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도 없어야 했던 곳
  • 장일호 기자
  • 호수 611
  • 승인 2019.06.0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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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라면 무엇이든 읽는 아이였다. 식당 문밖에서 하릴없이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전봇대에 나붙은 전단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숙식 제공. 100만원. ‘아가씨’ 같은 글자가 또렷했다. 흘깃 뒤를 돌아보니 엄마가 밀린 월급 30만원을 받기 위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하굣길마다 신발주머니를 빙글빙글 돌리며 언제쯤 아가씨가 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동네에는 저녁 6시가 넘어서는 갈 수 없는 골목이 있었다. 그곳이 ‘신길동 텍사스촌’으로 불렸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텍사스촌은 1997년 10월29일 강제 폐쇄되었다. 나는 그 텍사스촌에서 육교 하나를 건너면 있는 골목의 여러 집을 2~3년마다 옮겨 다니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쳤다. “여느 때 같으면 호객행위를 하는 앳된 10대 소녀들과 취객들로 붐비던 곳이지만 모두 자취를 감췄습니다.” 기억이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해 옛날 기사를 찾아봤다. 언제쯤 아가씨가 될 수 있을까 골몰하던 10대와 이미 아가씨였던 10대가 고작 육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내가 가진 손톱만큼의 운은 거기까지 닿지 않았다.


<청량리:체계적 망각, 기억으로 연결한 역사>는 “남성들의 욕망과 돈이 거래되던 공간을 여성주의 시각으로 기록”한 책이다. ‘청량리 588’에 대한 기록이지만 이른바 ‘집결지’가 있었던 어디에서든 일상적으로 벌어진 착취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성매매 여성이라는 낙인은 고스란히 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어졌다. ‘기생관광’을 주도했던 국가는 재개발을 명목으로 ‘청소’에 앞장선다. 이 모든 이야기는 청량리‘들’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있어도 없는 곳이고 싶어 했고, 없는 척 여겼고, 없어지기를 바라던 공간(181쪽)”에 존재했던 당사자들의 목소리야말로 잊지 말아야 할 현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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