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를 맞이해 노무현재단에서는 ‘새로운 노무현’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5월21일 〈시사IN〉 팟캐스트 ‘시사인싸’가 천호선 노무현재단 이사를 서울 홍대 인근 녹음실로 초대했다. 그는 참여정부에서 참여기획비서관, 정무기획비서관, 의전비서관, 국정상황실장, 대변인, 홍보수석을 역임했다. 현재는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회자 최광기씨, 김은지·이상원 기자와 천호선 노무현재단 이사가 한 시간 동안 나눈 내용을 재구성해 정리했다.

ⓒ연합뉴스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천호선 추진단장이 23일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준비 기자간담회에서 노무현시민센터 건립 추진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참여정부 대변인으로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이유가 있다. 사실 대변인은 임기 말에 10개월밖에 안 했다. 다른 걸 더 많이 했다. 의전비서관은 두 번이나 했다. 대변인을 한 기간이 길지 않았는데 오래 기억되는 건 대변인으로 일할 당시가 ‘취재지원 선진화 방침’ 때문에 언론과의 관계가 굉장히 좋지 않았을 때여서일 거다. 당시 기자들이 라면 박스 위에 촛불 켜놓고 노트북 두드리면서 ‘최고의 언론탄압 국가’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취재지원 선진화가 예고돼 있는 상황에서 대변인을 맡게 되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참여정부가 하도 많이 거두절미 왜곡을 당하니까 그걸 좀 막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생방송을 했다. 오후 2시30분에 지상파 방송사 카메라 다 켜놓고 사전 각본 없이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를 했다. 그걸 퇴임 전전날까지 했다. 노출이 많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샘물교회 사건’이 있었다. 그때 스무 분이 넘게 납치됐기 때문에 청와대에 상황실이 차려졌다. 국방부 장관, 국정원장, 외교부 장관이 매일 회의를 했고 그 상황을 청와대 대변인이 브리핑했다. 모든 언론이 24시간 체제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제 브리핑이 나갔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제가 대변인을 제일 오래 한 것으로 기억하게 된 것 같다. 사실은 윤태영 대변인이 1년씩 두 번을 했다. 그래서 윤 대변인이 굉장히 억울해했다(웃음). 참여정부의 진정한 대변인은 윤태영이고, 저는 그저 노출이 좀 많았을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입 구실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악역을 담당해야 하고 온갖 언론으로부터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는 측면도 있었다. 생중계되는데 ‘모른다’고 할 수 없으니 최대한 공부해 성실한 답변을 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답변을 해도 문제가 되는 질문이 있다. 가령 이런 질문이다. “지금 주식 상황이 안 좋다. 청와대가 대책이 있느냐?” 이런 질문은 정말 곤혹스럽다. 청와대가 일상적으로 주식시장에 개입하지 않는다. 개입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문제다. 어떻게 말해도 그날 오후의 주식 시황이 달라져버리니까. 그런 질문을 하는 기자들이 가끔 있었다. 문제가 되지 않게 그런 질문을 어떻게 피해나갈 것인가 하는 게 간단치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이나 인터뷰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굉장히 많다. 제일 유명한 연설은 독도 연설이다. 또 대선 경선 때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하는 연설도 기억난다. 개인적으로 제일 통쾌했던 연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제목 붙여진 2006년도 민주평통자문회의 연설이다. 민주평통자문회의는 이름 그대로 통일을 위한 시민자문단체다. 보수 진보를 떠나 많은 국민이 참여하고 있다. 그 연설 당시 분위기가 이랬다. 전시작전권을 우리가 환수해오려고 하는데 현역 장성들은 물론이고 예비역 장성 모임 등에서 전시작전권을 가져오면 안 된다고 성명을 발표하던 시절이다. 그걸 보면서 ‘우리가 북한에 비해서 전력이 우위에 선 지 20년이 지났고, 그 격차가 10배가 넘는데, 도대체 나 장관입네, 국방장관입네, 참모총장입네 하면서 뭐 한 거냐. 지금 이 상황에서도 우리가 전시작전권 갖지 못하고 북한과 중국을 어떻게 떳떳하게 대하겠느냐’라는 얘기를 호통치듯이 연설을 하셨다. 원고가 없는 연설이었다. 거의 평상어를 섞어가며 연설하셨는데, 저는 그 연설이 가장 속 시원하고 감동적이었다.
학생운동을 한 이후 학원 강사로 일할 때 노무현 의원이 직접 찾아와 ‘같이 일하자’고 했다던데.
학생운동 하고, 노동운동 하다가 파업 주도해 구속되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수원에서 학원 강사로 일했다. 백수로 살다가 오래간만에 돈을 좀 벌 때였다. 1988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례를 봐주셨다. 그 이후로는 TV에서만 뵙고, 거의 못 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광재씨랑 같이 집 앞에 다 왔다’고 연락이 왔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오셔서 지금 들어간다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두절미하고 “내일부터 나랑 일하세” 이렇게 얘기하시더라.

그때 나는, 어떻게 보면 제도 정치권 내에서 사회개혁을 이끌어가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활약 자체가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와서 제의를 하시니. 그 자리에서 흔쾌히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학원을 정리하고 의원실로 출근했다. 그때 국회의원실 보좌관 정수가 5명이었는데, 노무현 의원실에는 지구당까지 포함해 열몇 명이 일했다. 보좌관 다섯 명 월급을 열몇 명이 나누어 썼다. 그때 받은 월급이, 보좌관에게 공식적으로 나오는 월급의 4분의 1 정도였다. 학원 강사로 벌던 수입의 10분의 1정도로 줄었다. 월급이 갑자기 10분의 1로 준다는 건 삶이 참 암담해지는 거거든요(웃음).

그런데 제가 초야에 묻힌 대단한 현인도 아니고 능력자도 아닌데, 좋게 보시고 같이 일하자고 수원까지 와주셨다. 그때는 별 감사하단 생각을 안 했는데 지금 보면 특별한 배려였던 것 같다. 그런 배려만큼이나 제가 기여했나,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을 요즘 한다.

ⓒ연합뉴스27일 오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대통령 묘역 인근 문화생태공원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탄생 70주년 봉하 음악회에서 노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왼쪽)와 유시민 전 장관(가운데), 천호선 전 정의당 대표(오른쪽) 등이 박수를 치고 있다.

서거 10년을 맞아 노무현재단에서 ‘새로운 노무현’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는데, 어떤 의미인가?


윤태영 대변인이 작명했다. 굳이 공식적인 해석은 없다. 직관적으로 알 수도 있고, 해석이 다양할 수도 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노무현을 다시 새로 보자’는 의미가 있다.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정쟁의 소재이자 공격의 대상이었나. 우리 입장에선 그것을 방어하거나 왜곡을 바로잡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그렇다. 그런 점을 바로잡아야 되겠다. 또 보수나 진보 양측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뜻은 좋았으나 결국 실패한 대통령 아니냐’는 생각을 많이 한다. 저는 성공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실패한 건 아니다. 그런 점도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0년 동안 추모 중심이고, 방어와 바로잡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노무현 대통령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객관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자는 거다. 저는 ‘새로운 노무현’을 그런 뜻으로 받아들인다.
또 50년 뒤에, 100년 뒤에 노무현은 어떻게 기억될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바른 이해, 기록, 기억, 평가를 남길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통합은 어떤 것이었나?


통합 하면, “통합? 에이~ 뭐 싸움꾼이었지”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일생 중에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는 기간이 있다. 3당 합당 이후 꼬마민주당을 창당한 때부터 김대중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기 전까지. 노무현 대통령은 사실 제3의 길을 걸으려고 했다. YS·DJ·JP로 상징되는 지역 구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DJ를 굉장히 존경하지만 갈등도 있었다. 지역주의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다만 그에 앞서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하고 민주당 이름으로 부산에서 출마했다. 그런 긴장 관계가 항상 있었다.

언론과의 관계에서도 맨날 싸움만 했다고 하는데 ‘건전 기사 수용제도’라는 것도 있었다. 언론의 비판 중에서 일리 있는 것, 정부가 받아들여야 될 것, 왜곡된 것, 설명이 필요한 것을 구별해 대응했다. 전자는 시행령, 법 개정, 정책에 반영되었고, 그 결과를 일일이 공개했다. 그런 건수가 훨씬 많다. 무조건 싸운다가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에도 나온다. ‘민주주의는 인권 존중의 사상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투쟁을 통해서 분열을 통해서 통합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통합의 기술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라고 본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생각을 일관되게 갖고 국정도 운영하고 정치를 했던 분이다.

참여정부 평가포럼 연설은 3시간 반짜리 연설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철학, 정치철학이 다 담겨 있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는 말씀도 거기서 나온다. 길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을 이해하시려면 꼭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연설이다. 추천하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사회 비주류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 영화 〈노무현과 바보들〉이 나왔다. 거기에 보면 돌아가시기 전인 4월쯤에 녹취된 내레이션이 나온다. 봉하 사저에서 한 말씀이다. 봉하마을이 봉화산 아래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봉하에 조그만 산이 있다. “저 산은 산맥이 없어. 나는 산맥이 없어.” 이런 자기고백적인 말씀이 나온다. 1997년 이전 기준으로 민주당은 야당에 비주류였다. 야당에서도 호남 출신의 정통 엘리트가 있다. 영남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에서도 비주류였다. 또 운동권 출신 중에서도 주류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서, 야당 민주당에서, 재야운동에서도 주류가 아니었다. 3중의 비주류였다. 그런 외로움이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삶을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 출간된 〈노무현 전집〉 중 연보 편에 천호선 대변인이 서문을 썼다. 잠시 그 글을 읽어보겠다. “가신 지 10년이 됐습니다. 100년 뒤에 노무현은 어떻게 기억될까요? 10년을 돌아보며 100년을 준비합니다. 바르게 기록하고 바르게 이어가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어 그분의 삶이 온통 우리 모두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노무현은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런 글을 썼는지 궁금하다.

제가 노무현재단 이사, 노무현시민학교 교장, 노무현시민센터 건립추진단장을 맡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한다. 100년쯤 뒤에 노무현 대통령은 어떻게 기억될까. 그런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몇몇 떠올린 인물이 있다. 그중 하나가 광해다. 왕으로 대접을 못 받았다. 그런데 광해는 중립외교, 대동법을 통한 개혁에 나선다. 사대부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 왕으로 불리지 못한다. 백성을 위한 개혁 그것 때문에, 사대주의에 빠져 있고 자신의 땅만큼 세금 내기 싫어하는 사대부들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은 왕이 되지 못한…. 이제 광해에 대한 생각이 바로잡히는 것 같다. 광해에 대한 대중적 복권이 이루어졌구나 싶다. 또 하나 떠올린 게 링컨 대통령이다. 링컨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유사한 점이 굉장히 많다. 일단 변호사이고, 그다음이 서민 출신이고, 별건 아니지만 둘 다 16대 대통령이다.

ⓒ연합뉴스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이 7일 선관위 결정에 대한 청와대 공식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평가포럼 강연에 대해 중앙선관위가 선거법상 공무원 중립의무 조항을 위반한 것으로 결정한 것과 관련, "매우 유감스럽고 납득하기도 어렵다"며 "법적 문제를 면밀하게 검토해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 다 당시에는 저평가받았다. 링컨 대통령도 100년쯤 지나서야 제대로 된 해석이 이루어졌다, 정치적 복권이 이뤄졌다고 한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으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도 당시 언론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지금은 그 짧은 연설이 민주주의의 교범처럼 되었다. 그걸 보면서 우리가 잘하면 노무현 대통령도 100년쯤 뒤에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다 잘한 건 아니다. 성과도 있고, 실패도 있다. 때론 성과는 못 냈지만 방향을 제대로 잡아놓은 것도 있다.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살펴 ‘노무현을 새롭고 더 넓게 보자’는 생각이다. 그런 노력을 지금 해두어야 나중에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데, 노무현시민학교는 어떤 곳인지?


간단히 말하면 민주시민 교육을 하는 곳이다. 민주주의 교육을 하고 여러 가지 문화 교양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더 나아가 사회적 실천을 함께 도모하는 것을 뒷받침해드리는 역할도 하려고 한다. 중요한 사업 중 하나가 리더십학교다. 고위과정, 청년과정으로 나눈다. 10주, 26주 과정으로 리더십 훈련과 교육을 한다. 실천을 함께 모색하며 ‘작은 노무현’ 또는 젊은 민주주의자들을 육성하려 한다. 민주주의가 지식만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민주주의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시민의 민주주의 역량을 키우는 연습. 그런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그걸 담을 공간으로 노무현시민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다.

천호선 교장에게 ‘노무현’이란?


그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는데, 한마디로 얘기하기가 어렵다. 그분이 없었다면 오늘의 제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기억하는 노무현 대통령은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너무나 뜨거울 정도로 정의로운 분이었다.

※ 더 자세한 내용은 유튜브, 팟빵·팟티·아이튠스 팟캐스트에서 ‘시사인싸’를 검색하면 들을 수 있습니다(14회).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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