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에, 또 느릿느릿페이지를 넘겼다
  • 김문영 (이숲 편집장)
  • 호수 608
  • 승인 2019.05.16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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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기대 없이 집어든 책이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점의 한가운데 만화 코너를 서성이다가 모노톤의 배경에 오뚝 서 있는 주인공이 담긴 표지가 눈에 띄었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아무 정보도 없었기에 독서의 즐거움이 배가된 걸까. 단숨에 정말 단숨에, 마치 영화에서 마약을 흡입하듯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겨 읽었다. 그다음에 또 한 번 읽을 땐 느릿느릿 정독했다.

이런 정격 극화의 태생이 웹툰이었다니 다소 놀라웠다. 그리고 상당 부분 내 어린 시절과 오버랩되기도 했는데, 세대가 달라도 공유했던 정서가 너무도 흡사해 다시 한번 놀랐다.

만화는 복잡하지 않지만 단단한 골격과 복선을 지니고 있다. 다소 허술해 보이는 흑백의 그래픽 사이사이,
만화 칸의 사이사이, 시간과 공간이 노닐고 그 한가운데 놀라운 서정이 깔려 있다.

가난과 고통은 많은 이의 미래를 풍요롭게 가꾸어주는 토양과도 같은 것일까. 주인공 미숙은 이름이 미숙인 탓에 어릴 적부터 ‘미숙아’라는 놀림을 받는다. 미숙은 교복에 붙은 명찰을 일부러 떼어낸다. 그렇게 이름을 지우고 싶은 존재로 꾸역꾸역 살아간다. 담임선생님이 부러워하는 시인 장호식을 아빠로 두었지만 그 아빠는 날마다 폭력을 휘두른다. 맞으면서도 자신을 희생한 채, 라이터를 조립하는 등 허드렛일을 하며 생활을 책임지는 건 엄마다.


미숙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빠가 던진 책 <무소유>에 맞아 평생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지닌 채 살아간다. 작가의 분신, 즉 주인공 장미숙은 언니를 의지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전학 온 재이와 친구가 되면서 점점 더 세상으로 눈을 넓혀간다. 그러자 “집이 작아지고 대문이 작아지고 언니도 작아졌다”.

<올해의 미숙>은 미숙이 10대의 아릿한 성장통을 겪고 성년이 되어가는 성장기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연대기적 서사가 아니라 부족하고 미숙한 인격체가 그 모든 장애와 미숙함을 조금씩 벗어가는 휴먼 다큐멘터리로 읽었다. 만화는 인트로에서 갑작스레 미숙과 언니 정숙의 (죽음을 예견하는) 투병기를 그려 보인다. 플래시백, 어린 미숙과 정숙의 유년이 그려진다. 작가는 이렇게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미숙의 성장통을 그려낸다.

짧지만 단단한 이야기와 메시지

낭만적인 시를 쓰는 시인 아빠의 현실 모습은 폭력뿐이었고 결국 그 아빠는 다발골수종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다. 작가는 엄마의 말을 빌려 자신의 말을 대신한다. 그 끔찍한 시련을 겪었으면서도 아빠의 병상을 지킨 엄마는 “더 나은 사람임을 보여주는 게 복수”라고 말한다. 미숙은 끝없이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꿈꾼다. 진돗개인 줄 알고 애지중지하던 강아지가 결국 똥개로 밝혀지자 아빠가 헌신짝처럼 버렸던 개의 이름을 ‘절미’라 짓고 잘못된 관계를 ‘바로 세우는’ 역할도 해낸다. 미숙은 절미와 독립해 살면서 마치 자신이 새 삶을 살 듯, 절미의 이름을 거듭 불러본다.

짧지만 단단한 이야기. 작품 <올해의 미숙>이 작가의 첫 장편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함의와 메시지를 선사해주는 책이다. “그동안의 일들이 먼 미래처럼 느껴진다”라는 마지막 대사 한쪽에 잃어버린 명찰 ‘장미숙’이 배치되어 있다. 그건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장미숙의 자존감이며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홀로 우뚝 선 자신의 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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