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어떤 정당이든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는 체제다. 정치학에서는 ‘민주주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의 기준 중 하나로 평화적이고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꼽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집권 세력이 선거 결과에 승복하고 평화롭게 정권이 이양되는 과정을 두 번 이상 거칠 때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간주한다. 이 과정을 통해 국민은 집권 정당과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 있고, 정당은 국민의 지지를 놓고 경쟁하게 된다. 한국은 1997년과 2008년 두 번의 테스트를 통과했고, 2017년 세 번째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박정희와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은 한국 정치사를 양분하는 보수 정권과 민주 정권의 ‘아이콘’이다. 정권교체의 주요 장면마다 두 대통령의 빛과 그림자가 소환된다. 〈시사IN〉은 2007년부터 신뢰도 조사를 통해 역대 대통령의 신뢰도를 점검했다(2008년과 2011년은 조사 없음). 눈에 보이는 영향력보다 중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다. 영향력과 신뢰도는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보수 정당 집권 시기를 거치는 동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는 꾸준히 상승해 2012년에는 조사 이래 처음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를 오차범위 내 차이(0.8%포인트)로 따돌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딸인 박근혜 대통령 집권 초기에 다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를 앞서갔지만, 이전과 달리 압도적 신뢰도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박근혜 게이트’가 시작된 2016년 20%대로 주저앉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는 박근혜 정권의 실정과 함께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이후 실시된 2018년 신뢰도 조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21.1%)는 노무현 전 대통령 신뢰도(42%)의 절반이었다. 집권 세력에 대한 기대나 불만이 두 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전직 대통령의 신뢰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두 대통령의 신뢰도 추이로 정권교체 여부까지 예측해볼 수 있는 셈이다.

30대의 극적인 변화

〈시사IN〉이 신뢰도 조사를 처음 시작했던 2007년으로 돌아가보자. ‘박정희 신화’는 마치 철옹성 같았다. 당시 응답자의 절반 이상(52.7%)은 전·현직 대통령 가운데 가장 신뢰하는 인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았다. 호남과 20대, 학생 계층을 제외한 모든 지역과 연령, 직업군에서 모두 압도적인 신뢰를 보냈다. 박 전 대통령은 전 세대를 아우르는 ‘산업화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며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로, 청년에게는 경제성장에 대한 ‘신화’로 소비되었다.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는 ‘경제 대통령’을 내세우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긍정적 이미지를 승계한 적자를 자임했고, 이후 대선 승리를 거머쥐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임기 말임을 감안해도 상당한 민심 이반을 경험하고 있었다. 신뢰하는 전·현직 대통령 3위(6.6%)에 올랐지만, 가장 불신하는 전·현직 대통령 순위로는 2위(21.2%)였다. 신뢰도보다 불신도가 3배 이상 높았다. 2009년 신뢰도 조사에서는 반전이 일어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는 전·현직 대통령 10명 중 2위(28.3%)를 차지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생존 시보다 사후에 더 너그러워지는 경향을 감안하면, 그해 5월23일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의 추모 열기가 신뢰도에 반영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특히 30대의 변화가 눈에 띄었다. 2007년 조사에서 30대 응답자가 노 전 대통령을 신뢰한다는 대답은 8.8%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9년 조사에서는 45.4%로 큰 차이를 보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30대 신뢰도(22.6%)와 비교해도 2배 이상 높은 수치였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60세 이상과 대구·경북, 한나라당 지지층 등 ‘고정 지지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신뢰도 1위(41.8%) 자리를 지켰지만, 이는 2007년에 비해 10%포인트 이상 빠진 수치였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가 반환점을 돈 2010년 신뢰도 조사는 ‘박정희 신화’에 균열이 시작됐음을 알려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목한 응답이 처음으로 30%대로 내려앉았다.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신뢰도를 합치면 43.5%로 박 전 대통령의 신뢰도 수치(34.2%)를 넘어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에 당시 현직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신뢰도인 6.4%를 합쳐도 40.6%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를 합친 수치에 미치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이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성장주의’에 대한 환상을 일정 부분 거둬갔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2012년 대선을 3개월 앞두고 시행된 신뢰도 조사에서는 처음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33.7%)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32.9%)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는 해마다 떨어졌다. 대선이 가까워오면서 후보에 대한 지지율과 신뢰도가 수렴되는 모양새를 보인 만큼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 후보가 ‘박정희의 딸’ 박근혜 후보에 버금가는 후광효과를 입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였다.

 

ⓒ시사IN 자료2007년 9월 휴일을 맞아 청와대에서 손녀와 자전거를 타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에는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기대가 겹쳐진다.


2013년 신뢰도 조사는 ‘종북’을 무기로 내세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 1년차 효과가 반영된 결과다.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사건, NLL(북방한계선) 논란 등 일련의 북한 관련 이슈가 여론을 뒤덮는 데 성공하며 전직 대통령 신뢰도 순위도 보수 우위로 재편됐다. 가장 신뢰하는 전직 대통령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37.3%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았다. 2012년 대비 4.4%포인트 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8%로 전년에 비해 5.7%포인트가 빠진 2위로 내려앉았다.

‘우경화’로 정권을 단단히 틀어쥔 것 같았던 박근혜 정부의 독주는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거치며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해 신뢰도 조사에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정당은 물론 법원·검찰·경찰·국세청·감사원 등 모든 국가기관의 신뢰도가 일제히 추락했다. 대통령 신뢰도는 2012년 조사 결과와 흡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33%)가 가장 높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도 상대적으로 옅어지는 추세를 보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는 2015년을 시작으로 뚜렷한 오름세를 보인다. 추세는 이어졌다. 2016년 신뢰도 조사는 ‘전직 대통령 신뢰도의 정권교체’라 할 만했다. 2016년 조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신뢰한다고 꼽은 응답자는 28.8%로 역대 조사 중 가장 낮았다. 조사 이후 처음으로 30% 선이 붕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는 39.9%로 ‘박정희 신뢰’ 응답을 오차범위 밖에서 앞섰다. 이 역시 2007년 조사 이후 처음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신뢰 자본 ‘든든’

박정희 신화는 그 적절함을 떠나 ‘국가주도형 개발주의’라는 막강한 대안 위에서 위력을 발휘해왔다. 반면 노무현에 대한 향수에는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기대’가 겹쳐진다. 2017년 5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열린 조기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문재인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한다.

그해 9월 실시된 2017년 신뢰도 조사는 조기 대선을 거치며 유권자들이 과거에 대한 평가를 재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2017년 신뢰도 조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가장 신뢰한다는 응답은 전체 응답자의 45.3%였다. 2007년 조사 당시 노 대통령의 신뢰도 6.6%와 비교해보면 극적이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신뢰받는 이름으로 등극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변화의 일등공신은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2017년 신뢰도 조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는 23.1%까지 떨어졌다.

2018년 조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는 42%로 2017년 조사에 비해 소폭 하락했다. 일정 부분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반영됐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신뢰 응답을 합하면 57.9%인 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가 21.1%로 조사 이래 최하위인 점을 고려하면 ‘노무현 신뢰도’로 가늠해볼 수 있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신뢰 자본’은 아직 든든한 편이다. 2019년 신뢰도 조사는 9월로 예정돼 있다. 올해는 어떤 변화를 보여줄까. 이번에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가,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유권자층의 크기를 짐작해볼 가늠자가 될 수 있을까.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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