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 6872명, 부상자 1만768명. 인구의 50%에 해당하는 1500만명이 기아 위기. 2015년 이후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한 5세 미만 아동 수 8만4700명. 2014년 발발한 내전으로 아라비아반도 최남단에 있는 예멘은 전쟁터가 되었다. 2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 사나와 함께 예멘인들의 삶도 무너졌다. 예멘인 300만명이 징집과 공습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그중 561명이 2018년 제주도에 입국했다. 예멘에서 제주공항까지, 1만㎞가 넘는 긴 여정 끝에 한국에 도착했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단 두 명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비로소 눈앞에 나타난 ‘난민’에게 한국은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그로부터 1년, 한국 사회는 ‘8000㎞를 날아온 낯선 질문’을 어떻게 풀어가고 있을까. 〈시사IN〉은 출도 제한이 풀려 각지로 흩어진 예멘인을 만나 그들의 1년을 돌아봤다.

 

 

 

 

 

 

 

 

 

 

쉬는 시간이 되자 어디선가 ‘뽕짝’이 흘러나왔다. 빨간 양념이 묻은 고무장갑을 낀 압둘라 씨(23)가 슬슬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곧이어 하얀색 위생 모자를 쓴 아주머니들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한껏 힘을 줘 노랫가락을 따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모 하드, 최고예요!” 압둘라 씨가 손뼉을 여러 번 치면서 말했다. 김치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이모들’을 압둘라 씨만의 방식으로 부르는 말이었다(‘하드’는 아랍어에서 복수형을 만드는 접미사다). 맞은편에서 양념을 섞고 있던 이집트인, 콩고인 동료들까지 합세해 무아지경으로 몸을 흔들었다. 압둘라 씨가 지난 4월12일 강원도 원주 김치 공장에서 찍은 2분 남짓한 영상 속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압둘라 씨가 김치 공장에서 일한 기간은 한 달이었지만 스스럼없는 성격 덕에 정이 많이 들었다. “제가 부끄러워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이모들을 많이 웃겨드렸거든요. 그랬더니 저를 되게 좋아하셨어요.” 일을 그만두고 나서도 영상을 자주 꺼내보게 된다. 김치에 대해서도 이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한다. 양념 비율을 조절해 덜 맵게 만들 수도 있다. “김치 공장에서 일을 하고 김치가 좋아졌어요.” 공장의 ‘이모들’ 덕분이다.

ⓒ시사IN 신선영압둘라 씨는 말레이시아를 거쳐 제주도로 왔다.
서울, 경기도 오산, 인천, 경기도 화성, 강원도 원주를 거쳤다.
지금은 수원에 산다.
예멘에서 수원까지 그가 이동한 거리는 총 1만1543㎞이다.


압둘라 씨는 한국에서 보낸 1년간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 지난해 6월에는 제주에서 고기잡이배를 타고, 11월에는 인천 시멘트 공장에서 포대를 날랐다. 12월부터 4개월 동안은 화성의 제과 공장에서 캐러멜 반죽을 만들었다. 공장에서는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톡톡히 했지만 일 자체가 쉬웠던 건 아니다. 제주에서 처음 어선을 탔을 땐 속이 울렁거려 오래 서 있지 못했다. 이전에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다 위에서 14시간씩 일을 한다는 건 그에게 모험 같은 일이었다. 하루에 4시간도 못 자다 보니 바닷바람을 만끽할 새도 없이 몸살이 났다.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일자리 처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달짜리 단기 계약이거나,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는 곳이었다. 숙식을 제공받고 월급으로는 평균 150만~170만원을 받았다. 공장에서 일하며 압둘라 씨는 “힘들어요” “피곤해요”라는 말도 함께 늘었다.

예멘에서는 가족들이 식당을 운영했다. 전쟁 전에 고등학생이었던 압둘라 씨는 방학 때마다 식당에서 요리를 도왔다. 전쟁이 터지면서 식당은 문을 닫고 압둘라 씨는 대학 진학의 꿈을 포기했다. 그는 2016년 참전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후티 반군에게 두 번 붙잡혔다. 8월12일과 10월9일. 정확한 날짜를 기억했다. 한번은 차를 타고 사나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다마르 지역에서 후티군에게 붙잡혀 5일 동안 감옥에 억류돼 있었다. 잡혀온 예멘인 6명이 더 있었다. “다시는 가족을 못 보고 죽겠구나 생각을 했어요.” 당시 후티군은 “우리와 함께 총을 들거나 그게 싫으면 돈을 내라”고 요구했다. 이를 알게 된 가족이 1000달러(약 120만원)를 보내고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예멘을 떠나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짐을 싸서 공항으로 가던 날 또다시 잡혔다. “후티 반군이 청년들을 끌고 가 전쟁터에 보냈어요. 저는 200달러(약 24만원)를 내고 4시간 만에 풀려났어요.” 부모를 예멘에 남겨두고 형과 남동생도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해야 했다.

한국에서 얻은 다섯 번째 직장

2013년쯤 유튜브에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꼭 한번 여행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곳인데, 이렇게 난민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주 6일을 일하다 보니 영상 속에 나왔던 명소들을 찾아갈 시간 여유가 없다. 대신 쉬는 날에는 ‘얄라코리아(YallaKorea)’라는 채널에 올라오는 영상을 본다. 한국인이 아랍어로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5분짜리 영상이다. 구독자 수가 17만명으로 꽤 인기가 높다. 그의 유튜브 피드를 좀 더 내리자 건물이 무너져 아수라장이 된 영상이 이어졌다. 사나 지역에서는 5월에만 수차례 폭탄 소리가 들렸다. 그는 전쟁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민간인이라고 했다. “한국도 전쟁을 겪었다는 걸 알고 슬펐어요. 이런 일이 이곳에서도 있었다는 거잖아요.”

압둘라 씨는 5월부터 케밥 가게에서 일한다. 한국에서 다섯 번째 직장이다. 지난해 10월 충북 오산에 예멘인 쉼터를 열었던 홍주민 목사가 난민들의 취업과 자립을 돕기 위해 수원에 개업한 ‘YD 케밥하우스’다. 홍 목사가 다른 4명의 목사와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어 올해 3월 사회적기업진흥원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에 선정됐고 압둘라 씨를 요리사로 고용했다. 개업 전부터 준비할 게 많았다. 압둘라 씨는 케밥 레시피를 배우기 위해 ‘연수’도 받았다. 5월10일부터 사흘간 평택 미군 기지 앞의 한 케밥 가게에서 고기 써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제과 공장과 김치 공장의 ‘이모들’에게도 안부를 전했다. 압둘라 씨가 “수원에서 케밥을 만들게 됐어요”라고 알렸더니 “꼭 먹으러 갈게”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개업식이 열린 5월16일은 라마단 기간이었다. 이날 새벽 3시37분에 금식을 시작했다. 저녁 시간이 되자 압둘라 씨의 입이 바짝 말랐다. 케밥 그릴 기계가 내뿜는 열기로 2평 남짓한 주방이 금세 후텁지근해졌다. 같이 일하는 직원이 물 한 잔을 권했다. 금식을 하는 압둘라 씨는 능숙한 한국어 발음으로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토르티야 4장을 연이어 깐 뒤 미리 잘라둔 고기와 양상추, 당근, 토마토를 흩뿌렸다. 장사가 끝나려면 3시간 넘게 남은 시간, 어느새 준비했던 케밥용 고기 한 통이 다 팔렸다. “이제 그만하고 좀 쉬자.” 홍 목사의 만류에도 압둘라 씨는 기어코 다른 한 통을 꺼내 그릴에 꽂았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요. 괜찮아요. 더 할 수 있어요.” 압둘라 씨의 첫 식사는 오후 8시30분을 넘겨서야 겨우 가능했다. 직접 만든 토르티야 케밥은 맛있었다. 라마단 열흘째 ‘이프타르(단식을 깨는 첫 식사)’였다.

기자명 수원·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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