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의 거룩한 배 수많은 중생 살렸나니
  • 김형민(SBS CNBC PD)
  • 호수 610
  • 승인 2019.05.3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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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을축년 대홍수는 20세기 최악의 홍수였다. 사망자 647명에
이재민 수십만명이 발생했다. 당시 봉은사 주지 청호 선사는 잠실과
부리도 등에 고립되어 죽음 앞에 놓인 주민 708명의 목숨을 구했다.
1925년 식민지 조선을 강타한 을축년 대홍수는 가히 20세기 최악의 대홍수로 기억되고 있어. 을축년 대홍수의 시작은 장마철의 끝물인 7월 초였단다. 장마철 빗줄기가 아직 거센 터에 태풍이 휘몰아쳐왔고 1차 물난리가 났어. “1차 홍수는 400㎜에 가까운 집중호우가 내려 한강 이남의 낙동강, 금강, 만경강 유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2차 홍수는 약 650㎜에 달하는 집중호우가 내려 한강 수위가 12.74m에 달하는 사상 최고의 기록을 남겼으며 한강 유역의 영등포·용산·뚝섬·마포·신설동 등지가 침수되었다(국가기록원).” 이후 8월에는 청천강과 압록강 일대에 집중호우가 쏟아졌고 또 한 차례 태풍이 영호남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마치 ‘한강만 강이냐 압록강도 강이다, 압록강만 강이냐 청천강도 강이다’라는 듯 전국의 강이 범람해버렸어.

이때 전국을 폭격한 집중호우의 강수량은 700~970㎜. 피해액은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1억300만원에 달했어. 사망자만 647명, 유실된 집이 수만 채, 이재민도 수십만명에 이르렀지.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은 괴멸적 타격을 입었어. 한강 인도교가 떠내려갔고, 용산에 있던 철도청 관사에도 물이 들어찼으며, 한강에서 한참 먼 남대문까지 홍수의 끝자락이 닿을 정도였으니까.
ⓒ서울시시사편찬위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물에 잠긴 서울 용산 일대 모습.
당시 서울 절반이 물에 잠겼다.

을축년 대홍수는 서울 인근을 초토화했을 뿐 아니라 서울의 인심과 문화를 뒤바꿔버렸어. 하나 예를 들어볼까. 현재 마포구 망원동 강변북로 옆에 서 있는 정자 ‘망원정’은 예로부터 내려온 망원정이 아니야. 을축년의 대홍수로 넘실대는 흙탕물이 원래 있던 망원정을 통째로 쓸고 가버렸기 때문이지. 태종 이방원의 아들인 효령대군의 정자였고 연산군 시절에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올라설 수 있도록 확장했다는 흥청망청의 전설 망원정이 쓸려간 거야. 그보다 더 안된 것은 당장 집을 잃어버린 망원동 사람들이었어. 그들이 피난한 곳이 오늘날의 합정동이었어. 그런데 문제가 좀 있었지.

망원동 사람들은 대대로 자신들을 뼈대 있는 양반이라 여겼고 합정동 사람들을 깔보아왔다고 해. 합정동이라는 게 합정(蛤井)이라는 우물에서 온 이름인데 인근 절두산에서 순교한 가톨릭 신도들의 목을 친 망나니들이 그 우물에서 칼을 씻었다고 하는구나. 으리으리한 주상복합 아파트와 맛집들, 트렌디한 커피숍이 즐비한 요즘 합정과는 영 딴판이었던 거지. 물난리 때문에 망원동에서 합정동으로 옮겨온 전통의 양반들은 꽤나 떨떠름했나 봐. 1927년 총독부에 “상놈을 구장으로 모실 수 없으니 바꿔달라”고 민원을 냈으니까.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만 뒤섞인 게 아니었다. 을축년 대홍수는 서울의 지형을 새로 그렸지. 한강 서쪽의 절경으로 우뚝 솟았던 선유봉은 홍수 이후 납작해진다. 지하철 9호선 선유도역 알지? 대홍수에 단단히 혼이 난 일제 총독부는 선유봉을 폭파시켜 그 골재로 한강둑을 쌓는 데에 이용했고 선유봉은 양화대교 아래 야트막한 섬, 선유도로 변한 거야. 그뿐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잠실은 원래 한강 북쪽인 자양동에 가까워 걸어서도 건널 수 있는 섬이었어.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한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잠실은 강남이 된다. 그야말로 역사를 바꾼 대홍수 아니겠니.

대홍수로 드러난 수천 년 전의 역사

1925년 7월16일부터 18일까지 사흘 동안 650㎜에 달하는 물폭탄을 맞은 경성 사람들은 노아의 홍수 이상의 공포를 느껴야 했지. 집이 떠내려가고 강산을 뒤바꾸는 홍수 앞에서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다고 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부르짖다가 죽어갔지. 오늘날 삼성역 근처 강남 한복판에 있는 절 ‘봉은사’는 당시만 해도 행정구역상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이었어. 봉은사 주변에서도 비슷한 아비규환이 펼쳐졌단다. 당시 송파 근처를 흐르는 한강에는 잠실, 부리도, 무동도라는 세 섬이 있었는데 부리도(浮里島)는 글자 그대로 한강에 떠다니는 섬이라는 뜻이었어. ‘메기가 하품을 하거나 개미가 침만 뱉어도’ 홍수가 난다는 곳이었지. 그러니 을축년 대홍수가 어떤 의미였겠니.
ⓒ봉은사 제공불자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칭송한 청호 스님.

온 마을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갈 상황이 됐다. 차올라오는 물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붙잡고 울부짖었다고 해. “살려주시오!” 그때 한 스님이 혜성같이 나타난다. 봉은사 주지 청호 선사였어. 성이 나씨여서 나청호 선사라 불린 스님은 몸값이 금값이 돼버린 뱃사람들과 흥정 아닌 흥정을 벌이며 악을 썼단다. “사람 좀 살리시오. 얼마면 되겠소. 부리도 사람들 좀 살려주시오. 원하는 건 다 주겠소!” 사람 좀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스님 앞에서 배 세 척이 움직였다. 부리도가 물에 잠기기 직전이었지. 다 죽었구나 엉엉 울던 부리도 주민들 앞에 나타난 배 세 척은 가히 옥황상제의 천병들 같았을 거야. 무려 140명이 목숨을 건졌지.

인근의 잠실은 부리도와 비교가 안 될 만큼 넓고 인구도 많은 섬이었어. 잠실에서도 수백명이 아우성을 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청호 스님은 흥정을 포기한다. 아니 더 큰 ‘흥정’을 했다는 표현이 맞겠구나. 배를 빌리는 게 아니라 절의 재산을 털어 배를 사버린 거야. “7월18일에는 목선 두 척을 사서 잠실리 주민 228인을 구하는 등 현재 봉은사에 수용된 자만 404명이라더라(<동아일보> 1925년 7월23일).”

송파구 잠실 5단지 근처 언덕에는 원래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을축년 대홍수 당시 주민 수백명이 이 느티나무의 나뭇가지를 붙잡고 물살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고 해. 거센 물살에 뱃사람도 접근을 두려워했지만 청호 스님은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을 모두 배에 태운 순간 나무 한 그루는 뿌리째 뽑혀 강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지. 나머지 한 그루는 수십 년 뒤까지 건재하다가 한강 개발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는구나. 이렇게 청호 스님은 죽음이 넘쳐나던 한강변에서 무려 708명의 목숨을 구한다.

그의 헌신적인 인명 구조 활동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스님의 노력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봉은사에 공덕비를 세웠지. “을축년 7월 홍수로 선리·부리·잠실의 뽕나무밭이 큰물에 잠기고 708인이 다급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목숨을 구해달라 외쳤다. 나청호 대선사가 자비로움으로 이를 구제하니 그 덕을 잊을 수가 없구나(강남구 향토문화전자대전).” 또 정인보·이상재·오세창 등 저명한 인사들이 <불괴비첩>을 발간해 나청호 스님의 선행을 기리기도 했지. 기독교인이던 이상재의 찬사는 이랬다. “반야의 거룩한 배 가는 곳마다 중생들 다 같이 살아나네.”

을축년 대홍수는 수천 년 감춰져온 역사의 일단을 끌어내기도 했단다. 이 홍수로 인해 암사동에서는 1만 년 전의 주거지가 모습을 드러냈고, 백제의 옛 도읍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도 수천 년의 비밀을 걷고 우리 앞에 나타났으니까. 1만 년 전의 조상들도, 2000년 전의 백제인들도 물난리를 겪었을 거야. 그들은 서로 의지하며 재해를 견뎌냈을 것이고 청호 스님같이 위기에 처한 생명을 구하려 애썼겠지. 재난 앞에 무력하지만 재난을 이겨내면서 더 위대해지는 인간의 역사를 일구어갔을 거야. 절박한 위협에도 희망의 꼬리가 달리고, 막막한 비극 속에서도 새로움의 움은 트는 법이란다. 그게 아빠가 네게 항상 들려주고 싶고, 또 들려주고 있는 인간의 역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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