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 열사가 죽어간 곳에서 동생은 발길을 돌렸다
  • 광주·정희상 기자
  • 호수 612
  • 승인 2019.06.1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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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최후의 시민군 윤상원 대변인의 동생 윤태원씨를 만났다. 윤상원은 박정희의 폭압에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5·18 당시 끝까지 항쟁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1980년 5월26일 전남도청 2층 외신기자 회견장에서 5·18 광주 시민군 윤상원 대변인이 남긴 말이다. 미국 <볼티모어 선>지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그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회견실 응접탁자 바로 건너편에 앉아 윤상원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은 그의 눈길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이날 밤 최후의 항전에 앞서 윤상원은 도청에 남은 시민들을 향해 “학생과 여성 여러분은 살아 나가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주십시오”라고 말한 뒤 이들을 분리해 내보냈다.
ⓒ시사IN 신선영윤상원 대변인의 동생 윤태원씨(사진)는 광주에서 형과 함께 자취 생활을 했다.
이 시기 노동운동가였던 형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윤상원 대변인은 신군부가 언론과 통신을 일절 차단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간에 <투사회보> 발행인을 맡아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눈과 귀가 되었다.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도청에서 항전하다가 1980년 5월27일 새벽 유혈 진압 작전에 나선 계엄군의 총탄에 복부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도청을 접수한 계엄군은 윤상원의 주검을 신원 확인도 하지 않고 이틀간 방치했다. 5월29일 청소차에 실린 그의 시신은 시립 망월동 묘역에 ‘버려졌다’. 가매장지 앞에는 ‘관 번호 57’이라고 쓰인 푯말만 남았다.

윤상원 열사 39주기를 맞은 올해 동생 윤태원씨도 어느새 초로에 접어들었다. 그는 형과 관련된 인터뷰를 꺼린다. 형의 최후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직도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태원씨는 10년 터울인 큰형 윤상원과 어릴 적 어울릴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형의 생애 마지막 2년은 광주에서 함께 자취 생활을 했다. 이 시기 노동운동가였던 형 윤상원은 동생 태원씨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특히 훗날 윤상원 열사와 영혼결혼식으로 형수님이 된 박기순과의 생전 각별한 추억을 태원씨는 잊을 수 없다. 두 사람은 각각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71학번과 국사교육과 76학번으로, 노동자를 위한 ‘들불야학’에서 함께 일했다. “기순이 누님은 형과 함께 들불야학을 하면서 고등학생이던 나를 종종 불러 유난히 살갑게 챙겨주고 보살펴주었다. 돌아가신 뒤 형수가 되려고 그랬나 보더라.” 1978년 12월26일 새벽, 한밤중까지 야학에서 쓸 난방용 땔감을 구하고 돌아와 쓰러져 잠든 박기순은 22세의 나이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상원이 형이 나에게 ‘기순이가 하늘나라로 갔다’고 하더니 몇 날 며칠을 슬픔에 잠겨 보냈다. 나도 친누나를 잃은 것처럼 큰 충격과 상실감에 휩싸여 지냈다.” 광주 최초의 여성 노동자 인권운동가로 기록된 박기순의 시신이 안치된 전남대병원 앞에는 함박눈이 쏟아졌다. 전북 김제에서 농사를 짓던 가수 김민기는 영안실에 달려와 목 놓아 ‘상록수’를 불렀다.

“효도 한 번만 하고 광주로 오겠다”

윤상원은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마을(현재 광주 광산구 신룡동)의 농촌에서 아버지 윤석동과 어머니 김인숙 사이에 3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농촌 살림이었지만 부모님이 윤상원을 광주에 유학시켜 북성중과 사레지오고교(8회)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1971년 전남대 정외과에 입학한 윤상원은 처음에는 외무고시를 준비하며 평범한 대학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박정희 유신체제의 폭압이 날로 극심해지자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학생운동에 뛰어든다. 특히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됐던 전남대 선배 김상윤 등 학생운동 지도부와 만나 역사·철학에 관한 독서와 사색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효자였던 형님은 진로를 노동운동으로 정한 뒤 늘 부모님을 마음에 걸려했다. 대학 졸업 무렵 마지막 효도라 생각하고 주택은행(현 국민은행) 시험을 쳐서 입사했다.” 1978년 초부터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지점에 근무하던 윤상원은 광주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선후배들에게 “아버님께 효도 한 번만 하고 곧 내려오겠다”라고 약속했다. 때마침 그해 6월27일 전남대학교에서 유신체제에 반대하던 교수들이 성명을 발표한 ‘우리의 교육 지표’ 사건이 터졌다. 이 일로 전남대 교수 11명이 강제 해직당했다. 성명 발표를 주도한 송기숙 교수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이에 반발해 학생들이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시위 학생들은 대거 수배자가 되었다. 수배당한 후배들이 서울로 피신해오자 윤상원은 은신처를 제공하며 돌봤다. 그러다가 은행 입사 6개월여가 지나 “이만하면 됐다”라며 사직서를 내고 고향 광주로 내려갔다.

이후 윤상원은 광주 광천공단의 한남플라스틱 공장에 위장 취업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밤에는 미취학 노동자들을 위해 설립된 들불야학의 교사로서 박기순·김영철·박관현·박효선·박용준·신영일 등의 동지들과 함께했다. 윤상원의 광천동 시민아파트 자취방은 들불야학의 자료실이자 회의실이며 휴식처였고, 야학 교사와 학생들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곳이었다.
ⓒ518기념재단1980년 5월16일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들이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었다.

1980년 5월 들어 전두환 신군부가 민주화 일정을 요구하는 야당과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에 적대감을 드러내며 정권 탈취 음모를 노골화하자 윤상원은 전남대 박관현 총학생회장과 함께 민주화 투쟁에 적극 나섰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처 이후 공수부대가 전남대와 시내에서 만행을 저지르는 광경을 목격한 윤상원은 이를 외면하는 언론에 분노한다. 그는 들불야학 동지들과 역할 분담해 종이와 등사원지, 잉크, 등사기 등을 구입해 직접 시민 소식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5·18 초기 광주 녹두서점은 윤상원과 동지들이 공수부대의 만행 상황 일지를 작성하는 아지트였다. 곧 녹두서점은 공수부대와 전쟁을 치르는 시위대의 상황실로 변했다.

5월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후 시민들이 무장하기 시작하자 공수부대는 도청을 비우고 퇴각했다. 도청에서는 시민군 항쟁 지도부가 꾸려졌다. 들불야학이 있던 광천동 시민아파트 주민들이 자신들 생계 꾸리기도 벅찬 처지에 쌀 3말과 현금 12만원을 도청에 있는 윤상원에게 보내왔다. 전두환 일당을 타도하고 공수부대를 몰아내는 데 써달라는 당부 글과 함께였다. 윤상원은 감격하며 이 자금으로 <투사회보> 발행을 제안한 뒤 발행인을 맡아 제작과 배포를 지휘했다. 태원씨도 한때 형을 도와 <투사회보>를 가가호호 전달했다. “형님은 <투사회보>에 앞으로 광주시민들이 어떤 식으로 전두환 계엄군에 맞서 행동해야 할지 행동수칙을 담았다. 총기를 함부로 시민들한테 사용하지 말고, 도둑질·약탈 등을 금지한다는 등의 문구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 과정에서 5월25일 일부 학생 수습위원이 무기를 반납하고 계엄군에 투항하자고 주장했다. 윤상원은 단호히 반대했다. “수많은 시민이 죽었다.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라는 걸 인정받고, 사망자와 부상자를 피해 보상하고 치료하며, 구속 학생과 시민을 석방하고, 시민장 장례식 허용을 받아내야 한다. 아무 명분 없이 이대로 총을 내려놓을 수는 없다.” 윤상원 측의 이런 주장은 도청 앞 시민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결국 5월25일 ‘투항파’는 빠지고 윤상원을 중심으로 녹두서점 식구들과 들불야학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도청을 접수한 뒤 새로운 항쟁 지도부를 꾸렸다. 위원장 정상용, 부위원장 김종배, 내무 담당 허규정, 상황실장 박남선, 기획실장 김영철, 홍보부장 박효선, 대변인 윤상원 등으로 지도부가 꾸려졌다. 5월25일 밤을 기해 항쟁 지도부는 결사항쟁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5월27일 새벽, 윤상원 최후의 연설

“형의 안부가 걱정돼 5월26일 오후 도청으로 마지막 면회를 갔다. 그런데 하필 이날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고 가서 시민군 경비들이 들여 보내주지 않아 끝내 형 얼굴을 못 보고 돌아서야 했다.” 태원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

5월27일 새벽 2시30분쯤 윤상원 등 지도부는 시민군에게 비상령을 내렸다. 계엄군이 사방에서 옥죄어 들어온다는 상황실 보고 때문이었다. 도청 2층 민원실에서 김영철과 이양현, 윤강옥과 같이 있던 윤상원은 무기고로 내려가 시민군에게 무기를 나눠주고 최후의 연설을 했다. “우리는 광주시민을 살리기 위해 총을 들었습니다. 몇 시간 후 아니 30분 뒤라도 여러분과 저는 이 세상과 영영 이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워 마십시오. 광주시민이 우리를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 죽음이 살아 있는 역사로 기록될 것입니다.”

새벽 4시 헬기의 엄호를 받은 계엄군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며 전남도청으로 진입했다. 2층 민원실로 M16 탄환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창틀에 총을 거치하고 있던 윤상원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고꾸라졌다. 기획실장 김영철이 외쳤다. “상원아.” 윤상원은 피를 흘리며 “저승에서 만나세”라고 말했다. 김영철은 옆에 있는 담요를 펼쳐 그 위에 윤상원을 눕혔다.

들불야학 설립 교장이던 김영철은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가 후배인 윤상원 열사를 바로 곁에서 잃은 뒤 계엄군에게 붙잡혀 상무대로 끌려갔다. 그는 약 6개월간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좌반신 불구가 되었다. 입으로 불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까 두려워 혀를 깨물고 상무대 영창 벽 모서리에 머리를 찧어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정신질환을 앓으며 1년6개월간 투옥됐다가 석방됐다. 그 후로도 19년 동안 정신질환 후유증으로 앓다가 1998년 8월16일 세상을 떠났다.

광주 옛 전남도청으로 기자를 안내한 윤태원씨는 형이 마지막까지 사수하다 산화한 2층 민원실로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정문에서 발걸음을 멈춘 뒤 기자만 다녀오라고 했다. 그는 5·18 왜곡 폄훼 세력이 활개치는 현실을 개탄했다. “39년이 지났어도 학살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으니까 전두환 추종 세력이 지어낸 가짜 뉴스가 판을 친다. 수십만 광주시민이 다 목도하고 분노했던 역사적 사실을 왜곡 폄훼하는 걸 보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하나 참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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