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 빌딩 1층 출입구 방향을 바라보는 CCTV는 총 5대였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림역 출구에서 집까지 불과 150여m. 신림역에서 이곳으로 걸어오는 동안 마주친 CCTV만 스무 대가 넘었다. 그중에는 경찰에서 실시간으로 감시 중인 방범 카메라도 있다. 불과 한 블록 떨어진 골목 입구에는 신림동 자율방범대 본부가 위치해 있다.

감시체계가 촘촘하게 구축되어 있었지만 범죄를 막지는 못했다. 5월28일 오전 6시20분 무렵. 조 아무개씨(30)는 이곳 골목길을 따라 귀가하던 한 여성의 뒤를 쫓았다. 원룸 빌딩 복도까지 쫓아 올라왔다. 다행히 피해 여성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았다. 조씨는 손을 뻗어 문을 열려 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도어록이 잠겼다. 잠시 복도를 서성이던 조씨는 10여 분간 현관문 앞에서 피해 여성을 협박했다. 스마트폰 LED 조명으로 도어록을 비춰 비밀번호를 풀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이런 조씨의 모습은 건물 복도 CCTV에 고스란히 찍혔다. 영상이 공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언론을 통해 인근 골목 CCTV 장면이 공개됐다. 이 영상에는 조씨가 피해자 여성의 뒤를 따라 골목길을 걷는 모습이 남아 있었다. 침입 시도가 계획된 행동이라는 걸 뒷받침하는 장면이었다.

ⓒCCTV 갈무리혼자 사는 여성의 집에 침입하려고 한 ‘신림동 강간 미수범’ 조 아무개씨의 CCTV 영상.
CCTV 영상이 인터넷을 타고 퍼지자 조씨는 사건 다음 날 아침 경찰에 자수했다. 그는 사건 당일 술을 마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경찰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당초 주거침입 미수 혐의로 조씨를 입건했으나 조사 과정에서 조씨가 문 앞에서 피해자 여성을 협박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강간 미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조씨는 5월31일 구속되었다.

신림동 강간 미수 사건이 남긴 상흔은 컸다. 당장 혼자 사는 여성이 갖는 ‘공포의 경험’이 공유됐다. 스토킹을 당해 골목길부터 집 앞까지 쫓긴 경험, 누군가 강제로 문을 열려고 시도한 경험, 실제로 범인이 침입해 들어왔으나 집안 내 다른 가족을 보고 놀라 도망친 일까지 다양한 경험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실제 통계 역시 주거침입 성범죄에 대한 걱정이 결코 기우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2017년 전국에서 발생한 주거침입 성폭력은 총 305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주거침입 강간’은 총 105건으로 전체 주거침입 성범죄 사건의 약 34%를 차지했다. 2017년 전체 성범죄 가운데 강간 사건의 비율이 약 21%(총 2만4110건 중 5223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다른 유형에 비해 주거침입 성범죄 피해가 더 위중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주거침입 성범죄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지표다. 주거침입 성범죄로 검거된 이들의 99.3%는 남성이었다.

사건 이후 각종 안전장치와 ‘팁’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가급적 1층에 살지 말라는 조언부터 방범창, 이중잠금 장치(보조키·이중잠금 걸쇠) 설치 등을 문의하는 반응이 잇달았다. 특히 디지털 도어록의 취약점이 도마 위에 올랐다. 도어록에 랩을 씌워놓는다거나 비밀번호를 8자리 이상으로 바꾸는 방법 등이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남성 속옷이나 신발 등을 출입구에 두는 방법, 누가 문을 두드릴 때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남성의 음성 녹음 파일을 트는 방법도 제시됐다.

ⓒ연합뉴스서울시는 밤늦게 귀가하는 여성을 돕는 ‘안심귀가 서비스’(아래)를 하고 있다.
이 같은 대응책은 안전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핵심은 법제도와 치안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 것이지만, 오히려 이번 사건은 경찰의 치안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피해자 여성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초동 대응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날 오전 6시41분 현장에 출동했지만 원룸 건물 1층과 주변 골목만 둘러본 뒤 철수했다. 피해 여성이 사는 현관문 앞까지 올라가지도 않았다. 논란이 된 CCTV 영상 역시 경찰이 확보한 게 아니라 피해자가 따로 건물주에게 부탁해 얻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사건 발생 닷새 만인 6월3일에야 초동 대처 미흡에 대한 자체 조사에 들어가겠다고 발표했다.

주거침입 성범죄 예방 대책 미비

안전에 대한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곧 ‘치안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경비실이 있고, 거주민만 1층 출입문을 지나다닐 수 있으며, 각종 CCTV가 설치된 거주 환경은 그만큼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2016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발표한 〈서울시 1인가구 여성의 삶 연구:2030 생활실태 및 정책지원방안〉에 따르면 거주하는 ‘층수’에 따라 안전에 대한 감각이 확연히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4층 이상에 사는 20·30대 1인 거주 여성 가운데 범죄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비율은 18.1%인 반면 지하·반지하(42%), 1층(42.7%), 2층(53.2%), 3층(42.5%)에 사는 1인 거주 청년 여성은 훨씬 많은 비율로 치안에 대한 불안을 호소했다.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불안의 원인도 ‘CCTV, 방범창 등 안전시설 미비(45.3%)’였다.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안전 정책 역시 ‘치안 불평등’을 간접적으로 해소하는 방향으로 확대되고 있다. 서울시 ‘안심귀가 서비스’처럼 지역 주민들이 귀가하는 여성과 동행하는 서비스를 시행하거나 취약 지역의 방범 CCTV를 늘리는 식이다. 최근에는 지자체별로 안심귀가 앱을 운영해 목적지(집)에 도착할 때까지 귀가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서비스도 등장했다. 그러나 이 역시 귀갓길이라는 특정 구간을 지자체가 보호하는 서비스일 뿐, 근본적으로 주거침입 성범죄를 예방하는 통로로 작동하지는 못한다.

가장 효과적인 대책은 여성을 쫓아가 협박하는 행위 자체가 범죄라는 것을 인식하고 법제화하는 일이다. 이번 신림동 강간 미수 사건은 그 자체로 일종의 스토킹 사건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을 두고 여성단체에서 스토킹 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여성의전화는 6월4일 “스토킹은 심각한 여성 폭력 범죄이지만, 여전히 입법 공백과 경찰의 낮은 의식 속에서 피해가 계속되고 있다. 20대 국회에서 7건의 스토킹 범죄 관련 처벌 법안이 발의되었으나 단 한 건도 처리되지 않았다”라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국회는 1999년 처음 발의되어 20년째 폐기와 계류를 반복하는 ‘스토킹 범죄 처벌’ 관련 법안들을 하루빨리 처리해야 한다”라고 썼다. 최종적으로 피해가 없다면 범죄가 아니라는 논리 때문에 수많은 스토킹 사례가 입건조차 되지 않았던 게 현실이다.

조씨의 강간 미수 사건이 일어난 원룸 건물 인근에는 신림동 주민센터에서 걸어둔 플래카드가 있었다. “여성이 안전한 행복도시 관악, 몰카 탐지기를 대여해드립니다.” 일상을 무너뜨리는 위험 요인을 개인이 직접 책임지도록 사회가 ‘지원’하는 모습이었다. 이번 사건은 그나마 CCTV가 많았고, 집주인한테 CCTV 영상을 구하는 등 개인이 노력한 끝에 세상에 알려졌다. 주거침입 성범죄 피해자 가운데에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6월6일 현재 사건 발생 이후 열흘이 지났다. 통계치에 근거해 추산해보면 그사이에 벌써 10명가량이 주거침입 성범죄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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