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아른거리네 노랗고 파란 그 풍경
  • 정태겸 (여행작가)
  • 호수 607
  • 승인 2019.05.2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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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군 청산도

길 따라 땅끝에서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완도가 나온다. 국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청정 해역을 가진 섬. 이제는 다리가 연결돼 육지와 섬의 경계가 모호해진 완도는 작지만 각자의 아름다움을 가진 부속 섬을 여럿 거느리고 있다. 완도 여객선터미널에서 배로 50분을 타고 들어가는 청산도도 그중 하나다.

봄이면 청산도로 향하는 발길이 부쩍 는다. 아름답기로 말하자면 그 어느 곳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풍광이 펼쳐지기 때문. 청산도를 다녀온 사람들은 “꼭 다시 가고 싶은 섬”이라고 말한다. 청산도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던 지인에게 물었다. 무엇이 그렇게 좋았느냐고. 그는 섬에서 보았던 절경이 자꾸 아른거린다고 했다. 노랗고 파란 그 섬의 풍경에 젖어드는 것만 같았다면서.

그의 말을 떠올리며 청산도행 배표를 끊었다. 표를 내주던 터미널 창구 직원이 말했다. “참 좋은 때 들어가시네요.” 지금이 청산도를 여행하기 좋을 때냐고 물었더니 그가 답했다.

ⓒ정태겸청산도의 명물 서편제길

“청산도는 지금부터가 연중 첫 번째 성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여름이 오면 두 번째 성수기고, 가을에는 세 번째 성수기를 맞아요. 코스모스가 필 때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일 년 내내 참 좋은 곳이에요.”

청산도 들어서기 전부터 주변에서 듣는 이야기가 온통 기대감을 부풀린다. 평일 낮인데도 배 안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배에 오른 사람들도 있지만 아예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오는 단체 여행객도 제법 눈에 띄었다. 매점에서 산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는 동안 사방에서 온갖 사투리가 들린다. 이쪽에서는 전라도 사투리, 저 멀리에서는 경상도 사투리. 난간에 서서 배의 바깥 풍경을 보는 동안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담소를 나누는 무리에선 충청도 사투리. 봄의 청산도에는 전국에서 사람이 모여든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 장면이다.

연중 내내 섬이 푸르다고 해서 푸를 청(靑)자에 뫼 산(山)자를 써서 청산도다. 신선이 사는 섬이라서 선산도 또는 선원도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청산도를 유명하게 한 것은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영화 <서편제>였다. 영화의 주인공인 유봉, 송화, 동화가 진도아리랑을 부르면서 내려오는 롱테이크의 그 유명한 장면을 청산도에서 찍은 것이다. 그 장면 하나로 얼마나 많은 찬사를 받았던가. 알면 알수록, 도착하기 전부터 청산도가 궁금해졌다.

항구 뒷골목에 남은 과거의 영광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배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하선을 준비한다. 배가 한 무리의 여행객을 우르르 쏟아낸다. 그 뒤를 따라 섬으로 발을 들였다. 하늘은 한없이 투명하고 태양은 따사롭다. 다만 바람이 꽤 세다. 봄의 청산은 지붕도 날린다더니, 만만치 않은 완력이다.

배에서 내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둘러 길을 떠났다. 저 많은 사람의 대다수는 당리로 향할 것이다. <서편제>를 찍었던 장소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기 전에 들러야 할 데가 있다. 청산도항의 뒷골목. 청산도는 예전부터 파시가 열릴 만큼 흥성거리던 섬이다. 주로 고등어가 많이 잡혔다. 파시가 열리면 물 좋은 고등어를 따라 이곳저곳에서 상인이나 선원이 모여들었다. 자연스레 청산도항의 뒷골목도 함께 번성했다.
ⓒ정태겸항구 뒷골목 파시문화거리

지금의 청산도항 뒷골목은 파시도 없어지고 그 많던 상인이며 선원들이 모두 사라져 쓸쓸한 기색이지만, 영화를 누리던 시간의 흔적은 남았다. 청산도항 한쪽에 죽 늘어선 온갖 식당이며 상점 뒤쪽으로 골목을 따라 곳곳에 파시가 열리던 시절을 추억하는 벽화가 그것이다. 소박한 골목 자체만으로도 도시인의 눈에는 충분히 정겨운데, 골목 사이에서 툭 튀어나오는 벽화니 조형물은 적잖은 즐거움이 된다. 이제는 전국 곳곳에 벽화마을이 생겨났지만, 이곳의 벽화는 솜씨가 꽤 뛰어나다. 여기에 더해 담벼락을 치장한 고등어 조형물은 그 골목을 통째로 예술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뒷골목에 파시가 한창 열리던 시절, 이 건물이 어떤 기능을 했는지, 저 공간에는 무엇이 있었는지를 작은 고등어 모양의 팻말에 정리해두었다. 많은 여행자가 이 골목의 존재를 모른 채 육지로 되돌아간다. 여행이란 그 지역의 지나간 기억을 더듬어보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는 발자국을 남기고 가는 공간의 과거에 적잖이 인색하다.

해가 슬며시 기울어지는 기색이 보인다. 더 늦기 전에 당리로 발길을 옮겼다. 청산도를 여행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순환버스나 택시를 이용해 곳곳을 둘러보거나, 차를 가지고 와서 자유롭게 돌아보거나, 해안가에 조성한 슬로길을 따라 원하는 만큼 가고 싶은 곳까지 걸어서 다니거나.

청산도는 2007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지정된 ‘슬로시티’다. 섬은, 뭐든지 빠르게 굴러가는 도시인의 삶을 늦추는 치유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을 테다. 이 섬의 그런 특성을 생각하면 가장 좋은 여행법은 역시 세 번째인 걷기가 어울릴 법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걷기 위해 청산도에 온다. 이렇게 화창한 봄에는 특히 걷기 위해 섬에 들어오는 여행자가 많다. 무얼 선택하든 그건 여행자의 몫. 여행에서 좋고 나쁜 선택이란 없다. 그 길을 즐기면 그만이다.

항구에서 오른쪽 해안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었다. 얼마 가지 않아 바다 곁으로 노란 물결이 보인다. 봄의 청산도를 유명하게 만든 유채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의 결을 따라 유채꽃도 무리지어 넘실거린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영락없는 노란 파도다. 언덕 바로 아래부터 저 멀리 바다 앞까지 유채꽃 군락이 드넓다. 원래는 다랑이논이 아니었을까 싶은 그 자리마다 층층이 노란 꽃밭이다. 그 사이를 따라 사람들이 걷는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걷는 기분이란. 이런 풍경을 곁에 두고 인상을 찌푸릴 일이 뭐가 있을까. 걷는 사람마다 입가에 활짝 미소가 걸렸다.

청산도의 볼거리는 유채꽃이 다가 아니다. 당리에서 섬의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푸른 청보리를 만날 수 있다. 봄은 꽃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저 싱그러운 청보리를 두고 봄을 꽃의 계절이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해가 조금 더 기울어져서 노란빛으로 대지에 떨어질 즈음 청보리밭은 한층 더 풍성한 빛깔을 띤다.

새벽 5시50분의 황홀경

눈이 번쩍 떠졌다. 청산도의 일출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는, 완도에 사는 지인의 말에 알람을 몇 개씩 맞춰놓고 잠들었다. 새벽 5시50분. 해는 아직 안 떴지만 텐트 안에서도 느낄 만큼 빛이 황홀했다. 청산도에서 하룻밤을 캠핑으로 결정한 덕분에 맞이할 수 있었던 아침 풍경이다. 숙영지로 택한 신흥해수욕장 뒤편으로 자줏빛 여명이 물들어 있었다. 한동안 넋을 놓고 그 새벽에 젖어 있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면서 맞은편 섬 뒤부터 오렌지 빛이 올라온다. 어림짐작으로 전날 찾아두었던 일출 포인트에 올랐다. 신흥해수욕장에서 진산마을로 넘어가는 언덕배기 중턱에 서자 섬 뒤쪽에서 해가 떠오른다. 마침 양식장으로 김을 걷으러 나가는 배가 통통거리며 바다를 가로질러 나가고, 이내 다른 배가 포구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런 해돋이는 섬에서만 맞이할 수 있는 자연의 예술이다.

텐트에서 천천히 밥을 지어먹고 가만히 앉아 해수욕장의 아침을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허리가 굽은 마을 어르신 한 분이 뒷짐을 지고 지나가며 말을 건다.

“바람이 찰 것인디, 괜찮았소?”

“네, 괜찮았습니다.”

“다행이요. 모쪼록 있고 싶을 때까지 푹 쉬다 가시요잉.”

말 한마디가 무척 살갑다. 처음 보는 이방인의 안부를 걱정하고 물어봐주는 정감이라는 것, 도시에서는 이제 좀처럼 만나기 힘든 감성이 됐다. 그런 살가움이 남아 있어서, 섬으로 자꾸만 이끌리듯 들어간다.

섬을 나오기 전, 다시 당리 서편제길을 찾았다. 어제보다도 더 선명한 노란빛이 푸른 하늘 아래 흔들린다. 살랑살랑 작은 꽃잎도 함께 흔들린다. 하늘 한번 쳐다보고 기지개를 쭉 켠다. 청량한 공기가 가슴 가득히 들어왔다. 아쉬워도 이제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다.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완도로 돌아가는 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섬에 들어가는 방법


완도 여객선터미널에서 청산도항 가는 배를 타면 된다. 느린섬 여행학교(061-554-6962), 청산도게스트하우스(061-555-0190), 청산도 구들장논보존협의회(061-555-2292)에 연락하면 도움받을 수 있다. 느린섬 여행학교는 2009년 폐교한 청산중학교를 리모델링한 곳으로, 숙박과 함께 슬로푸드, 조개껍데기 공예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섬에서 멀리 이동할 때는 완도청산택시(061-552-8519)를 이용하면 된다.

섬에서 할 수 있는 일


트레킹, 캠핑, 낚시 등이 가능하다. 서편제길(도락리 해안까지 이어지는 유채꽃밭으로 유명한 청산도의 대표 여행지), 상서리 옛담장(바람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만든 옛 돌담장), 파시문화거리(파시가 흥성하던 시절의 기억을 벽화와 조형물로 꾸민 청산도항 뒷골목), 지리청송해변(100년 이상 된 노송 700그루가 송림을 이루고 있는 곳. 낙조가 아름답다) 등이 대표적인 명소다. 범바위는 바람이 세게 불면 마치 호랑이가 우는 것 같다고 하는 곳으로, 자성이 강해서 가까이 다가가면 나침반이 빙글빙글 돈다. 신흥리해수욕장은 썰물이 되면 갯벌과 풀등을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으로 갯벌 생태를 관찰하거나 체험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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