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는 자를란트를 점령했다. 원래 프랑스의 의도는 자를란트를 하나의 독립국으로 만들어 서유럽연합(WEU)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주민투표를 통해 자를란트는 결국 다시 서독에 합병되지만,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제1외국어로 지정한다. 이런 식으로 종전 직후 서독 일부 지방을 인접국이 다스렸다가 넘어간 사례가 또 있다. 베네룩스 3국(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도 서독의 일부를 점령해서 다스렸는데, 네덜란드가 대표적이다.네덜란드, 14년간 독일 엘텐 지역 점령
네덜란드도 한때 거대 제국이었다. 그에 대한 향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왕의 의지가 컸다. 여왕은 독일 침공을 직접 추진했다. 연합국은 네덜란드의 움직임에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냉전 상황에서 소련에 맞서기 위해, 그리고 서유럽에서 독일 난민을 더 만들지 않기 위해 네덜란드는 당초 점령 계획보다 매우 줄어든 엘텐 지역 정도만 차지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 본토에 사는 사람들은 이 지역에 호기심을 보였다.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도 유럽 식민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본토에서 관광객이 찾아왔고, 덕분에 엘텐 지역의 경제가 살아났다. 때맞춰 네덜란드 정부는 점포 영업시간도 자유로이 풀어줬다. 점령한 바로 그 주말부터 독일로 통근하는 사람들에게 국경통과증을 나눠주는 등 독일 내 점령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뤘다.
독일 처지에서는 연방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한 방 당한 격이어서, 콘라트 아데나워 정부는 계속 네덜란드와 협상을 진행했다. 그 결과 2억8000만 도이체마르크를 지불하고 다시 점령 지방을 돌려받기로 한다. 1963년 5월, 엘텐 지역은 다시 독일로 귀속된다. 조건이 있었다. 독일 깃발을 게양한다든가 국가를 튼다든가, 군경의 행진이나 연설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독일도 막히지는 않았다. 이왕 경기가 살아나고 거래가 활발했던 엘텐의 네덜란드 제품들(특히 커피, 차, 브랜디)을 무관세화했다. 물론 네덜란드가 점령했던 지역 중 서독에 끝까지 반환되지 않은 지역도 있다. 다위벨스베르크라는 숲이다. 마리누스 판 데르 후스 판 나터르스라는 이름의 네덜란드 유럽의회 의원이 끝까지 버텼다. 주 네덜란드 독일 대사와의 일화가 재밌다. “친애하는 판 데르 후스 씨, 다위벨스베르크에 독일인 3000명이 살고 있다는데 말입니다.” 그러자 이 의원은 이렇게 주장하며 네덜란드 땅을 지켜냈다. “대사님, 독일 지도가 잘못된 겁니다. 세 가구 살고 있어요. 순찰대에 물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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