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이 노래방을 운영했다. 학창 시절 외삼촌의 노래방에 꼬박꼬박 출퇴근 도장을 찍었다. 대세는 고음이었다. 가수 김경호, 그룹 ‘야다’와 ‘더 크로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공개 오디션을 통과해 한 소속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노래방 독학파’가 어릴 때부터 준비해온 친구들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해 무대 뒤에서 공연이나 이벤트를 운영하는 실무를 배웠다.

입사한 공연·기획 대행사에서 한창 일하고 있을 때였다. 2014년 4월16일, 권오현씨(33)는 전남 여수로 출장을 가고 있었다. 천안을 지날 무렵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천이가 탄 배가 가라앉았대.” 목적지를 급히 바꿔 진도로 내려가는 길에 들른 주유소에서 ‘전원 구조’ 오보를 들었다. 오천이는 그날 밤 뭍으로 올라왔다. 8개월 전 간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도 아직 실감나지 않을 때였다.

ⓒ윤성희

참사 당일 시신이 수습된 단원고 학생은 오천이를 포함해 3명뿐이었다. 먼저 장례를 치른 권씨는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되뇌었다. 권씨는 가족대책위원회를 꾸리기 위해 다른 유가족들의 동의를 받으며 돌아다녔다. 정부 관계자들과 기자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유가족들은 ‘당신 누구냐’며 권씨의 멱살을 잡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아예 가족관계증명서를 출력해서 들고 다녔다. 오른쪽 팔에는 먼저 간 아버지와 막내 오천이,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년월일과 세월호 리본 문신을 새겨넣었다. 타투이스트도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었다. 평소 같으면 4시간이면 충분했을 문신 작업은 8시간을 훌쩍 넘겼다.

가족대책위에서 일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 간담회에 서는 동안 몸과 마음은 망가져갔다. 경기도 안산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걸어서 왕복하는 ‘형이 간다’ 행진도 했다. 자학하듯 하루에 4만~5만 보를 걸었다. 폭식증 때문에 몸이 30㎏ 이상 불었고, 스스로 생각해도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2016년 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가 나흘 만에 의식이 돌아왔다. ‘내가 왜 깨어났을까’를 한탄하던 중 가수 치타와 장성환이 부른 노래 ‘옐로 오션(Yellow Ocean)’을 들었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직설적인 가사에 권씨는 ‘순수한 충격’을 받았다. 만약 본인이 겪어온 감정들을 직접 노래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권씨는 부산으로 내려가 본격적으로 작곡을 배웠다. 다시 노래를 불렀다. 2년이 훌쩍 지나갔다. 올해 3월 타이로 떠난 버스킹 여행에서 첫 곡 ‘매 순간’을 완성했다. 세월호 참사 1주기에 유가족들이 합창한 노래 ‘네버엔딩 스토리 0416’ 제작에 참여했던 윤영준 PD가 편곡을 했다. 언뜻 들으면 이별한 사람을 위한 발라드 같다는 말에 권씨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청아한 음악이 나왔는데, 누가 듣든 자신이 그리워하는 사람을 마음껏 떠올렸으면 좋겠어요. 한국 사회에서 기억하고 추억하는 행위가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요.” 권씨의 노래 ‘매 순간’은 6월11일 멜론이나 엠넷 등 스트리밍 사이트에 공개되었다. 권씨는 앞으로도 마음껏 막냇동생을 그리워하며 노래를 부를 생각이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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