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이사장이 ‘다스(das)’라 불린 까닭
  • 장일호 기자
  • 호수 614
  • 승인 2019.06.25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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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이사장은 일찌감치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정체화하고,
평등한 세상을 바랐다. 그는 자신의 꿈이 “너무 일찍 꾼 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덕에 세상이 이만큼 바뀌었다.
새로운 모임에서 자기소개 할 차례가 되면 ‘히히호호’ 크게 웃고 시작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름이 희호라서 그렇다”라고 말하면 모두가 그를 따라 웃었다. 모임을 짓누르던 낯선 공기도 한결 누긋해졌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하릴없던 청년들의 오락은 연극이 유일무이했다. 이희호는 판이 벌어지면 남성 역할을 주로 맡곤 했다. 중·고교 시절부터 으레 그래왔다. 이를테면 <이수일과 심순애>의 이수일 역을 그보다 잘하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집안 분위기가 남달랐던 덕이 컸다. 고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은 1922년 9월21일 ‘운 좋게’ 환영받으며 태어난 딸이었다. 위로 이미 오빠 셋이 있었던 덕분에 조부모도 여자아이를 반겼다. 남자아이만을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집안의 돌림자를 주던 시절이었다. 이희호는 드물게 돌림자를 받았다. 교육 기회도 공평하게 주어진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여자애’라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경험을 평생 한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틈만 나면 어린 이희호에게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사진공동취재단고인의 차남 김홍업 전 의원과 삼남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이 6월11일 빈소에 헌화하고 있다.

든든한 지원군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빠와 아버지의 ‘조금 다른’ 생각을 알게 됐다. 이화고보 시절 여름방학을 맞아 돌아온 집에서 큰오빠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우연히 읽게 됐다. “아버님, 계집애를 전문학교 공부를 시켜서 뭐 하시려고…”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독한 모멸감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계집애’라는 말을 곱씹으며 다짐했다. ‘오빠, 두고 보세요. 나는 유학도 갈 겁니다.’ 그 시절 드물게 깨인 남성이었던 아버지 역시 오빠와 비슷한 생각임을 알게 된 후 이희호는 입주 가정교사 등을 하며 제 손으로 학비와 유학비를 벌었다.

하지만 개인의 재능이나 다짐으로는 시대를 이길 수 없는 시간이 더 길었다. 이희호의 젊은 시절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연이은 전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학업은 중단되기 일쑤였다. 포기하지는 않았다. 인천에서 홀로 지내는 셋째 오빠의 아침밥을 해주며 살림을 도울 때도 틈만 나면 서울에 가 대학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에서는 남학생에게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가부장제와 남존여비 의식에 놀라는 날이 반복됐다. 이전까지 여학교만 다녔던 그에게 남녀공학 대학은 “여성들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우친” 장소였다. 그 과정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될 이태영 같은 평생 동지도 만났다.

두 살 연하 김대중과 결혼하며 달라진 삶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남자는 도둑질 말고는 뭐든지 해도 된다’처럼 무심코 쓰이는 말에 스며 있는 여성 비하를 연구해 책을 내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다. ‘그녀’라는 단어도 싫었다. ‘그남’이 없는데 ‘그녀’가 왜 필요하냐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본어 가노조(かのじょ)를 직역한 일제 문화의 잔재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대학 동기들은 독일어 중성 관사 ‘다스(das)’로 부르곤 했다.

자연스럽게 여성운동으로 기울었다. 1952년 이희호와 동료들은 오늘날 가정법률상담소의 모태가 된 ‘여성문제연구소’를 발족시켰다. 헌법은 남녀평등을 보장하지만 가족법을 규정하는 민법은 여성의 권리를 제약하고 있는 데 주목했다. 오랜 세월 지속된 가부장제의 불평등을 자각조차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매달 법률 강좌를 열고 무료 상담을 진행했다. YWCA 총무로 일할 때는 여성단체와 연합해 ‘축첩자는 국회에 보내지 맙시다’라는 캠페인을 펼쳤다. 공개적으로 첩을 둔 남성이 많을 때였다. ‘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 ‘첩 둔 남편 나라 망친다’ 등을 붓글씨로 써서 현수막을 만들어 들고 행진을 주도한 이도 이희호였다.

여성운동가는 일생 이희호의 이름 앞에 붙어 있던 수식어지만 중단된 꿈이기도 했다. 마흔 살이었던 1962년 두 살 연하의 김대중과 결혼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의 정치 행보에 따라 운동가로서의 삶도 출렁일 수밖에 없었다. 결혼을 축복한 지인은 드물었다. 여성 지도자로 대성할 재목을 잃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지배적이었다. 왜 그와 결혼하느냐는 질문에 “잘생겼잖아요”라고 대답하며 더 이상의 간섭을 무마했다. 물론 그게 이유의 다는 아니었다. 이희호는 김대중과의 동행을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방법 중 하나로 봤다. 가정 안팎에서 이희호는 아내의 자리와 역할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해석했다.

ⓒ연합뉴스2002년 5월 이희호 여사가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1967년 여성단체와 연합해 ‘요정 정치 반대운동’을 벌이면서 김대중과 각을 세운 일화는 대표적이다. 이 운동은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한 운동이기도 했다. “남자들은 요정 아니면 정치를 못하나요?”라고 따져 묻는 이희호에게 김대중은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피해갔다. 이희호가 “언젠가 남자들 큰코다칠 겁니다”라는 말로 받아쳤다.

1980년대 신군부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남편이 영어의 몸일 때 보낸 편지에 답장을 쓰면서도 적당히는 없었다. ‘사위는 쳐다보고 며느리는 내려다보라’는 말이 조상의 깊은 지혜를 담은 말이라는 내용을 담은 김대중의 편지에 이희호는 이렇게 답장했다. “상류층과 하류층 간의 혼인으로 교류를 한다는 점은 좋은 일로 생각되나, 여자를 하류층에서 데려와야 남편 쪽에 더 쩔쩔매고 맹종한다는 조상들의 생각은 여자를 천하게 다루는 데서 연유한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1982년 12월2일 편지).”

이희호는 선거 때면 연단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지원 유세를 하기도 했다. 후보 부인 중 최초였다. 이희호가 외치는 ‘독재 타도’ 역시 남달랐다. 현재의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유권자에게 구체적 미래를 그려줬다. “남편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서 만약에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김대중을 향한 청중의 열렬한 환호와 박수의 절반은 이희호의 것이기도 했다.

서로의 신앙을 존중하는 모습도 눈길을 끌었다. 부부는 평생 각자의 신앙생활을 했다. 식탁 앞에서 천주교인 김대중이 십자 성호를 긋는 동안 개신교인 감리교 모태신앙 이희호는 고개 숙여 기도했다. 한 표가 아쉬운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존중은 유지됐다. 선거대책본부가 전국의 절, 교회, 성당 모두를 섭렵하는 상대 후보 부인을 거론할 때도 김대중은 단 한 번도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희호는 그런 김대중의 정치 행보에 ‘가족의 이름으로’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화답했다. 독재정권의 표적이자 눈엣가시였던 김대중에게 타협하라거나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원하고 북돋았다. 나중에 김대중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이희호가 섭섭하기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이희호의 강단이 정치인 김대중을 단련시켰다. 이희호는 국내 신문은 물론 외신까지 샅샅이 읽어 스크랩했다. 김대중이 옥중에 있는 동안 600여 권이 넘는 책을 선별해 보낸 것도 이희호의 안목 없이는 불가능했다. 형집행법을 공부해 옥중의 남편이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도록 청원했다. 바뀌는 것은 없었지만 부단한 항의 그 자체를 민주화운동이라 여겼다.

스스로도 언제나 연행될 각오를 했다.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당당하게 잡혀갈 수 있도록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3·1 민주구국선언문’ 이후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도 결연한 태도로 심문에 임했다. “민주 회복을 위해 많은 사람, 특히 젊은이들이 이곳을 거쳐가는데 나도 동참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 54차례 연금이 반복될 때도 집을 ‘동교동 교도소’로 이름 짓고 자신을 소장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등 유머를 잃지 않았다.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았지만 여성 문제에 한해서는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 페미니스트 김대중은 이희호의 ‘작품’이었다. 김대중은 13대 국회에서 의원으로 일하며 이혼 배우자 재산 분할, 남녀 차별 없는 유산 상속 등을 골자로 한 가족법 개정안을 1989년 통과시켰다. 김대중은 국회의사당 안에서는 원래 박수를 칠 수 없지만 법안이 통과되면 평민당 의원만이라도 박수를 치자고 제안했다가 무안을 당하기도 했다. 여야를 떠나 남성 의원들은 가족법 개정에 내심 반대하고 있었다. “남자들 권리 다 빼앗겼는데 뭐가 좋다고 박수를 치느냐?”라는 면박은 김대중의 몫이었다.

1997년 4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해서도 부부는 남다른 행보를 이어갔다. 국민의정부는 수많은 ‘최초’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각하와 영부인이라는 호칭을 대통령과 여사로 바꿨다. 이희호는 “대통령 부인이기 이전에 ‘나 자신’”이라며 여사로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이전 정부를 통틀어 청와대 내 여성 비서관은 단 한 명이었지만, 국민의정부 5년 동안 10명으로 늘어났다. 여성 장관이 4명 배출되고, 육군 여성 장교가 처음 장군이 되었다. 첫 여성 총경 탄생도 국민의정부 시절 있었던 일이다. 공직자 임명장을 줄 때 배우자를 초청한 것도 처음이었다.

각하와 영부인 대신 대통령과 여사

2001년에는 여성부가 신설됐다. 각 부처에 여성정책 담당관실을 설치해 정책이 유기적으로 시행될 수 있게 만들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여성부가 ‘시한부’ 부서임을 명확히 했다. 성 평등이 실현되면 사라질 부서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내 제2부속실을 진두지휘하는 이희호 역시 이전의 대통령 부인과는 달랐다. 2002년 5월에는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서 여성 최초로 의장석에 앉아 개회 선언을 했다. 어떤 나라의 여성도 그 자리에 서본 적이 없었다.

ⓒ김대중평화재단1999년 어느 봄날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2008년 11월11일 이희호는 자서전 <동행: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웅진지식하우스, 절판)의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90°로 허리를 숙여 이희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처럼 생전 김대중은 이희호를 치하하는 데 인색함이 없었다. “내가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조언 덕이었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도 여성을 비하하는 여러 행동이 옳지 않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나 역시 가부장적인 전통 관념에 찌들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비하와 멸시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되고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여성을 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도움이다. 아내 덕분에 나는 인류의 나머지 반쪽을 찾을 수 있었다.”

매섭고도 긴 세월을 견디며 부부보다는 ‘동지’였던 두 사람은 말년에야 다정을 알아갔다. 꽃 가꾸기를 좋아하던 김대중은 마당에 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면 이희호에게 꽃구경 값을 요구했다. 그럴 때면 이희호는 종이에 10만원이나 100만원을 적어 돈 대신 건네곤 했다. 잠들기 전 침대에 걸터앉아 한두 곡 노래를 함께 부르기 시작한 것도 청와대를 벗어나고부터였다. ‘사랑이여’ ‘목포의 눈물’ ‘두만강’ ‘신라의 달밤’ 같은 노래를 불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도 빼먹지 않았다.

이희호 이사장은 6월10일 9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면한 지 꼭 10년이 지났다. 그 세월을 건너 만난 두 사람은 지금쯤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일찌감치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정체화하고, 평등한 세상을 바랐던 그는 자신의 꿈이 “너무 일찍 꾼 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희호가 꾼 꿈 덕분에 세상이 이만큼 또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이희호 평전>(한겨레출판, 2016)에서 이희호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성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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