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 6872명, 부상자 1만768명. 인구의 50%에 해당하는 1500만명이 기아 위기. 2015년 이후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한 5세 미만 아동 수 8만4700명. 2014년 발발한 내전으로 아라비아반도 최남단에 있는 예멘은 전쟁터가 되었다. 2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 사나와 함께 예멘인들의 삶도 무너졌다. 예멘인 300만명이 징집과 공습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그중 561명이 2018년 제주도에 입국했다. 예멘에서 제주공항까지, 1만㎞가 넘는 긴 여정 끝에 한국에 도착했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단 두 명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비로소 눈앞에 나타난 ‘난민’에게 한국은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그로부터 1년, 한국 사회는 ‘8000㎞를 날아온 낯선 질문’을 어떻게 풀어가고 있을까. 〈시사IN〉은 출도 제한이 풀려 각지로 흩어진 예멘인을 만나 그들의 1년을 돌아봤다.

 

 

 

 

 

 

외국인등록증을 볼 때마다 ‘G-1(기타, 난민 신청자)’이라는 글자가 못내 미웠다. D-2(학생 비자)나 D-4(일반연수 비자)였다면 덜 막막했을까. 야스민 씨(29)는 비자 종류가 적힌 외국인등록증의 아랫부분을 손으로 슬쩍 가려보았다.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고 서울에 왔던 야스민 씨는 이튿날 대림동을 찾았다. 서울 지하철 대림역 8번 출구를 나서자 ‘교포 대환영’ ‘일자리 많은 곳’ 같은 한국어가 쏟아졌다.

직업소개소 가운데 한 곳에 영어 소통이 가능한 상담원이 있었다. 상담원은 외국인등록증부터 확인했다. “일이 하나 있는데 히잡을 벗어야 해.” 고용주가 히잡 쓴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야스민 씨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른 일은 없나요?” 한 곳이 더 있었지만 그곳도 ‘NO 히잡’이었다. “한국에서 살고 싶으면 히잡을 벗어야 해. 계속 히잡을 쓰면 아무도 당신을 존중하지 않을 텐데. 한국의 룰을 따르는 게 좋을 거야.” 그에게 히잡은 정체성의 한 부분이었다. “이게 제 모습이에요. 아랍인, 예멘인, 무슬림 여성으로서요. 이걸 벗으면 제 일부를 잃는 것과 다름없어요.”

ⓒ시사IN 신선영야스민 씨는 벨라루스, 말레이시아를 거쳐 제주도에 들어왔다.
현재는 서울 광진구에 산다.
예멘에서 서울까지 그가 이동한 거리는 총 1만7894㎞이다.


야스민 씨는 사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초등학교 영어 교사로 일한 지 1년이 되던 해, 전쟁이 터졌다. 징집될 위험은 없었지만 전쟁은 그의 미래를 앗아갔다. 사우디아라비아 연합군의 공습으로 학교가 문을 닫았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 너무 지쳐 있었어요. 어디로든 벗어나야 했어요.” 2018년 1월 예멘을 떠나 친오빠와 벨라루스로 잠시 피신했다. 비자가 나오지 않아서 다른 가족들을 데려올 수 없었다. 2018년 4월부터 제주로 입국하는 예멘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 대해서 아는 건 ‘배우 이민호’ ‘두부’ ‘불교’ 정도였다. 두 달 가까이 고민한 끝에 짐을 쌌다. ‘여기보다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2018년 5월30일 ‘체류 지역 범위:제주특별자치도’라고 쓰인 파란색 도장이 야스민 씨의 여권 내지에 찍혔다. 난민이 되는 것은 신분이 바뀌는 일이었다. “한국에 왜 왔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 가장 난처했다. 난민이라고 말하면 눈빛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안쓰러워하는 눈빛도, 무시하는 태도도 모두 달갑지 않았다. 존재만으로도 수많은 질문이 그를 따라다녔다. 어쩌면 서로 잘 몰라서 생기는 두려움이라고 생각했다. 야스민 씨는 기회가 닿는 대로 난민 당사자로서 사람들 앞에 섰다. 제주의 난민 지원 단체, 대학교, 교회 등에서 예멘 상황을 알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히잡은 왜 써요?’ ‘왜 다른 나라로 가지 않았어요?’ ‘돈 벌러 온 거 아니에요?’ 악의가 있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질문은 반복됐다.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한 청중으로부터 ‘테러리스트가 아니란 걸 증명해봐라’는 질문을 받고서는 다리에 힘이 쭉 빠지기도 했다. 2018년 12월에는 세계 인권의 날을 기념해 한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폭탄이 터져 건물이 무너지는 영상 뒤로 야스민 씨의 얼굴이 나왔다. “우리는 일자리를 빼앗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피해 살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3분짜리 영상 아래 ‘감성팔이 하지 말라’ ‘자국민부터 살려라’ ‘무슬림은 안 된다’라는 악플이 그득했다.

“난민 지원 단체 활동가를 꿈꾼다”

야스민 씨는 밤마다 예멘에 있는 가족과 두 시간씩 통화를 한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전할 수 없다. “걱정할 게 뻔하니까요. 제주에 있을 때 식당에서 일한다고 말했다가 어머니가 많이 속상해하셨거든요.”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고 제주를 떠나 서울로 왔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함께 왔던 친오빠는 경기도의 한 자동차 공장에서 일한다. 얼마 전까지 목포 조선소에서 일하던 형부는 최근 그만두었다. “형부를 다시 만났는데 얼굴이 많이 안 좋더라고요. 일이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전화를 할 때마다 질문하는 쪽은 대체로 야스민 씨다. 어머니가 오늘 뭐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5월16일에 발생한 사우디아라비아 연합군의 공습으로 건물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은 괴로웠다. 가족이 사는 곳에서 불과 10분 거리였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담담하던 야스민 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저는 우리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이해해주기만을 바랐어요.” 야스민 씨는 이제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거라고 믿게 됐다. 그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첫 번째는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 이태원에 있는 바라카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태원 근처에 사는 무슬림 여성과 아이들의 교류를 위해 2018년 6월 개설된 쉼터였다. 운 좋게도 도서관 운영자가 야스민 씨에게 영어와 아랍어를 가르쳐달라는 제안을 했다. 영어는 난민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아랍어는 한국어 교사들을 대상으로 수업했다. 일주일에 두 번뿐이지만 초등학교 영어 교사였던 그에게는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다시 찾는 순간”이었다.

지난 3월부터는 일주일에 사흘간 난민 지원 단체인 MAP(아시아 평화를 위한 이주)로 출근한다. 영어를 못하고 아랍어만 쓰는 난민들을 그가 돕는다. 난민 중에는 한국어를 몰라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거나, 병원을 찾지 못해 수술을 못하고 병세가 악화된 경우도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며 활동가가 되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이제 고작 3개월밖에 안 되어서 부족한 게 많지만요.”

불투명한 미래가 자꾸만 야스민 씨의 무릎을 꺾는다. 인도적 체류 허가도 당장 4개월 뒤에 기한이 끝난다.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사람들은 1년마다 재심사를 받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제 미래가 잘 상상돼지 않아요.” 그는 자꾸만 외국인등록증을 만지작거렸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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