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 6872명, 부상자 1만768명. 인구의 50%에 해당하는 1500만명이 기아 위기. 2015년 이후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한 5세 미만 아동 수 8만4700명. 2014년 발발한 내전으로 아라비아반도 최남단에 있는 예멘은 전쟁터가 되었다. 2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 사나와 함께 예멘인들의 삶도 무너졌다. 예멘인 300만명이 징집과 공습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그중 561명이 2018년 제주도에 입국했다. 예멘에서 제주공항까지, 1만㎞가 넘는 긴 여정 끝에 한국에 도착했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단 두 명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비로소 눈앞에 나타난 ‘난민’에게 한국은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그로부터 1년, 한국 사회는 ‘8000㎞를 날아온 낯선 질문’을 어떻게 풀어가고 있을까. 〈시사IN〉은 출도 제한이 풀려 각지로 흩어진 예멘인을 만나 그들의 1년을 돌아봤다.

 

 

 

 

 

 

굵은 빗방울을 뚫고 날아간 공이 골문을 갈랐다. 골의 주인공은 등번호 4번 아바스 씨(가명). 하프라인 근처에서 상대 선수 한 명을 제친 아바스 씨는 11번 탈리브 씨(가명)를 향해 공을 패스했다. 이어 9번 보라크 씨(가명)를 거친 볼이 자석처럼 아바스 씨에게 돌아왔다. 골문 앞으로 쇄도한 그가 수비수 2명 사이로 오른발 슛을 쏘았다. 장대비가 내리는 필드 위에서 빨강 유니폼을 입은 남성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5월19일 서울 상문고등학교에서 열린 예멘 난민팀과 한국 드림교회팀의 축구 경기는 예멘팀의 압승으로 끝났다. 스코어는 10-2였다.

아바스 씨는 예멘에서 축구 클럽에 소속된 선수였다. 현재는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공장에서 일한다. 2주 전 기계에 손이 끼어 부러지는 바람에 손에 붕대를 감고 경기에 출전했다. 예멘팀의 다른 선수들에게도 핸디캡이 있었다. 라마단 기간 무슬림들은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금식을 해야 한다. 물도 마실 수 없다. 예멘 난민팀은 이날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전·후반 30분씩 1시간을 뛰었다.

ⓒ시사IN 윤무영5월19일 서울 상문고에서 예멘 난민팀과 한국
드림교회팀의 친선 축구 경기가 열렸다.


경기는 ‘예멘 친구들을 위한 사마리안들(사마리안들)’이라는 개신교 기반 비영리 단체가 주선했다. 지난해 제주도에서 만들어진 이 단체는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예멘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함께 상경했다. 지난 2월에는 수원역 근처에 쉼터를 마련했다. 일자리를 찾아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예멘인이 다 같이 모이기 좋은 위치가 수원이었다. 주말이면 쉼터를 찾아 고향 음식을 만들어 먹고 한국어를 배우던 예멘인을 중심으로 지난 4월 축구팀이 만들어졌다.

5월19일 경기에는 라마단과 폭우라는 악조건에도 경기도 수원·용인, 충청북도 온양 등지에서 축구팀 11명을 채우고 남을 예멘인이 모였다. 이들에게 축구는 한국 사회와 거리를 좁히는 시간이다. 대부분 예멘 난민팀의 무난한 승리로 끝나지만 늘 이기기만 하는 건 아니다. 전라북도 완주 등 지방에 사는 팀원의 기차 시간을 맞추다 보면 9명이나 10명만 경기를 뛸 때도 있다. 예멘 난민팀은 2~3주에 한 번 다른 팀과 경기를 한다.

제주에서 난민 심사를 기다리던 지난해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미래였다. 예멘인 561명에 대한 한국 사회의 ‘첫 인사’는 가혹했다. 71만4875명. 지난해 6월 예멘 난민을 반대하며 난민법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의한 인원이다. 비행기를 타고 와서, 스마트폰을 소지하고 있어서, 대부분 젊은 남성이라서, 무슬림이라서 ‘가짜 난민’이 아니냐는 의혹에 휩싸였다.

1994년 이후 난민 신청자 수 4만8906명

 

ⓒ시사IN 이명익제주도 남원읍에 사는 모하메드 씨가 5월19일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우리는 지난해에 이어 다시 예멘인을 만나보기로 했다. 출도 제한 조치로 인해 제주에 발이 묶여 있던 지난해와 달리, 많은 예멘인이 제주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법무부 집계에 따르면 3월 말 기준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고 제주도를 떠난 예멘인은 323명이었다. 전라도 155명, 경기도 54명, 충청도 42명, 서울 38명, 기타 지역에 34명이 살고 있다. 예멘 난민팀 소속 선수들처럼 한국 사회와 접점은 만들었을까.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어떤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까. 4월17일 ‘사마리안들’ 쉼터를 시작으로 서울 이태원과 대림동, 경기도 수원, 전라남도 영암과 제주도로 예멘인을 찾아 나섰다.

취재 계획은 출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취재를 위해 지난 1년간 예멘인을 지원해온 활동가들을 설득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2018년 당시 제주도는 난민을 만나본 경험도, 난민 지원 전문 단체도 전무했다. 국내 난민 지원 분야에 긴 경력을 가진 전국의 활동가들이 하던 일을 제쳐두고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 난민 지원이 금세 끝날 거라고 예상했다. 그해 1만6173명이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는데, 제주로 입국한 예멘인은 ‘고작’ 561명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난민 신청을 한 것도 아니다. 지난해 난민 신청자 기준으로 보면 0.03%(484명)에 불과했다. 법무부를 잘 설득해 출도 제한 조치만 풀면 예멘인이 한국 내 존재하는 예멘 커뮤니티를 찾아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러나 법무부는 6월1일 더 이상 예멘인이 입국할 수 없도록 예멘을 무비자 관광이 불가능한 나라 중 한 곳으로 묶은 후에도 출도 제한을 풀지 않았다. 제주 안팎으로 불필요한 갈등이 계속됐다. 국내 난민 문제 ‘전문가’라 할 만한 활동가들에게도 지난 1년은 당혹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드러나면 그 지역 주민들이 구청이나 시청에 민원을 넣고, 조용히 살던 사람들이 더 괴로워집니다.” 예멘인을 소개받기 위해 제주도의 한 이주민센터에 연락했다가 들은 답변이었다. 이 센터의 활동가는 “취재 방향과는 무관하게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만으로 난민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전라도 지역에서 수년간 난민 지원 활동을 해온 종교인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난민들을 만나러 다니면 처음 알게 되는 국가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우리가 그동안 무관심해서 그렇지 다양한 국적의 난민들이 이미 한국에 살고 있거든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려고 애쓰는데 갑자기 인식이 너무 나빠져버려서…. 지원 활동도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졌습니다.”

활동가들의 우려는 일리가 있었다. 예멘인들도 자신들을 향한 한국 사회의 시선을 모르지 않았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예멘인들은 인터뷰 요청에 난색을 표했다.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다가 ‘악성 댓글’에 시달린 경험을 한 사람도 많았다. 예멘인이 왜 한국에 왔는지 지난 1년간 수차례 나서서 설명하고 설득했지만 바뀌지 않는 사회에 지친 사람도 있었다. 대다수가 만나서 대화할 수는 있지만, 공식적인 인터뷰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아예 신원 자체를 공개할 수 없는 이들도 많았다. 신분이 드러날 경우 예멘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처벌받을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한국에서 예멘인은 그 수와 상관없이 ‘난민’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예멘인을 통해 한국 사회도 비로소 난민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난민이라는 지위나 예멘인이라는 집단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자리’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두려움이 무지에서 출발한다. 불필요한 갈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아는 일은 중요하다. 난민법과 난민인권 전문가인 이일 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의 말이다. “난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사회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미 2001년에 첫 난민 인정자가 나왔어요. 1994년부터 누적 난민 신청자 수가 4만8906명이고 이 중 936명이 난민 인정을 받았습니다. 인도적 체류 허가자는 1988명이에요. 이제 숨길 수 있는 단계는 지났어요. 무엇보다도 난민은 숨어 지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시사IN 신선영5월16일 수원 YD 케밥하우스 개업식에 온 예멘인들이 저녁 기도를 올리고 있다.


예멘 난민 심사가 완료된 지난해 12월 이후 서울로 온 예멘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림동 직업소개소를 찾는다는 정보를 들었다. 중국동포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이주자들이 3~4년 전부터 일자리를 찾아서 대림동으로 온다고 했다. 대림동에서 예멘인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난민에 대한 인식만은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대다수 예멘인의 법적 지위인 인도적 체류 허가자가 소지한 G-1-6 비자를 환영하는 곳은 우리가 찾아간 8개 업소 중 한 군데도 없었다. ‘일자리 많은 곳’이라고 써 붙인 직업소개소도 마찬가지였다. 그 업소의 대표는 “냄새 나서 소개 안 한다”라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왔던 예멘인도 요즘은 발길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또 다른 직업소개소 대표는 제법 동정적인 어조로 취재에 응했다. “그 친구들 갈 만한 일자리가 없어서 큰일이에요. 브로커가 접근해서 취업 사기로 돈 떼인 이들도 있는 모양이더라고.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우리가 위험해지거든요.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나라가 배려해서 취업을 좀 시켜야 할 텐데.”

드물게 난민을 선호하는 업체도 있다. 이주노동자는 고용허가제 때문에 쓸 수 있는 인원이 한정돼 있어 예멘인 같은 난민을 원하기도 한다고 했다. 난민을 혐오하는 이들도, 동정하는 이들도 한목소리를 낼 때가 있었다. 난민이 없으면 문 닫을 공장이 많다는 이야기를 할 때였다. “위험하고, 더럽고, 많이 다치고 죽는 데 있잖아요, 3D 업종. 그런 데는 이주노동자들도 안 가려고 하거든. 불법체류자는 잘못 썼다가 걸리면 큰일 나니까 사장들이 못 쓰고. 그런 업체는 G-1 비자를 선호하죠. 돼지우리 같은 기숙사에 8~10명씩 집어넣어도 말을 안 해요. 말을 못하기도 하고. 일만 시켜주면 감사하니까. 그 사람들 없으면 한국 경제 망해요. 공장 다 문 닫지.”

예멘인 100여 명이 취업한 전라도 지역의 조선소가 대표적이다. 내국인을 채용하고 싶어도 기피하는 일자리라 언제나 인력이 부족했다. 협력사 7곳이 나서서 예멘 난민을 대상으로 취업설명회를 열기도 했다. 하청업체지만 대기업 계열사라 다른 일자리에 비해 사내 복지가 좋아서 많은 예멘인이 전라도에 둥지를 틀었다. ‘좋은 사례’로 소개하겠다는 제안에 마지못해 취재에 응한 사내 홍보팀 직원은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예멘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워낙 많다 보니까 혹시라도 여기 와서 시위를 한다든가, 이들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걱정됩니다. 사람들이 과정은 안 보고 결과만 보거든요. 우리도 내국인 고용 창출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이렇게 된 건데, 기사를 읽는 분들은 ‘외국인이 내국인 일자리를 차지했다’는 식으로 생각할까 봐 곤혹스럽습니다.”

‘공존’을 모색하는 한국 사회의 실력

우리가 본격적으로 취재를 시작한 시기는 2019년 라마단 기간(5월6일~6월5일)과 겹쳤다. 라마단 역시 취재에 큰 변수였다. 금식 때문에 인터뷰를 거절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라마단 기간을 견디는 다양한 방법을 확인하는 과정은 우리 역시 몰랐던 문화와 종교를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무슬림은 해와 달의 길이에 따라 하루에 다섯 번 새벽(fajr), 정오(dhuhr), 늦은 오후(asr), 일몰(maghrib), 저녁(isha’a) 기도를 올린다. 예멘인들의 휴대전화에는 하나같이 ‘라마단 앱’이 깔려 있었다. 매일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1분 내지 2분씩 조정되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휴대전화에서 ‘아잔’이 울렸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일종의 알람인데 우리의 창하는 소리와 비슷했다.

매번 제 시간에 기도를 하지는 않는다. “한국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기도할 공간이 없어서” 때와 장소에 따라 유동적으로 선택하곤 했다. 금식도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이뤄졌다. 라마단에 금식을 하는 이유는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신앙심을 키우는 종교적인 의식이지만, 일과 병행하기에 무리일 때가 많았다. 해가 떨어지고 10시간 넘는 금식이 끝나면 이프타르(금식을 깨는 식사)가 시작됐다. 제일 먼저 물을 마시고 ‘데이츠’라고 불리는 대추야자를 먹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건강에 좋다며 먹은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그 과정을 거쳐 전국 각지에서 만난 예멘인 다섯 명이 어렵게 목소리를 내줬다(18~27쪽 기사 참조). 난민 불인정을 받아 제주도에 남은 예멘인은 예멘 언론사 〈올라〉의 기자였던 이스마일 씨가 대신 취재했다. 이스마일 씨는 지난해 난민 인정을 받은 예멘인 둘 가운데 한 명이다(28~30쪽 기사 참조).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이들은 해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하지만 불완전함 속에서도 삶의 가능성과 미래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예멘인은 한국인에게 언제든 말을 걸 준비가 돼 있었고, 지난 1년간 각자의 자리에서 부단히 노력해왔다. 전쟁의 비극을 피해 8000㎞를 날아온 한국 땅이 늘 편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슬프거나 외로웠던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 보낸 1년의 시간에는 환대와 도움의 자취도 켜켜이 배어 있다. 덕분에 삶의 기쁨과 기적도 맛봤다. 예멘에서라면 만나지 못했을 친구들이 생겼고, 새 생명을 품었고, 연애를 시작하거나 결혼한 이도 있었다.

예멘 난민 유입을 계기로 불거진 반대 목소리만큼이나 난민 지원 제도 개선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건강보험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고,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다. 물론 제도는 마련돼 있지만 사회적 여건은 아직 미비하다. 출신국에서 마친 학력 인정 여부가 해당 학교의 재량에 달려 있고, 수백만원에 달하는 등록금은 또 다른 현실의 장벽이다. 하지만 전쟁 통에는 만져볼 수조차 없었던 미래를 꿈이나마 꿔볼 수 있게 됐다. 한국 사회도 이들 덕분에 난민 문제가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게 됐다. 예멘인이 한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에 비례해 공존을 모색하는 한국 사회의 실력도 쌓일 수 있을까. 여기 기록한 ‘예멘 난민의 1년’은 그 좌표이다.

기자명 김연희·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