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편애’라 한다. 음악의 편을 든다는 의미로 이런 제목을 지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음악에 대한 자신의 깊은 애정을 넌지시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약간 다른 의미에서 나는 음악편애라는 타이틀이 마음에 쏙 들었다. 객관적인 평론이란 ‘드래곤’ 같은 존재라는 측면에서 음악은 기본적으로 편애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과연, 그가 왜 음악평론가라는 보편적인 직함을 뒤로하고 굳이 ‘대중음악 의견가’로 활동하는지, 제목을 통해 다시금 잘 느낄 수 있었다.

저자 서정민갑씨는 스스로를 대중음악 의견가라고 부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이 직함을 훔쳐 쓰고 싶은 심정이 없지 않다. 이유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나는 객관적인 평론이란 ‘환상 속의 그대’ 정도에 불과하다고 확신한다. 아니, 평론가 각자가 쌓아온 음악 듣기의 역사가 다를진대 객관적인 평가가 어찌 가능하겠나. 차라리 평론은, 자신의 주관을 ‘잘 설득하는 과정’에 가깝다. 뭐, 내가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쪽을 향해 아주 조금씩은 다가서고 있다고 믿는다.

ⓒ시사IN 윤무영대중음악 의견가 서정민갑씨가 펴낸 〈음악편애〉.

바로 이 믿음, 음악평론가들 중 나보다 더 간절한 이들이 꽤 있다. 서정민갑씨가 그중 하나다. 글쎄, 그와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눠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 간절함에 고개를 숙인다. 그러곤 반성한다. 그의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그 간절함이 과연 나의 결과물에는 있는가 되짚어보면 대개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겸손한 척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글쓰기의 경우, 꾸준한 노력이 천부적 재능을 이긴다고 믿는 쪽이다. 재능마저 부실한 나에게 남은 방법이라곤 꾸준한 노력밖에 없는데, 이것마저 부족하구나 절감하게 만드는 동료들 중 하나가 바로 서정민갑씨라는 의미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이쯤에서 최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남긴 말을 다시 들어본다. 대략 다음과 같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궁극의 공포’란 ‘과연 내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이 드는 때’일 겁니다.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는 잔혹한 순간과 맞닥뜨리는 것이죠. 하지만 궁극의 공포란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 것이므로 그냥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지는 그의 글

글 쓰는 일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소처럼 우직하게 쓰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그 와중에 제법 괜찮은 문장 하나쯤은 길어 올릴 수 있겠지, 희망하면서 쓰고, 또 쓰는 거다. 책 〈음악편애〉에서 서정민갑씨는 인디만이 아니라 태연이나 원더걸스 같은 메이저까지 아우르면서 자신의 최선에 가닿으려 노력한다. 그 노력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참 울림 있게 읽은 책이기도 하다.

내가 그의 글에 대해 가타부타할 자격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감히 확언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다. 그의 글이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지고 있다(고 내가 느끼고 있다)는 거다. 지긋한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관찰은 삐죽한 에너지를 억제하는 힘을 지녔다. 관찰은 오류를 0으로 만들 수는 없어도, 그걸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그의 글처럼 “세상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는데 어떤 음악은 왜 여전히 아름다운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고 음악을 찾아 들어보시라.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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