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람 알자디 씨(25)는 2014년 2월 한국에 왔다. 예멘에서 내전이 발발하기 7개월 전이었다. 한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가 장학금 제도에 합격한 그는 서울대학교에 진학해 경제학을 공부했다. 당시 체코와 인도가 지원하는 국가 장학금도 동시에 합격했지만, 한국의 경제 성장 모델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더 컸다. 배운 걸 활용할 기회는 수년째 지속되는 전쟁으로 기약 없이 미뤄졌다. 지난 2월 졸업한 그는 현재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아랍어를 가르치고 있다.

예멘 난민 500여 명이 제주도로 온 2018년, 이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반응에 아크람 씨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해 12월 아시아문화연구원이 주최하는 국제 학술 세미나에서 소논문 형식의 보고서 ‘한국에 온 예멘 이주민 문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예멘 난민 사태의 배경을 분석하는 내용으로 18쪽 분량이다. 5월29일 아크람 씨를 만났다.

ⓒ시사IN 조남진2014년 한국에 온 아크람 알자디 씨는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아랍어를 가르치고 있다.


최근 뉴스에 대해 묻고 싶다. 예멘 정부와 후티 반군이 휴전에 합의하고, 반군이 항구도시 호데이다에서 병력을 철수했다는 기사를 봤다. 내전이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난해 12월 정부와 후티 반군의 대표가 스웨덴에서 협상을 했다. 호데이다에서 휴전하고 1월까지 병력을 재배치하기로 합의했다. 호데이다는 예멘에서 물류 중심지인데 이곳이 격전지가 되면서 구호품도 들어오지 못했다. 양쪽 다 합의 사항을 지키지 않았다. 5월11일 후티 반군이 합의대로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이는 호데이다 지역만 해당한다. 내전 중단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후티 반군은 누구이고, 예멘 내전은 왜 발생한 것인가?

복잡한 이야기인데, 점점 더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후티는 예멘 북동부 사다주에 살던 가문이다. 2011년 아랍 혁명(아랍의 봄)으로 예멘에서는 34년간 집권했던 살레 대통령이 하야하고 부통령이었던 하디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후티는 하디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군대를 일으켜 2014년 9월 예멘 수도인 사나를 점령했다. 2015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랍 국가들과 ‘아랍 연합(이하 사우디 연합군)’을 만들어 개입하면서 전쟁이 확대됐다. 사우디 연합군이 합법 정부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예멘인들이 이를 반겼다. 그러나 사우디 연합군의 공습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지난 5월16일에도 사나에 11차례 공습이 있었다. 6명이 죽고 10명이 다쳤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국제기구의 통계를 보면 내전으로 2018년 11월까지 최소한 6872명이 사망하고 1만768명이 부상당했다. 이번 보고서를 쓰면서 깜짝 놀란 게 예멘 인구가 2900만명인데 기아 위기에 놓인 사람이 1500만명으로 50%였다. 굶주림으로 사망한 어린이(5세 미만)는 8만4700명이다. 2017년부터 콜레라가 창궐해 110만명이 감염되고 2017년 한 해에만 약 23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엔은 예멘 내전을 ‘현대 세계 최악의 인도적 위기’라고 정의했다. 예멘인들은 폭탄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과 공공보건 측면에서도 위험에 처해 있다.

현재 예멘의 상황은 어떤가?

전쟁으로 기반 시설의 50%가 파괴됐다.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민간이든 공공이든 일자리가 급격히 줄었다. 내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인데 월급을 받지 못한다. 번창하는 비즈니스는 딱 하나, 전쟁뿐이다. 사실 후티 반군은 예멘인들에게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금전 보상을 주면서 젊은 남성들, 심지어 어린이까지 모집했는데 이처럼 절박한 시기에는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다. 물론 무기로 위협해서 강제로 징집하기도 한다. 청년들이 살아남기 위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이다. 첫 번째는 후티 반군에 가담해 재정적 지원을 받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어서 비교적 안전한 도시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돈벌이 수단이 없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선택은 예멘 밖으로 이주하는 것, 곧 난민이 되는 것이다.

예멘 난민의 규모는 얼마나 되나?

유엔난민기구(UNHCR)는 내전으로 살던 곳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예멘인을 300만명 정도로 파악한다. 예멘을 떠난 사람뿐 아니라 예멘 내에서 이동한 사람(예멘 내 실향민)도 포함된 숫자다.

 

ⓒAP Photo2015년 3월 후티 반군에 대한 사우디 연합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한 여성의 시신을 주민들이 옮기고 있다.


300만명 가운데 지난해 1월부터 5월 사이 제주도로 입국한 예멘인 561명도 포함된다. 이들이 주변 국가 대신 거리가 먼 한국까지 온 이유는?

예멘인들이 전쟁을 피해서 제일 많이 도피한 나라가 주변국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오만 등 걸프 국가에 제일 많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2017년 한 해 동안 5만명이 넘는 예멘 난민이 옆 나라 오만으로 유입됐다. 주변국은 이미 포화상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예멘인에게 가혹할 정도로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새 법을 만들었다. 이 세금은 매년 높아진다.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캐나다에서도 예멘 난민을 찾을 수 있다. 살기 위해 예멘을 떠나 어디로든 갔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이다.

예멘 난민들이 제주도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어떻게 접했나?

뉴스를 보고 알았다. 기억에 남는 게 그즈음에 강화 교동도에 갔다. 내가 외국인이니까 예멘에서 왔다고 하면 거기가 어디냐는 질문을 받았다. 한국에 사는 5년 동안 항상 그랬다. 그날도 한 할아버지가 내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예멘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분이 바로 “어 제주도!”라고 하더라. 모두 그 소식을 알고 있구나 싶어서 신기했다.

예멘인 난민 인정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다. 공포와 혐오를 조장하는 가짜 뉴스도 퍼졌다.

사실 충격적이었다. 이전까지는 한국에 살며 차별받는다는 인식이 거의 없었다. 내가 예멘인이라서 한국인들이 싫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거리를 걷는데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동안 친절하게 대해주고 웃어주던 한국인들은 가짜이고 이게 진짜인 걸까. 한국은 내가 살아서는 안 되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적인 위협을 당한 것도 아닌데 며칠간 그랬다.

보고서에서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이슬람 문화와 신앙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 인식을 꼽았다.

한국인들의 인식 속에서 무슬림은 테러 그리고 여성 차별과 연결된다. 미디어가 이런 이미지를 주입한다. 유럽이나 미국, 그러니까 서구권 미디어들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유럽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가장 좋은 거야. 무슬림 국가에서 이슬람 방식으로 사는 건 멍청한 일이야.’ 한국 언론은 서구의 미디어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무슬림 여성은 히잡이나 니캅을 써야만 한다. 이슬람은 여성 차별적이다.’ 왜 여성이 그런 방식으로 입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는다. 여성뿐만 아니라 무슬림 남성도 특정한 방식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건 모른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무릎 위로 올라가는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 결국 미디어를 통해 이슬람에 대한 전체 그림 대신 일부만 보는 것이다. 이건 마치 ‘한국인은 개고기를 먹는다’라는 뉴스 하나만을 반복해서 보는 것과 같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한국인도 있고, 반대하는 한국인도 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이다.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서로의 문화에 대해 배워야 한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