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내 인형을 훔쳤어〉 표지는 정말 제목 그대로입니다. 범죄자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귀엽게 생긴 여우가 인형을 안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나무 뒤에 숨어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목격자들도 보입니다. 도대체 귀여운 여우는 왜, 누구의 인형을 훔치고 있는 걸까요?

이제 앞 면지를 봅니다. 면지 그림을 보니 이야기는 어느 방 선반에서 시작됩니다. 선반에는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습니다. 책 오른쪽에는 인형들이 앉아 있습니다. 꽃을 든 토끼 인형, 고양이 인형, 곰 인형 그리고 여우 인형이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면 속표지가 나옵니다. 속표지 그림에서 마침내 방 전체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소녀의 방입니다. 벽에는 소녀가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들이 붙어 있습니다. 소녀는 여우 인형을 참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여우 인형을 그린 그림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소녀는 여우 인형을 품에 안고 자고 있습니다. 참 복 받은 여우 인형입니다.

그런데 잠깐! 잘 살펴보니 소녀가 품에 안고 있는 인형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납니다! 맞습니다! 표지에서 여우가 훔쳐 가고 있던 바로 그 인형입니다! 세상에! 도대체 소녀와 여우는 무슨 관계일까요? 여우는 어떻게 소녀의 여우 인형을 훔쳤을까요?

저는 글이 있는 그림책보다 글이 없는 그림책을 더 좋아합니다. 글이 없는 그림책은 저를 더욱 능동적인 독자로 만듭니다. 반드시 스스로 그림을 읽어야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글 없는 그림책은 저를 더 자유롭게 만듭니다. 글이라는 상상의 제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대로 그림을 읽고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그야말로 자유를 만끽합니다.

〈여우가 내 인형을 훔쳤어〉 스테퍼니 그레긴 글·그림, 김세실 해설, 위즈덤하우스 펴냄

누군가는 그렇게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느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네! 마음대로 상상하고 해석해도 됩니다. 반드시 독자 마음대로 해석해야만 합니다. 작가에게 창작의 자유가 있고, 편집자에게 편집의 자유가 있듯이 독자에게는 감상의 자유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교육제도가 정답을 강요하고 독자의 자유를 억압해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글 없는 그림책이 우리가 잃어버렸던 감상의 자유를 찾아주고 있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에는 글이라는 제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글 없는 그림책은 글이 없기에 글을 모르는 사람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은 문자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문자 예술에서 시각 예술의 시대로

문자의 발명이 인간에게 축복만은 아니었습니다. 실로 오랜 시간 문자는 많은 사람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도구였습니다. 문자를 무기로 극소수의 사람이 권력과 지식과 부와 명예를 독점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인생을 배우고 사람을 사랑하고 자식을 낳아 길렀습니다. 글은 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글을 배우면서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무시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어린이와 어르신들 말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스스로를 글이라는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글을 모르면 부끄러워하고, 글을 많이 읽지 않거나 글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졌습니다. 마치 돈이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든 것처럼 글은 인간을 글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글은 인간에게서 자존심을 훔쳤습니다.

그래픽노블과 만화와 그림책의 시대가 왔습니다. 문자 예술의 시대에서 시각 예술의 시대로 옮아가는 것은 인간성의 회복이며 오감의 정상화입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자연은 진짜 글 없는 그림책입니다. 자연에는 아무런 글도 적혀 있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자연을 읽고, 자연은 우리에게 감동과 영감과 지혜와 지식을 선사합니다.

부디 그림책에서 글만 보지 말고 그림을 보면 좋겠습니다. 그림을 읽는 것은 내 마음대로 보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되찾았다는 뜻입니다. 글 없는 그림책은 마치 자연처럼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선사합니다.

기자명 이루리 (작가∙북극곰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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