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무색했다. 11년의 세월을 건너왔지만 변한 건 없었다. 지난 1월8일 뉴스를 보면서 참담함에 가슴을 쳤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가 조재범 전 코치에게 상습적 폭행 및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스포츠계 미투 이후 정부는 1월25일 ‘(성)폭력 등 체육계 비리 근절 대책’을 내놓았다. 그에 따라 2월11일부터 활동을 시작한 ‘스포츠혁신위원회(이하 혁신위)’에서 위원들의 추천으로 문경란 위원장이 선출됐다. “우리가 11년 전에 이미 알았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저 선수가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는구나. 정말 미안했다.”

문 위원장은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상임위원 시절 스포츠 인권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당시 인권위는 중·고등학생 선수를 대상으로 전국적 규모의 실태조사를 하고, 학생·학부모·지도자를 대상으로 전국을 돌며 교육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아래 인권위의 위상이 급격히 쪼그라들면서 실효성 있는 대책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2019년 5월 혁신위는 스포츠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고 인권침해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혁신하라고 1차 권고한 데 이어, 6월4일 2차 권고안을 발표했다. 학생 선수의 학습권 보장, 체육특기자 제도 개편, 전국스포츠대회(소년체전) 개편 등이 담긴 ‘학교 스포츠 정상화를 위한 선수육성 시스템 혁신 및 일반학생의 스포츠 참여 활성화 권고’에는 문 위원장이 11년 동안 키워온 고민이 녹아 있다. 혁신위 발족 이후 각종 인터뷰를 고사해왔던 문 위원장을 6월11일 만났다.

ⓒ윤성희문경란 스포츠혁신위원장(위)은 “학생이 수업을 듣고 난 뒤 운동하는 건 당연하다”라고 말한다.
주중 대회 참가 금지 등 ‘학교 스포츠 정상화’와 관련한 여러 조치를 권고했다.엘리트 선수 중심의 학원 스포츠에서는 학생이 운동에 발을 들여놓으면 공부에서 멀어지고 운동에 집중하게 된다. 체육특기자 제도, 학교 운동부, 소년체전으로 엘리트 시스템이 꽉 짜여서 빠져나갈 틈이 없다. 학생선수가 되면 공부를 하기 어렵도록 국가의 제도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공고한 체계를 바꿔야만 인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여기에 맞춰서 권고안도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유기적으로 만들었다. 운동선수라 할지라도 선수 이전에 학생이니 최소한 정규수업은 들어야하는데 그러려면 평일에 대회가 열려서는 곤란하지 않겠나. 지금 학생 선수들이 출전하는 전국 단위 대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수영·사격 같은 종목은 연 20회가 넘는다. 3월 중순부터 대회가 열려서 한 번에 3일 이상씩 빠지는데 학생들이 어떻게 수업을 따라가겠나. 그래서 대회를 주말에 개최하도록 했다. 연말까지 종목별 대회 개최 계획을 수립하는데, 특성상 즉각적으로 바꾸기 어려운 경우에는 2년의 유예기간을 두도록 했다.  체육계의 기존 대책과 비교해 혁신위의 권고안이 크게 새롭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정확히 봤다. 그간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교육부에서 나왔던 대책들과 우리 권고안의 조항이 비슷하다. 2008년 인권위에서 스포츠 인권 관련 포럼을 하면서도 이미 나왔던 내용이다. 차이점은 두 가지다. 2013년에 제정된 학교체육진흥법을 예로 들면 법에 ‘최저학력에 도달하지 못하는 학생은 대회 출전을 제한할 수 있다’라고 돼 있다. 학교 현장에서는 교장 선생님 재량에 따라 많이 참가시킨다. 혁신위 권고안은 ‘최저학력에 도달하는 학생만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라고 했다. 현장에서 왜곡될 여지가 있는 예외 조항을 모두 정리했다. 두 번째로, 교육부는 정규 수업을 다 들으라고 하고, 문체부는 평일에 대회를 개최했다. 부처 간 엇박자가 났다. 그러면 이 조항이 어떻게 실효성을 가지겠나. 혁신위는 이렇게 파편적으로 조각나 있던 학원 스포츠 정책을 패키지로 맞추었다. 비슷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큰 차이다.

운동선수가 운동으로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면 되는데, 일괄적으로 공부를 시켜 학생들을 획일적으로 만든다는 비판도 있다.

기본적으로 학교 체육에서 스포츠는 메달을 따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교육 활동이 돼야 한다. 학생이 수업을 듣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학습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 권리로 선택 사항이 아니다. 학습권은 다른 권리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권리여서 ‘권리를 위한 권리’라고 부른다. 외국 전문가에게 그 나라에서는 운동과 학습을 어떻게 병행시키는지 물어봤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더라. 학생이 수업을 듣고 난 다음 운동을 하는 것이 당연한 거다.

운동에만 집중할 수 없게 되면 김연아 선수 같은 뛰어난 선수가 나오지 못할 거라는 우려도 있다.정부에서 정책을 마련할 때는 기량이 뛰어난 10%만 보고 만들면 안 된다. 전체 학생 선수를 대상으로 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그 안에서 뛰어난 선수들은 더 이끌어주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상위 10% 선수들을 버리라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중요한데, 지금 체계에서는 점점 뛰어난 선수도 나오기 어려워진다. 공부와는 벽을 쌓는다는 인식 때문에 자녀가 운동을 하고 싶어 해도 요즘은 학부모가 말린다. 그만큼 체육 인재 풀이 좁아지는 것이다.

권고안이 발표된 6월4일 대한체육회에서는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한다”라며 부정적 의견을 밝혔다.혁신위는 체육계가 아니라 정부에 권고를 한 것이다. 1차 권고문에서도 스포츠계의 인권침해가 수십 년간 구조적으로 되풀이되고 있음에도 관리 감독할 책무를 다하지 않은 국가에 반성과 혁신을 촉구했다. 혁신위는 (체육계가) 국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희생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생 선수들의 경우는 정말 그렇다.

특히 소년체전을 개편하라는 권고에 대해서 반발이 크다.

권고안은 소년체전을 학생 스포츠 축전으로 확대 개편해서 학교 운동부뿐만 아니라 청소년 스포츠클럽도 참여하도록 했다. 현재 전국체전에 출전하는 고등부를 학생 스포츠 축전에 참가하도록 하고, 초등부는 따로 떼어내서 전국이 아닌 권역별로 축제처럼 만들자는 것이다. 경쟁보다는 스포츠의 좋은 가치를 내면화하기를 바라는 뜻에서다. 우리 권고 가운데 ‘일반 학생들의 스포츠 참여 활성화 방안’이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엘리트 선수에 국한된 스포츠가 아니라 학생 전체, 국민 전체의 스포츠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포츠 포 올(Sports for All)’ 시대로 가야 한다고 하는 건가?

맞다. 체육계 일각에서 혁신위가 엘리트 (선수) 죽이기를 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엘리트 살리기다. 학생 선수들이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면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스포츠와 연계된 분야로 다양하게 진출할 수 있다. 체육정책을 엘리트 중심 스포츠에서 ‘스포츠 포 올’로 전환하면 스포츠인이 진출할 수 있는 거대한 영역이 생긴다.

현장에서는 체육 지도자의 열악한 처우가 현실적인 문제로 꼽힌다. 임금수준도 낮고, 경기 성적에 고용이 연동되니 강압적으로 장시간 훈련을 시키게 된다.학교 체육만 봐도 감독, 코치들이 계약을 맺는 주체가 다 다르다. 교육청, 종목 체육회, 학부모도 있다. 공공 스포츠클럽까지 포함하면 고용 주체가 더 다양해진다. 이번 권고안에도 지도자의 역할 재설정과 더불어 처우 개선을 언급했다. 감독·코치가 계약을 맺는 주체가 교육청, 체육회 등과 같이 다 다르고 복잡해 일률적인 대안을 제시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지도자의 고용불안을 개선할 수 있는 예산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은 명시했다.  

혁신위 권고안이 실제 학교 현장에서 이행되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혁신위 권고에는 강제성이 없다.

이행과 실행 단계는 교육부와 문체부가 맡게 된다. 대한체육회도 문체부 산하기관이니 포함된다. 혁신위에 교육부와 문체부 차관 등이 당연직 위원으로 참석하고 있어 이행력을 담보한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행력을 담보할 수 있다. 혁신위 2차 권고문이 36쪽 분량인데 그 뒤에 11쪽짜리 이행 계획을 담았다. 권고별로 관계 기관이 언제까지 어떤 준비를 할지 명시했다. 혁신위에서도 권고만 하고 끝나지 않는다. 활동 기간이 1년인데 하반기에는 이행 상황 모니터링에 집중할 계획이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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