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쉬는 시간이면 차 안에 있었다. 점심시간에도 차 안에 머물렀다. 좌석을 젖혀놓고 책을 읽거나 교정 한가운데 있는 300년도 넘은 은행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했다. 그의 동선이 눈에 들어온 건 고등학교 2학년 5월 이맘때였다.

사립재단에 속한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알 수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으나 어떤 상황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고 차 안에 홀로 있는 모습도 점점 잦았다. 2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선생님은 학교를 떠났다. 하루아침에 윤리 선생님이 바뀌었지만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윤현지


도마 두 개를 샀다. 원래는 하나만 구입하려다가 다가오는 스승의 날에 생각나는 선생님이 있어서 하나를 더 샀다.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쳐주시고 교지 만들 때 지도해주신 분이다.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도마는 경북 성주 소성리 평화장터에서 구입했다. 성주는 800일 넘게 사드 반대를 외치며 촛불을 들었던 곳이다. 사드가 한반도에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던 언론도 여론도 차갑게 식었지만, 성주에서는 여전히 평화를 지키려 애쓰는 사람들의 촛불이 오늘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도마와 함께 짧은 편지글을 써서 선생님께 보내려고 했는데 주소가 없었다. ‘분명히 어디에 적어놨는데….’ 동창에게 물어봤지만 허사였다. 예전 구속 당시 선생님이 보내주신 편지를 찾아 겨우 주소를 알아냈다. 매번 문자로만 안부를 물어와서 그런지 손 글씨가 영 어색했다.

고등학교 때 교지를 만들었지만 주로 원고 청탁을 하거나 인터뷰하는 자리에 함께 나가는 정도였다.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는 상황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어색함보다는 재미가 더 컸다. 시내에 있는 전교조 사무실을 알게 된 것도 교지를 만들면서부터다. 처음 가본 전교조 사무실은 생경했다. 아니 조금 무서웠다. ‘참교육’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말도 각종 버튼과 손수건도 신기했다. 그제야 우리 학교에도 전교조 선생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교지를 만들면서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사립재단은 말 그대로 가족이 운영했다. 이사장의 아들이 행정 업무를 맡았고 친인척이 학교 행정에 많이 포진해 있었다. 학교를 떠난 윤리 선생님이 전교조 소속이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쉬는 시간에 차 안에만 머물러 있던 속사정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노동조합 일을 하면서 깨달았다. 선생님은 동료들과 일부러 어울리지 않은 게 아니라 사실은 격리되었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을.

5월28일은 전교조 결성 30주년

5월28일은 전교조 결성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아직도 전교조는 법외노조다. 박근혜 정부에서 팩스 한 통의 통보로 이뤄진 일이다. 해직 교사 9명이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노동조합을 부정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제 겨우 노동권에 대한 교육이 간헐적으로 이뤄지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전교조의 역할은 더 커져야 한다. 유럽의 경우 노동권, 노동조합의 의미, 기능, 노동조합 결성과 운영에 대한 교육을 꽤 많이 한다고 알려졌다. 전교조의 재합법화가 그 새로운 길의 연장이길 희망한다.

서른 살이 된 전교조를 진영 논리에 가둬 이득 보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 이득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은 또 누구인가.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전교조 선생님들의 노력과 저항과 투쟁으로 교육 현장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앞으로 더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아직도 법외노조라는 오명을 씌우고 법적 지위의 박탈을 용인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쉬는 시간마다 홀로 차 안에 앉아 있던 선생님, 나에게 전교조에 대해 알려준 선생님. 두 사람 모두 비록 지금은 교사가 아니지만, 전교조 재합법화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을 것이다.

기자명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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