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존재자와 결합하는 사이보그
  • 김원영 (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 호수 613
  • 승인 2019.06.21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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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의족을 개발하는 것만큼 휠체어 위에 앉은(결합된) 사람도, 그 뒤에서 접속하는(밀어주는) 사람도 가장 쾌적할 수 있는 공학적·미적 디자인을 개발하는 일 역시 중요한 테크놀로지이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는 2011년 가파른 경제성장의 궤도에 올라 있었다. 비 온 뒤 도심 곳곳에는 물웅덩이가 다음 날까지 남았고, 유목 생활을 접고 올라온 사람들의 판잣집이 도시 입구에 줄을 서듯 길게 들어섰지만, 현대식 건축물과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력이 넘쳤다. 그해 8월, 몽골에 장애인 인권을 위한 사회·정치적 인프라를 놓기 원하는 인권운동가들이 울란바토르에 모였다(당시 나는 로스쿨 학생이었다).

한국·몽골·네팔·타이완·일본·파키스탄 등지에서 온 장애인·비장애인 인권활동가들이 함께 거리에서 장애인 이동권 캠페인을 펼치고 정부 관료들을 만났다. 우리는 한 장애 여성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는 당시로부터 1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경추 손상을 입었고 가슴 아래 부위가 전부 마비되어 혼자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팽창 중인 울란바토르 시내는 휠체어를 타고 외출하기에는 전혀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그녀는 집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그녀에게 장애를 가지고도 충분히 사회적인 활동이 가능하며, 또 그런 사회를 위해서 함께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싶었다.

대화를 시작하고 얼마쯤 지나 일본에서 온 장애인 인권활동가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은 장애가 부끄럽습니까? 나는 장애를 고치는 약이 나와도 먹지 않을 겁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는 뇌병변 장애인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물웅덩이를 넘고 건축 중인 관공서 건물 아래에서 노숙하며 이 도시를 바꾸겠다는 신념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이, 그 에너지를 이으며 외쳤다. “부끄럽지 않습니다!” 나는 좀 부끄러웠다.
 

ⓒ이지영 그림

‘장애를 고치지 않겠다’는 선언에 숨은 뜻

“장애를 고치는 알약이 있어도 먹지 않겠다”라는 선언은 20세기 후반 전개된 장애인 인권운동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장애를 부끄러워하거나 부정하지 않겠다는 것. 간편한 정도의 처치만으로 그 상황을 개선할 수 있더라도 이를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외치는 장애인들이, 심한 독감에 걸리거나 만성 신장염에 걸려도 치료를 거부할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항생제를 먹고 식단을 조절하며 요독을 제거하는 약을 적극적으로 먹을 것이다.

‘마블 시리즈’의 캡틴 아메리카는 유약한 몸으로 군에 입대한 후 생화학적 처치를 받아 탄탄한 근육질의 배우 크리스 에번스의 몸이 된다. 영화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높은 건물에서 떨어져도, 우주 최강자에게 두들겨 맞아도 뼈가 부러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 내 경험도 그와 유사한 면이 있다. 나는 태어난 직후부터 10대 중반까지 정기적으로 정형외과 수술과 처치를 받았고 그 덕분에 전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골격을 유지하게 되었다. 우주 최약자 정도에게는 맞아도 다치지 않는다.

캡틴 아메리카가 받은 처치는 통상 증강(enhancement)으로 불리고, 내가 받은 처치는 치료(therapy)라고 불린다. 치료는 질병을 예방하거나 제거하여 ‘정상적인’ 몸 또는 정신의 상태를 지속하거나 그러한 상태로 복원한다. 반면 증강은 인간의 몸이나 정신을 ‘정상적인’ 수준을 초과하여 기능적 혹은 미적으로 강화한다. 이때 무엇이 ‘정상’인지는 대체로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지닌 평균적 상태를 기준으로 삼는다. 한국 성인 여성의 평균 키가 160㎝ 정도이므로, 성인이 되었을 때 130㎝ 정도의 키가 예상되는 특정 유전적 소인을 가진 청소년에게 시행하는 성장호르몬 투여나 하지 연장 시술은 치료에 해당한다. 반면 160㎝가 예상되는 청소년을 175㎝로 키우기 위해 이뤄지는 조치는 증강에 가까울 것이다(물론 증강인지 치료인지 불분명한 영역이 넓게 존재한다).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한 증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재력 있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유전자를 조작하고, 각종 약물로 인지능력을 강화해 우수한 대학에 진학시킬 수 있다면 이는 공정하지 않아 보인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델은 생명 의료 증강이 우연성이라는 삶의 요소를 파괴한다고 우려한다. 우리는 ‘유전적 제비뽑기’에 따라 지능, 키, 기대수명, 특정 세균에 대한 면역력 등을 얼마간 타고난다. 우리 삶의 조건이 부모의 투자나 나의 노력 때문만이 아니라 상당 부분 우연히 주어졌음을 떠올릴 때, 우리는 이것들을 ‘선물’로 생각할 수 있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더 잘 상기한다고 마이클 샌델은 주장한다.

 

 

 

ⓒEPA안내견을 따라 이동하고 있는 시각장애인.

 

증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치료’가 필요하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백혈병에 걸린 아동을 위한 더 효과적인 항암제를 연구하고, 골형성부전증으로 한 달에 한 번씩 골절을 겪는 아동을 위해 골절 빈도를 낮추는 수술법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장애인 인권운동가들 중 일부는 장애를 ‘치료하는 것’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으며 심지어 나쁘게 여긴다. 치료를 반대할 명분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실 이 문제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내가 보기에, 장애를 고치지 않겠다고 외치는 장애인 인권운동가들은 치료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증강’을 반대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種)의 평균 모습이 무엇이건, 자신의 몸을 비정상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몸의 근본 조건을 교정하는 일을 통상적인 치료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치료가 우리의 원래 몸(정신) 상태를 복원하거나 유지하는 것임을 상기해보자. “알약이 있어도 먹지 않겠다!”라는 뇌병변 장애인의 ‘원래’ 몸은 무엇인가? 인간종의 평균(정상)이라는 관념에서 자유롭다면, 그의 본래 몸 상태는 바로 2011년 울란바토르에 있던 그 모습이다. 그는 특정한 근육 강직을 지닌 채 휠체어와 결합해 30년을 살았고, 자체로 신체의 기능과 형태가 나름의 안정과 균형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장애를 고치는 알약을 먹으면 그의 몸은 직립보행이 가능하고 정교한 손동작이 가능해져서 기능이 향상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의 ‘원래 몸’과 거리가 멀다. 이런 입장에서 ‘알약’은 치료제가 아니라 증강 조치에 가까운 셈이다.

알약을 먹어서 장애를 교정할 수 있어도 거부한다는 주장은, 증강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 이유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우연성을 수용하고, 다른 장애인들이 장애를 교정하겠다는 욕망 속에서 스스로 멸시하지 않기를 바라는 선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장애인은 ‘우연히’ 주어진 삶의 조건을 그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휠체어를 타고 보청기를 이용하는 순간 이미 자신의 상태를 증강한 존재다. 문제는 무엇을 증강하는가에 있다. 내가 만약 “강하고 단단하며 형태학적으로 완벽한 골격”을 얻기 위해 계속 나를 증강한다고 해보자. 나는 지금 정도의 상태에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더 강하고 더 길고 더 비례적인 신체를 위해, 캡틴 아메리카의 몸을 향해 계속 집착할 것이다(그리고 어떤 단계를 달성해도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더 안정되고 다양한 가능성에 열려 있기 위해 총체적으로 내 존재를 증강하기 원한다면 어떨까.

총체성의 관점에서 더 나은 존재가 무엇일지에 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다리의 근력, 높은 시력과 지능지수, 민감한 청력 등 특정 기능만으로 우리는 그런 인간이 될 수 없다. 인간을 이루는 수많은 역량들의 총합은 역량들의 단순한 합과 같지 않다. 걸을 수 없었기에 나는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글로 쓰고, 다른 사람과 밀도 있게 연결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휠체어도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나의 총체적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나는 이동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휠체어라는 보장구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특정 역량과 총체적 역량의 관계는 매우 복잡한 함수다.

우리가 사이보그가 되려는 진짜 이유

총체적인 역량은 기계-다른 인간-동물과 결합할 때 더 효과적으로 성취될지도 모른다. 이런 존재야말로 이른바 ‘포스트휴먼’ 시대가 꿈꾸는 사이보그가 아닐까? 장애인은 최첨단 의족과 전자 시력 테크놀로지를 착용했을 때 더 잘 걷거나 잘 볼 것이고, 그에 기반하여 더 많은 잠재력을 지닐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 안내견과 하나로 움직일 때, 중증 뇌병변 장애인이 휠체어와 결합하고 또 휠체어를 밀어주는 활동지원인과 접속할 때, 그러한 접속을 지지하는 사회 시스템이 수반될 때 그 존재가 지니는 총체적 역량이 훨씬 더 확장되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시각장애인에게 바이오닉 비전을 제공하는 테크놀로지도 중요하지만, 시각장애인의 안내견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시각장애인을 보조하도록 돕는 테크놀로지도 마찬가지로 중요할 것이다. 첨단 의족을 개발하는 것은 분명 가치 있지만, 휠체어 위에 앉은(결합된) 사람도, 그 뒤에서 접속한(밀어주는) 사람도 가장 쾌적할 수 있는 있는 공학적·미적 디자인을 개발하는 일 또한 총체적 증강의 관점에서는 결코 덜 중요한 테크놀로지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 나아지기를 원하며, 그것이 우리가 사이보그가 되려는 이유다. 다만 어떻게 ‘나아지기’ 위해 사이보그가 되려는가? 특정 역할을 최고 효율로 수행하는, 누군가가 부여한 목적 달성에 최적화한 ‘기계’로서의 사이보그인가? 아니면 총체적으로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속적으로 묻고 헤매면서 주변의 존재자와 결합하는 사이보그인가?(이런 사이보그야말로 김초엽 작가가 지난 글에서 언급한 ‘실패한’ 사이보그에 가깝지 않은가?) 나는 장애인 인권운동이 후자의 사이보그를 지향한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스물한 살의 나이에 경추 손상을 입은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울란바토르의 장애 여성 앞에서 “알약이 있어도 장애를 고치지 않겠다”라고 외치는 일은, 그 내용의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정치적 투쟁을 위해 (실패하지 않는) ‘기능화된’ 사이보그가 당장 되라는 요청처럼 보였다. 그녀가 총체적인 향상을 지향하는 사이보그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특정한 테크놀로지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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