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에서 악연을 이어간 윤선도와 송시열. 두 정치인은 글로써 영원히 보길도에 남아 있다. 윤선도는 명작 〈어부사시사〉를, 송시열은 바위에 새긴 글이라지만 선명하게 흔적을 남겼다.

섬은 스승이다. 이들은 글을 남기고 정자를 짓고 풍월을 읊었고 후대들은 이를 활용할 줄 안다. 윤선도·송시열이 꿈꾸던 삶이 낚싯대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죽어서 관 속에 묻히기보다, 머리를 진흙에 묻고 꼬리를 흔들고 살더라도 대단히 낙천적인 삶을 보길도에서 실현한 셈이다. 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한양에서 해왔던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양과 정치적으로 가장 먼 거리에 살며 오히려 한양에 사는 그들을 유배시켜버렸다. 섬에서 사는 유유자적한 삶이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스승이 되는 모습을 여러 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길도가 그래서 특별하다. 풍광이 수려한 자연미가 섬 여행의 촉매제를 제공하는데 보길도는 그래서 특별하다.

고산 윤선도(1587~1671)가 고향인 전남 해남에 있을 때 조선의 임금 인조가 이미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소식을 접한다.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도 부끄럽다며 제주를 향해 떠났다고 한다. 이 길에서 고산은 보길도 경치에 취해 머문다. 격자봉에 올라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족하다”라는 글을 썼다고 한다. 세연정의 세연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해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란 뜻이다.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이다. 보길도 세연정을 컴퍼스 중심에 대고 노화도와 보길도를 잇는 보길대교를 시작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그리면 망끝전망대, 보죽산, 보옥리 공룡알해변, 격자봉, 예송리해수욕장, 통리해수욕장, 다시 보길대교와 만나는 원이 된다. 보길도에선 있으니 보길도에서 하루 숙박을 한다면 윤선도의 흔적은 이튿날 향해도 좋을 코스이다.

ⓒ홍경찬보길대교에서 본 일몰

보길도에선 섬 주민들이 직접 캔 산나물을 파니 지갑만 열면 된다. 여행객과 섬 주민이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음에도 섬 특산물을 살 때가 제일 편하다. 묻고 싶은 거 묻고, 답하고 싶은 거 답하지만 이 시공간에 여행자와 섬 주민만이 존재한다. 질문에 답이 있고, 답에 질문이 있는 섬 대화의 백미이므로 놓치지 않기를.

보길도 여행은 보길대교에서 황혼을 맞이하면서 시작됐다. 보길도와 노화도가 연결된 보길대교 인근이어서 찾기 쉬운 ‘매일시장’이 여행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수산물 가게가 50m 정도 일렬로 나열되어 있다. 안을 걷다 보니 어느새 상인들과도 말문을 트게 된다. 가격 흥정이 오가고 후한 인심은 덤이다. 두 섬이 연도교로 연결된 공간에 이런 규모의 시장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한바탕 시장을 둘러보고 상인들과 농하며 대화하니, 섬 여행의 재미가 이래서 특별하다. 시장 상인들이 갓 잡은 멧돼지를 삶는다. 만찬의 주인공으로 초대받았다. 그냥 서 있었을 뿐이고 주민들과 대화를 했을 뿐이다. 둥근 드럼 철통에 멧돼지가 잠든 솥을 올리고 장작으로 불을 지핀다. 이동식 밥상이 차려지고 막걸리가 나온다. 그러더니 의자가 마련되고 김치와 두부도 차려진다. 수육 맛에 입이 왁자하다. 맛있는 충격이다. 갓 잡은 멧돼지를 삶아서 바로 입에 넣어주는 섬. 인연의 끈은 이어져 시장 상인 번호 ‘3번’ 성광수산 대표의 가족이 운영하는 숙소에 여장을 풀게 되었다. 보죽산 아래 보옥리 마을이다.

ⓒ완도군청노화도-보길도를 연결하는 보길대교
보길도 바람은 잠들지 않는다

섬의 밤은 유별나게 길다. 별만큼이나 찰나의 밤이라서 그런지, 고작 하룻밤이라는 아쉬움이라서 그런지 긴 밤이 된다. 이 밤은 섬의 맛으로 시간을 채운다. 섬 맛을 보려면 현지 재료를 구해야 한다. 숙소에서 전복과 횟감을 손질했다. 저녁을 해결하고 숙소를 나서니 전깃불이 환하다. 주민들이 멸치와 건뱅이를 삶고 있었다. 주 수입원이다. 낮에는 낮대로 분주하고 밤에는 밤대로 바빴다. 생존이 걸린 섬이다 보니 시간이 화살촉보다 빠르다는 어부의 말이다. 바다로 나가니 보옥리 방파제는 널찍했다. 긴 낚싯대를 드리우면 세상 풍파 시름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고요하다. 별빛이 등대가 된다. 잠자리에 들어도 보길도 바람은 자지 않았다. 파도와 바람도 주민들을 닮았는지 쉴 틈이 없어 보인다.

아침이 밝자 보죽산의 위용이 압도했다. 넓은 바다의 바람을 온 산으로 받아서인지 고깔모자 형상이다. 주민들은 산길은 있지만 권유하지 않았다. 이 산을 둘레길처럼 이동했다. 공룡알해변을 찾아 마을을 관통했다. 돌담길에 이름 모를 풀꽃이 반긴다. 흙빛 돌담과 푸르른 하늘과 바다 풀빛들이 돌담길에다 조명을 비춰주고 있는 셈이다. 이 돌담길이 유독 돋보이는 이유다.

섬 집 정원마다 붉은 핏빛을 토했다. 가을과 이별하는 동백이었다. 여정이 고왔다. 몽돌에 발을 디딜 때 달걀 위를 걷듯이 발을 옮겼다. 동백숲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자연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들어오고 나가는 파도 운율에 자갈이 운다.

ⓒ홍경찬보길도 보옥리 공룡알해변 동백 숲
섬도 바쁘지만 여행자도 분주하다. 일행은 보길도의 서쪽 일주도로를 타고 다도해 물빛과 조우하기로 했다. 근데 추자도였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추자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추자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보길도라니, 실루엣이 압권이다. 여행 뒤 이 망끝전망대를 검색해보니 낙조가 아름다운 지점이었다. 붉은빛 몸을 감추는 낙조를 볼 수 있다는 망끝, 황혼이 깃드는 이 지점에 여행자가 선다면 자연의 선생을 조우하리라. 실제로 망끝에서 제주도와 추자도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조망하기 쉬운 곳이어서 지나가는 선박을 구별할 수 있고, 바다로 나간 가족이 잘 돌아오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라는, ‘망끝’의 뜻을 섬 주민이 전한다.

 “5월이면 광어회와 우럭, 장어회가 맛나요”

윤선도가 세연정을 지은 지 164년이 흐르고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정난주의 남편인 황사영이 이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다. 정난주는 제주도 관노로 가게 된다. 그녀는 정약용과 정약전의 조카이다. 조카사위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곱게 살았을 여인이다. 그녀는 세 살배기 아들 황경헌을 데리고 가다가 추자도에 내려놓고 홀로 제주도로 향한다. 차마 아들까지 관노로 키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추자도 어부 오씨가 갓난아기를 키웠다. 아기가 자라 후대를 이었고, 그 후손이 현재 추자도 수협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보길도도 유배지로 향하는 해로이다. 이 섬 어부들도 직접 배를 몰고 가기를 꺼린다. 손에 잡힐 듯 지척이지만 목숨을 걸어야 한다. 추자도의 상징 ‘사자섬’이 육안으로 또렷이 보인다. 황경헌의 추자도 묘와 그의 어머니 정난주의 묘가 서로를 향하고 있다. 정치적 박해를 받은 윤선도와 정난주, 이들은 섬에서 끝내 뿌리를 내리며 이후 섬 주민들의 삶에 확실히 각인됐다. 추자도를 관망할 수 있는 보길도전망대는 제주도를 제외한다면 이곳이 유일하다. 그래서 특별하다.

ⓒ홍경찬보길도 세연정

해남 땅끝전망대 여객선터미널에서 뱃길로 30분이면 노화도에 닿는다. 섬 주민 서영선씨는 “5월이면 광어회와 우럭, 장어회가 맛나요”라고 소개했다. 매일시장에서 양식 전복을 팔고, 횟감을 마련하고 해산물 수익으로 가족을 책임진다. 막내 시동생은 섬에서만 자라다 칼바람에 늙어가고 있지만, 한때는 그도 팔도를 돌아다녔다. 이내 망끝 하늬바람이 좋아 끝내는 섬의 끝 보죽산 보길면 보옥리에 귀향해 집을 짓고 생활하고 있다. 가족은 장어랑 복어랑 삼뱅이 고기를 잡는다. 시누이가 된 서씨는 타국에서 시집온 동서를 알뜰히도 챙겼다.

해남군 여행지를 추천한다면 달마산, 도솔암, 미황사, 달마고도 트레킹. 완도군 완도수목원을 추천한다.



섬에 들어가는 방법

보길도는 완도군에 속하지만 해남군에서도 배편이 있다. 완도군 화흥포항선착장에서 노화도 동천항, 해남 땅끝선착장에서 노화도 산양진항을 오간다. 노화도와 보길도는 보길대교로 연결됐다.

섬에서 할 수 있는 일

보길도는 섬을 한 바퀴 도는 일주 트레킹을 추천한다. 보길대교에서 망끝전망대, 보죽산, 보옥리 공룡알해변, 격자봉, 예송리해수욕장, 통리해수욕장을 지나면 송시열의 글이 쓰인 바위와 만나게 된다. 섬 중심에는 고산 윤선도의 세연정이 있다. 정자의 수려한 자태와 숲길과 연못에 솟구쳐 오른 바위가 무릉도원을 연상시킨다. 윤선도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글을 보면서 천천히 걸으면 좋다. 보길대교 근처 매일시장에서는 친절한 섬 주민들을 만나볼 수 있다. 우리나라 섬 중에서 가장 큰 장이 열린다. 신선한 활어와 양식 전복 등을 구매할 수 있다.

배를 타기 위해 들르는 해남군의 여행지를 추천한다면 달마산, 도솔암, 미황사, 달마고도 트레킹. 완도군 완도수목원을 추천하다.

기자명 홍경찬 (여행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