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대학은 자연과학과 공학 단과대학만 있는 학교였다. 재학생 다수가 연구직을 고려해 대학원에 진학하고, 교양수업에서도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주제를 흔히 다뤘다. 로봇, 실험동물, 키메라, 인공지능, 그리고 무인 자동차와 지구환경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은 주로 ‘기술문명의 설계자로서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어떻게 사유하고 책임질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마주했다.

그날 강의도 그랬다. 과학기술에 의해 탄생할 새로운 인간, ‘포스트휴먼’이 주제였다. 기계와 결합한 인간의 예시 자료로 인공 귀와 제3의 팔을 단 행위예술가, 절단된 다리에 인공 보철물을 장착하고 트랙을 달리는 장애인들이 화면에 떴다. 강의에 따르면 기술문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일종의 포스트휴먼이지만, 기계 다리를 장착한 사이보그들의 충격적인 이미지에 비하면 강의실에 앉은 학생들은 다들 지나치게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발제가 끝나고 여느 때처럼 학생들의 토의가 시작되었다. 기술은 인간의 신체를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가? 기계로 인간을 대체하기 시작한다면, 어디까지 그것을 허용해야 할까? 기계와 인간이 결합될 때 인간성은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 완전히 기계가 된 인간은 여전히 인간일까? 그런데 그 대화가 오가는 자리에서 나는 어떤 분명한 위화감을 느꼈다. 강의실에 있던 모두가 화면 너머, 저 먼 곳, 이 공간 밖의 사이보그를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이보그를 알고 있었다. 머리카락으로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보청기를 끼고, 뒷자리 학생들의 입 모양을 보기 위해 어깨가 아플 정도로 고개를 돌린 한 사람을.
 

ⓒ한성원

나는 남의 말 하듯 토의에 끼어들 수도 있었다. 그러게요, 사이보그는 여전히 인간일까요? 하고 물을 수도 있었다. 나와 내가 아는 장애인들의, 불완전한 기계에 신체와 감각을 의존해 살아가는 장애인 사이보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이보그는 여전히 인간인가?”라고 거리낌 없이 물을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의 신체를 굳이 기계로 대체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정상성을 가진 이들의 사유 대상이었다. 내가 사이보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척 말을 하거나, 사이보그 당사자로서 말을 하거나, 어느 쪽이든 그 자리에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날의 경험 이후 나는 기술이 장애를 다루는 미묘한 태도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기술은 정상성의 이미지를 손에 쥐고 인간의 질병, 고통, 장애, 노화를 정복하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사람들은 기술을 만드는 주체를 생각할 때 병상에 누운 노인을, 양팔을 쓸 수 없는 장애인을 생각하지 않는다. 결핍된 존재들은 기술이 베풀 축복의 다음 차례를 기다릴 뿐이다. 목적지를 ‘장애 정복’으로 설정하고 나아가는 기술의 최전선에는 정작 장애인 당사자들이 없다. 기술이 약속하는 극적인 회복이 정말로 인간을 장애로부터 해방할지 알기 위해서는, 장애인 사이보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런 의구심이 생겼다.

“여신이 되기보다 사이보그가 되겠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인간의 신체적·정신적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이다. 1998년 설립된 세계 트랜스휴머니스트 협회는 ‘트랜스휴머니즘 선언’에서 기술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는데, 이는 인간이 기술을 통해 노화와 고통을 극복하고 근본적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포함한다. 기술을 통해 장애를 극복하는 사례들은 그 선언에 힘을 실어준다. 첨단 생체공학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보통 인간보다도 빠르게 달리는 사이보그들은 훌륭한 트랜스휴먼의 상징이다.

한편 미국의 과학기술 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트랜스휴머니스트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사이보그를 바라본다. 그는 ‘사이보그 선언’에서 “여신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사이보그가 되겠다”라며 사이보그를 기계와 유기체, 여성과 남성, 동물과 인간이라는 공고한 이분법을 해체하는 정치적 상징으로 제시했다. 해러웨이의 선언문에서 사이보그는 다양한 경계를 넘나드는 주체이고, 백인-이성애-남성으로 규정되는 정상성을 무너뜨리며 모든 배제되는 타자들을 대변한다.
 

ⓒ피치마켓 제공‘피치마켓’은 발달장애인들을 위해 ‘느린 학습자용’ 도서를 제작한다.

어쩌면 장애인 사이보그는 트랜스휴먼의 상징이 될 수도, 정상성을 해체하는 정치적 상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의 선언에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도 해러웨이도 내게서 너무 멀리 있었다. 생체공학의 놀라운 혜택을 받고 거리를 활보하는 장애인을 나는 아직 직접 본 적이 없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더 나은 기술을 기다리는 방법뿐일까.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은 나에게 해방감을 준다는 점에서는 반갑지만, 동시에 그 상징으로서의 사이보그는 막연하고 아득하다. 나 자신을 정상성을 해체하는 사이보그로 선언하는 것은 어떤 자긍심을 심어줄 수는 있어도 현실의 문제 앞에서 길을 열어주지는 않는다. 불완전한 보청기를 착용한 청각장애인인 나는 이 현실을 불완전한 사이보그로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나는 이분법을 해체하는 존재일까. 아니면 이분법의 한 구획으로 내몰리며, 기술의 수혜자로서 대상화되는 존재일 뿐일까.

기술은 분명 나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었다. 그것은 트랜스휴머니즘이 말하는 기술과는 다르다. 나에게 자유를 부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첨단 기술을 적용한 보청기가 아니라 카카오톡의 보편화였고, 휠체어 사용자들이 지하철을 탈 수 있게 한 것은 첨단 의족이 아닌 엘리베이터 설치 확대였다. 어쩌면 기술이 장애를 극복해야 할 난관으로만 상정할 때, 우리는 더 가까이 있는 변화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지도 모른다.

장애 여성의 재생산권을 주제로 영국에 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다. 장애인 부모들을 돕는 의료기관과 장애 당사자 모임을 주로 인터뷰했는데, 그중 영국의 체인지피플(CHANGE People)이라는 단체가 기억에 남는다. 체인지피플은 발달장애인들과 활동가들이 모인 단체로, 발달장애인을 위한 임신·출산·육아 출판물을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장애인 아이를 둔 부모를 위한 책이 아니다. 발달장애인이 직접 아이를 임신하고 키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쉬운 자료를 만드는 일이다.

짧고 쉬운 문장과 명료성 높은 일러스트를 사용한 ‘이해하기 쉬운’ 출판물을 해외에서는 흔히 ‘이지리드(Easy Read)’ 책자라고 부른다. 현재 한국에서도 2015년에 설립된 ‘피치마켓’이 ‘느린 학습자용’ 도서를 제작하고 있다. 발달장애인들을 더 잘 이해하도록 교육하는 대신 일상의 정보를 쉽게 전환하여 제공한다는 관점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발달장애와 관련해 최근 개발 중인 기술이 있는지 찾아보니 로봇과 모바일 앱을 이용한 교육이 연구 중에 있다는 기사가 상단에 뜬다. 그런데 이런 교육이 모든 발달장애인에게 도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일상의 정보들을 이해하기 쉬운 정보로 전환하는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를 전환하는 기술은 지금도 있다. 시각장애인이 텍스트나 그림, 카메라로 인식한 주위 환경을 소리로 듣거나 청각장애인이 말소리를 글자로 볼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몇 년 전 유튜브에 ‘자동자막’ 버튼이 뜨기 시작했을 때 혹시 이제 한국어 콘텐츠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을까 기대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자동자막이 아직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쉽지만, 딥러닝 기술은 나날이 나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실생활에서 쓰기 어려웠던 음성-문자 전환(Speech to Text·STT) 프로그램들이 개선된 형태로 출시되고 있다.

나에게 “잘 들으라”고 말하지 않는 기술

인공지능 문자 통역 ‘소보로’는 2018년 국내에서 출시된 서비스이다. 마이크로 수신한 발화자의 음성을 PC 혹은 태블릿에 자막으로 출력한다. 청각장애인의 사회참여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 이 프로그램을 나는 시험 삼아 두 번의 행사에서 써보았다. 한 번은 양자역학과 SF에 관한 토크였고, 다음번은 도나 해러웨이의 저서와 SF를 함께 읽는 워크숍에서였다. 인공지능에게도 아직 양자역학은 어려운 것인지 전문 과학용어는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전체적인 대화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의 발전을 더욱 기대하게 했다.

앞서 소개한 ‘이지리드’ 출판물은 간단한 교육 프로그램을 수반하는 경우도 있지만, 인간의 개선 자체보다는 정보를 쉬운 정보로 바꾸는 데에 초점을 둔다. 마찬가지로 음성-문자 전환 기술은 나에게 “잘 들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잘 듣고 귀 기울이는 것은 기계의 몫이다. 기계는 그것이 들은 소리를 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의 정보로 전환하여 전달해준다. 보청기나 인공와우와는 근본적으로 접근법이 다르다. 청각 보조기기는 결국 내가 ‘잘 듣는’ 것이 목적이기에 재활을 요구한다. 변해야 하는 것이 인간인가 외부 환경인가의 차이가 있다. 음성-문자 전환 기술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해도, 나는 대신 더 잘 들어줄 기계 쪽에 기대를 걸게 된다.

향상을 위한 기술은 개개인에게 따라잡기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기계가 아무리 완벽해도 유기물로 이루어진 인간은 기계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기술과 인간이 융합되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이미 현실의 많은 장애인들이 보조기기 적응에 실패하는 것만 보아도 예상 가능하다. 기술이 요구하는 교육수준은 ‘디지털 문맹’들을 문명의 그림자로 밀어낸다. 트랜스휴머니즘이 약속하는 미래는 매끈한 사이보그들이 네온사인이 빛나는 도시를 내달리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화려한 도시 한쪽의 좁은 방에 갇혀 있을, 기계에 적응하지 못한 사이보그들을 생각한다.

나는 실패한 사이보그들도 거리를 활보하는 사회를 원한다. 향상되지 못한 인간들도 저마다의 신체와 감각으로 세계를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미래를 원한다. 그 불완전한 인간들은 제 방식대로 기계와 결합되어 있어 어설프고 서투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러웨이의 말대로 사이보그가 기계와 유기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을 해체할 힘을 가진다면, 그 선두에 설 사이보그는 분명히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는 괴기스럽고 이상한 모습을 한, 엉터리 사이보그에 더 가까울 것이다.

기자명 김초엽 (SF 작가·〈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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