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참 멀다. 서울을 기준으로 잡았을 때 얘기다. 물론 광주나 목포, 순천, 창원 등지에 사는 분에게는 가까울지 모르겠으나, 서울 사는 사람에게 여수 가는 길은 그리 만만하게 볼 게 아니다. 물론 KTX도 다니고 하루에도 수차례 고속버스가 오가니 무척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킬로미터로 환산해서 표기하는 거리가 줄어든 것은 아니니 서울에서 멀다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왜 하필 그 먼 여수까지?”라고 묻는다면, “여수 밤바다보다 중독성 강한 여수의 섬이 거기 있어서”라고 답을 드리겠다. 여수의 섬은 직접 가서 경험하지 않으면 모를 중독성이 있다.

섬에 가서 걷는 일을 유행으로 만든 건 제주도가 처음이었지만, 걷기 좋아하는 사람 사이에 그다음으로 회자된 곳 중 하나는 금오도다. 걷는 맛을 제대로 전파한 후발 주자라 할 수 있겠다. 제주도 길이 올레길이라면 금오도의 길은 비렁길이다. 비렁은 ‘벼랑’이라는 여수 사투리다. 그렇다. 금오도의 비렁길은 벼랑을 따라 걷는 길이다. 원래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던 해안 이동로가 비렁길의 원형이다. 바위가 많고 산세가 가파른 섬의 지형 특성상 금오도에 사는 주민들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는 것조차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파른 섬 안쪽으로는 길을 만들기 어려웠다. 그래서 택한 것이 해안을 따라 벼랑 위로 둘러서 다니는 이동로. 금오도에 마을이 생긴 이래 오랜 시간에 걸쳐 주민들이 다져놓은 이동로가 훌륭한 트레킹 코스이자 여행 상품이 되었다.

ⓒ정태겸감성돔 낚시 명소인 금오도 갯바위
ⓒ정태겸동백나무 숲길

여수에서 만난 택시 기사는 말했다.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가 여수를 알렸다면, 금오도의 비렁길은 여수를 찾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고. 몇 년 사이에 여수를 찾아오는 관광객 수가 가파르게 증가한 건 주지의 사실이다. 주말만 되면 풀빌라부터 동네 뒷골목 모텔까지 숙박업소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여수에는 여행객이 많이 몰린다. 여수의 뛰어난 풍광과 곳곳에 산재한 맛집이 가장 큰 이유일 테지만, 여기에 더해 ‘금오도’의 존재는 여수 재방문율을 높이는 요인 중 하나다. 이 길이 단순한 산책로였다면 아마도 이렇게까지 사람이 몰려오지는 않았을 터이다.

총 18.5㎞, 다섯 개 코스

뭍에서 섬까지는 30분 남짓. 금오도는 생각보다 육지에서 가깝다. 뱃머리를 항구에 올려놓기 무섭게 사람들은 삼삼오오 제 갈 길을 떠났다. 여기부터가 갈림길이다. 비렁길은 총 5개 코스로 이루어진다. 북서쪽 함구미에서 시작해 남동쪽 안도까지 이어지는 18.5㎞ 길을 구간별로 나누었다. 어디를 향해 갈 것이냐에 따라 각자의 방향이 달라진다.

다섯 개 구간을 단번에 일주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아침 일찍 첫 배로 섬에 들어와 저녁 무렵까지 종일 걷는 식이다. 어차피 비렁길은 섬의 왼편을 따라 한쪽 방향으로 이어진다. 1코스부터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5코스 끄트머리에서 시작해 거꾸로 올라올 것인지만 선택하면 된다. 안내 책자에는 1코스에서 5코스까지 완주하는 데 총 6시간이 걸린다고 적어놓았지만, 이미 이곳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해준다. “굳이 그렇게 바쁘게 걸을 필요 없다.” 그러니까, 정신없이 걸어야 6시간 내에 완주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이 덧붙인다. “충분히 즐기면서 걸어라.” 길 중간에 체력을 갉아먹는 구간이 있어서 시간을 두고 걷는 편이 나을 뿐 아니라 서둘러 걷는다면 비렁길을 걷는 의미가 없다는 것. 그들은 대체로 7시간 반에서 8시간을 잡는 게 현명하다고 충고한다. 어차피 이 모든 코스를 하루에 완주할 능력 따위는 없으므로 일찌감치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되도록 천천히 걷고 보는 걸 목적으로 삼았다.

ⓒ정태겸비렁길

함구미에서 시작하는 비렁길 1코스에 오른다. 함구미에서 미역널방, 수달피비렁, 신선대를 지나는 길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오르막이다. 안 그래도 부족한 에너지, 조금이라도 아끼고자 입을 닫고 걸음에 집중한다. 1코스의 비경은 미역널방이다. 주민들이 미역을 지게에 지고 올라와 이곳에 널어놓고 말렸다고 해서 미역널방이다. 이 위에서 경치 감상에 빠져 있을 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돌아서 나오며 보니 바다를 향해 아찔하게 떨어지는 절벽 위다. 그 높이만 90m. 우리는 이런 바위산의 벼랑을 따라 걸어야 한다.

1코스는 비렁길 전체에서도 길이가 가장 긴 편이다. 5.0㎞. 나머지 2코스에서 5코스까지는 3.2~3.5㎞ 남짓이다. 걷다 보니, 충분히 즐기면서 걸으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가는 곳마다, 보는 곳마다 전망대만 나오면 눈길을 빼앗긴다. 남해 바다 특유의 초록빛은 시선을 유혹하는 힘이 있다.

비렁길 코스에서 풍광이 가장 뛰어난 구간은 직포에서 학동으로 이어지는 3코스. 총 3.5㎞에 불과하지만 등산에 가까울 만큼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한다. 비렁길 중에서는 난이도가 가장 높다. 그렇다고 겁먹을 정도는 아니다. 5개 코스 중에서 그나마 어렵다는 것일 뿐. 정 엄두가 안 난다면 직포에서 학동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반대로 올라가면 된다. 그러면 오르막은 내리막이 되고 내리막은 오르막으로 변한다. 부연하자면 오르막은 적어지고 내리막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다. 3코스에는 한 사람이 겨우 걸어갈 만한 오솔길이 많은데, 양옆에는 동백나무가 빼곡하다. 마치 터널처럼 솟아올라 하늘을 가린다. 꽃이 만발하는 계절에 금오도를 찾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나무에서 한번 피어난 붉은 꽃이 통째로 툭 떨어져 땅에서 다시 한번 피어나는 아름다움.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한참을 걷다 보면 시야가 열리고 남해 바다가 펼쳐진다. 기암괴석과 푸른 바다의 조화가 기묘하다.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학동 부근의 출렁다리인 ‘비렁다리’는 3코스의 명물이다. 갠자굴통 협곡에 만들어진 이 다리는 길이 42m에 폭 2m 정도다. 다리 아래로 보이는 해식절벽이 멋지다. 다리 중간 발밑에 설치된 강화유리로 벼랑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넋 놓고 걷다가, 비경에 취하다가

잠시 서서 풍경을 감상하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처음에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지만, 한참 걷다 보면 어느새 온갖 잡념이 사라지고 온전히 걷는 행위만 남는다. 마치 몸과 머리의 통제가 풀려버린 것만 같은 기분. 무념무상의 경지다. 하나에 완벽하게 몰입한 이 느낌을 불가에서는 ‘삼매(三昧)’라고 표현한 것이리라. 명상이 별것인가. 앉아서 하면 좌선이고 걸으면서 하면 행선이지. 한참을 걷다가 바다를 보며 쉬다가, 넋 놓고 걷다가 눈앞의 비경에 취하다가. 걷다 보니 알겠다. 금오도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다. 제주도의 올레길과는 또 다른 느낌의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심포에서 시작하는 마지막 5코스에 접어든다. 여기서부터는 한동안 너덜바위를 따라 걸어야 한다. 오르막이 심하지는 않아서 크게 어렵다고 볼 순 없지만, 아무래도 디디는 발끝을 조심하는 게 좋다. 눈앞에 보이는 소부도와 대부도, 그 뒤편의 안도를 향해 걷다 보면 어느새 비렁길의 마지막을 알리는 안도대교가 나온다. 금오도 끄트머리의 작은 섬 안도는 저 다리로 연결돼 있다. 주민 500명이 사는 아주 작은 섬이지만 ‘대나무숲길’이라는 그 나름의 둘레길을 가지고 있다. 비렁길을 걷고 시간을 내서 안도의 길을 함께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여기서 꿀팁 하나. 금오도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쉼터 구실을 하는 가게를 만난다. 금오도는 방풍나물이 유명한 섬이라 방풍나물을 이용한 여러 가지 음식을 판다. 방풍나물 도토리묵, 방풍해물전, 방풍문어초무침 등등. 금오도 명물인 만큼 한번 맛보고 오길 권한다.

금오도는 육지에서 가깝고 자연에 그대로 녹아드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 섬이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섬, 할 것과 볼 것과 먹을 것까지 확실한 섬이 금오도다. 많은 준비도 필요하지 않다. 물병 하나, 간식거리 몇 가지 담을 가방 하나 메고 튼튼한 신발 챙겨서 떠나자. 무념무상의 걷기가 당신을 기다린다.

ⓒ정태겸비렁길 3코스의 명물 비렁다리

섬에 들어가는 방법

돌산도 신기항에서 금오도 여천, 여수항 여객선터미널에서 금오도 우학, 여수항 여객선터미널에서 금오도 함구미, 백야선착장에서 금오도 직포선착장으로 가는 배가 있다.

금오도 버들인체험휴양마을(061-666-6800)과 안도 어촌체험마을(061-665-9340)을 숙소로 이용할 수 있다. 방풍전복칼국수(061-664-0564)가 맛집으로 소문나 있다. 연도교를 따라 건너가 안도 제일식당(061-652-5640)에서 회정식을 먹는 것도 좋다. 금오도에서 안도로 넘어갈 때 택시를 이용하려면 남면택시(061-666-2651)에 연락하면 된다.

섬에서 할 수 있는 일

트레킹, 캠핑, 낚시, 스노클링, 카약 등이 가능하다. 미역널방(고흥 나로도의 나로호발사대를 볼 수 있는 곳. 너럭바위 위에 조성한 조형물도 인상적이다), 매봉전망대(3코스 매봉에 만들어진 곳)가 섬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으로 꼽힌다.

갈바람통 전망대에서는 해식절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발아래 파도 소리가 멋진 조화를 이룬다. 안도 몽돌해수욕장은 파도가 칠 때마다 자그락거리는 몽돌 소리가 정겹다.

기자명 정태겸 (여행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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