성중심주의, 강간 문화와 연결될 때 온전한 파악이 가능하다. 수없이 반복되는 여성 방문 노동자들의 문제는 고통받는 여성들이 견디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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