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꿈이 살아 숨 쉬고 있다
  • 김해 봉하마을/글 김연희 기자·사진 조남진 기자
  • 호수 610
  • 승인 2019.05.2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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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래 봉하마을을 다녀간 사람은 980만명, 해마다
90만명 가까이 방문했다. 서거한 지 10년이 지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은 무엇일까.
노란 종이 네 귀퉁이를 안으로 접었다. 귀퉁이의 꼭지를 가운데로 모으고 핀을 이용해 수수깡에 고정시켰다. 부드럽게 잘 휘어지는 핀은 따로 제작했다. 수수깡 뒤쪽에는 병아리 모양 스티커를 붙였다. 순식간에 바람개비가 완성됐다. 눈보다 손이 빠른 듯했다. ‘봉하마을 바람개비 아저씨’로 알려진 마터씨(가명·56)가 아빠 품에 안긴 아기에게 바람개비를 건넸다. 석가탄신일과 일요일이 겹친 5월12일은 유난히 화창했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살 속에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문구가 적힌 바람개비가 노랗게 빛났다.
ⓒ시사IN 조남진

마터씨가 주말마다 봉하마을을 찾은 지도 10년이 다 되어간다(그는 실명 대신 가명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토요일이면 서울에서 바람개비 재료를 챙겨 심야버스에 몸을 싣는다. “대통령님 서거하시고 처음 봉하에 왔다. 마을 들어오는 길에 설치돼 있는 바람개비를 아이들이 너무 갖고 싶어 하더라. 그래서 시작하게 됐다. 요즘은 하루에 500개 정도 만든다.” 그는 짧은 대화 중에도 쉴 틈 없이 손을 놀려 바람개비를 만들었다.

그가 일요일마다 서울과 김해를 오가는 사이 봉하마을의 풍경도 제법 바뀌었다.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는 유언에 따라 ‘대통령 노무현’ 여섯 글자만이 새겨진 너럭바위 묘지는 그대로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일주일간 조문객 100만명이 봉하를 찾았다. 줄을 맞춰 기다리다 퍼붓는 소나기를 그대로 맞기도 했다. 비통함과 슬픔이 봉하를 가득 채웠다.

10주기를 열흘 앞둔 2019년 5월12일, 노 전 대통령 묘역에는 하얀 국화꽃과 노란 바람개비가 어우러졌다. 부모 손을 잡은 아이들이 다른 한 손으로는 노란 풍선을 들었다. 주말을 맞아 교외로 나들이 온 가족들이었다. 김해에서 온 황용구씨(40)는 아기띠를 둘러메고 있었다. 이제 막 4개월이 된 아들 그리고 처가 식구 9명과 이곳을 찾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하기도 하고, 근처 봉화산에 절이 있어서 석가탄신일을 맞아 가족들과 나왔다. 봉하마을은 처음이다.”
ⓒ시사IN 조남진5월12일 봉하마을을 찾은 젖먹이에게 바람개비를 건네는 마터씨.

봉하마을을 찾는 사람들의 수는 꾸준하다. 해마다 평균 90만명 가까이 방문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2017년에는 약 100만명이 봉하를 다녀갔다. 노무현재단에 따르면, 2008년 이래로 980만명이 봉하마을을 다녀갔다. 연간 방문객 수로 따졌을 때 김해시에서 가장 많이 찾았고, 경상남도권으로 넓혀도 10위 안에 든다. 서거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은 무엇일까.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의 이원애 본부장은 “나도 궁금하다”라며 웃었다. 이 본부장은 사견임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좋아하는 마음이 기본이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철학과 사상은 20~30년 뒤 미래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민주주의나 복지, 생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화두이다. 그 가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어나서 이곳을 찾는다고 생각한다.”

2010년부터 봉하마을을 가꾸어온 이 본부장의 말처럼 봉하는 단순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태어나고 묻힌 곳 이상의 장소이다. 그는 퇴임 이후 품었던 이상을 봉하마을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2008년 5월 봉하마을 방문객들에게 건넨 인사말에는 그 꿈의 단면이 묻어난다. “제가 균형발전 정책을 후보 때부터 줄기차게 주장해서 지방 살리자고 말했는데 제가 온다고 지방이 곧 살아나는 것은 아니지만 저라도 와서 살기라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봉하에 있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시지요? 제가 힘 닿는 대로 하겠습니다.”
ⓒ시사IN 조남진자원봉사자가 아이들에게 풍선을 선물하는 모습.

봉하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사저는 이 꿈을 준비하는 베이스캠프였다. 그는 이곳에서 옛 참모들과 민주주의와 진보의 미래를 토론하고, 친환경 생태마을을 조성할 방법을 구상했다. 지붕이 뒷산자락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지하 1층, 지상 1층짜리 대통령의 집은 주민 100여 명이 사는 작은 마을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노 전 대통령은 설계를 맡은 고 정기용 건축가에게 ‘부끄럼 타는 집’ ‘지붕 낮은 집’을 주문했다고 한다. 2016년 권양숙 여사는 사저를 노무현재단에 기증하고 봉하마을 내 다른 주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난해부터 노무현재단은 ‘노무현 대통령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하루 10회 정도 관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집 안의 모든 시계 ‘9시30분’에 멈춰 있어


‘노무현 대통령의 집’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시민해설사 18명은 모두 자원봉사자다. 5월12일 오후 4시 관람은 시민해설사 고명석씨(69)가 이끌었다. 관람 정원을 꽉 채운 방문객 30명이 고씨의 인도로 사저를 둘러봤다. 창고로 사용되는 지하 1층에는 검은색 자동차 두 대와 전기 자전거가 주차돼 있었다. 손녀를 태우고 봉하 들녘을 달리던 그 자전거다. 봉하마을 인근을 지나는 하천인 화포천을 복원할 때 이용한 벽돌색 고무보트도 그대로였다.
ⓒ시사IN 조남진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물 크기 사진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방문객들.

안뜰에는 2008년 11월11일 제주 4·3 희생자유족회에서 선물받은 제주산 토종 산딸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4·3 위령제에 참석해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사과한 바 있다. 손자의 백일잔치와 주민 초청 집들이 겸 62번째 생일잔치가 이 자그마한 뜰에서 열렸다. 사랑채에는 고 신영복 선생이 붓글씨로 쓴 ‘사람 사는 세상’ 액자가 걸려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초선 시절부터 서명할 때마다 즐겨 썼던 이 문구는 그대로 국정 철학이 되었다. 안채의 침실과 욕실 정도를 제외하면 사저는 큰 창을 가진 열린 구조였다. 노무현재단 봉하마을본부 강주완 팀장은 “집이 노 전 대통령의 성품을 닮았다”라고 말했다.

서재의 서가에는 노 전 대통령의 장서 919권이 꽂혀 있었다. 즐겨 쓰던 밀짚모자도 걸려 있었다. 서재는 작은 중정을 끼고 대문의 맞은편에 위치했다. 2008년 봉하를 찾은 시민들은 집을 둘러싼 얕은 돌담 너머로 “대통령님 나오세요”라고 그를 불렀다. 서재에서 책을 읽던 노 전 대통령은 밀짚모자를 쓰고 나가 방문객들과 환담을 나누곤 했다. 집 안의 시계는 모두 9시30분에 멈춰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운명한 시각이다.
ⓒ시사IN 조남진시민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대통령의 집’ 안 뜰을 관람하는 시민들.
ⓒ시사IN 조남진지하 1층에는 노 전 대통령이 타던 자동차와 전기 자전거가 놓여 있다.
ⓒ시사IN 조남진노 전 대통령의 장서 919권이 꽂혀 있는 서재.

5월12일 봉하마을 방명록에는 ‘보고 싶습니다’ ‘그립습니다’라는 글귀가 여럿 눈에 들어왔다. 묘역 앞에서 만난 김미숙씨(39)는 노 전 대통령을 떠올리다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는 당황스러워했다. “자전거 타던 모습을 떠올리니까 갑자기 눈물이 난다.” 김씨는 남편 그리고 세 자녀와 함께 봉하마을에 왔다. 부산에 사는 가족은 이맘때쯤이면 꼭 이곳을 찾는다. 남편 이상민씨가 세 아이의 이름으로 방명록을 남겼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5월13일 낮, 봉하마을 맞은편 논두렁에서 꽥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성민씨가 부는 호루라기 소리였다. 오리 울음과 비슷한 호루라기 음색에 새끼오리 다섯 마리가 뒤뚱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박씨는 짧은 보폭으로 보조를 맞추며 비닐하우스 우리로 오리들을 인도했다. 박씨는 2008년 자원봉사자로 봉하마을에 왔다. 주말마다 이곳을 찾아 봉하 들판을 가꾸는 데 손을 보탰다. “대통령님 보는 재미로 주말마다 봉사하러 왔다. ‘고생한다’ 그 한마디 듣는 게 그렇게 좋았다. 그때는 ‘봉하 폐인’이라는 말도 있었다.” 박씨는 노 전 대통령과 막걸리 잔을 부딪치는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서거 이후 그는 아예 봉하마을에 눌러앉았다. 벌려놓은 일을 누군가는 마무리해야 했다. 이제 와서 발을 빼면 의리가 없다 싶기도 했다.
ⓒ시사IN 조남진노무현재단 자원봉사자가 봉하마을을 찾은 시민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록을 캘리그래피로 만들어 주고 있다.

그는 지난해까지 노 전 대통령이 생태마을을 만들고자 설립한 ‘영농법인 ㈜봉하마을’에서 방앗간 공장장으로 일했다. 올해는 노무현재단에서 생태문화공원을 가꾸는 사업을 도맡고 있다. ‘사람 사는 들녘’이라고 이름 붙여진 봉하마을 생태문화공원에서는 텃밭 가꾸기, 농부학교 등을 통해 자라나는 아이들이 자연과 가까워지도록 체험학습을 운영한다.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이 “아이들이 와서 자연과 접하고 그 섭리는 배우는” 곳이 되기를 바랐다. 박씨가 그 바람을 이어가는 셈이다.

평일인 이날도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신오철씨(40) 가족은 전국일주 중에 봉하마을을 찾았다. 잠시 일을 쉬게 된 신씨는 그동안 해보고 싶었지만 미뤄두었던 일을 하기로 했다. 그중 하나가 봉하마을 방문이었다. 여섯 살과 네 살인 두 아들이 장소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아직 이르다. 신씨는 “아이들이 더 크면 또다시 오고 싶다. 그때는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가장 서민적이고 서민의 삶을 위해 애쓰셨던 분이라고 설명해주려 한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전경.

봉하마을 자전거 대여소에서 3000원을 내고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노 전 대통령이 자전거를 타고 둘러보던 봉하 들판을 따라 페달을 밟았다. 15분 정도 달리자 하천형 습지인 화포천에 닿았다. 폐수와 폐기물로 뒤덮였던 화포천은 노 전 대통령과 뜻을 함께한 이들의 노력 끝에 생명을 되찾아 ‘한국의 아름다운 100대 하천’에 선정되기도 했다. 겨울이면 기러기·청둥오리 등 철새 수천 마리가 찾아온다.

2008년 봉하마을을 찾은 시민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놀러 오시면 고향 대신에 제가 여러분 고향이 될 수 있어요. 좀 멀기는 하지만 사람이 마음먹고 자연을 복원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 함께 살아 있는 그런 곳으로 한번 해보려고 해요.” 이듬해 그는 자신의 이상을 펼쳐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빈자리에 노무현의 꿈이 남았다. 그 꿈이 이곳 봉하마을에서 10년째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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