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강원도에서 엄청난 산불이 나서 강원도 고성, 인제, 강릉 일대의 숲이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그 불행의 검은 연기 뒤로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기적이 일어났지. 아니 전국에서 기적이 달려왔지. “이동 가능한 모든 소방차는 강원도로 집결하라”는 명령 아래 각지의 소방차들이 일제히 사이렌을 울리며 강원도로 달렸고, 그들과 힘을 합친 강원도 지역 군·관·민은 막막했던 대화재의 불길을 잡는 데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자연재해는 예고가 없고 예측할 수도 없으며 예상을 뛰어넘는 위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선다. 재난과 투쟁한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이기도 해. 인류는 빙하기를 견뎌냈고 파멸적인 화산 폭발이나 지진으로부터 삶을 보전해왔으며 홍수와 가뭄, 전염병과 기아의 파상공세로부터 삶을 지켜내왔으니까. 그런 뜻에서 우리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자연재해들과 그에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고 끝내 이겨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줄까 한다.

ⓒ시사IN 이명익조선은 경신대기근 이후 백성을 위한 법을 확대했다.
위는 강원도 산불을 끄기 위해 출동한 소방차들.

좀 엉뚱한 이야기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나물 사랑은 유별나지. 나물의 종류도, 요리법도 엄청나게 많잖아. 이런 문화가 형성된 이유는 그리 유쾌하지 않단다. 오랫동안 봄은 가을걷이가 떨어지고 봄보리는 패기 전인 암울한 상황, 즉 ‘보릿고개’와 맞물리는 계절이었어. 우리 조상들은 이 시기를 나물로 연명해야 했지. “99가지 나물 이름을 알면 3년 가뭄도 이겨낸다”라는 속담도 있을 정도야. 황해도, 평안도에서 불렸던 민요 ‘나물 타령’의 가사를 음미해보면 나물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는지 알 수 있어. “어영꾸부정 활나물, 한푼두푼 돈나물, 매끈매끈 기름나물, 돌돌말아 고비나물, 칭칭감아 감둘레, 집어뜯어 꽃다지, 쑥쑥뽑아 나상이, 어영저영 말맹이.” 수많은 아이와 어른들이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산으로 들로 헤매던 모습은 과거에는 무척 낯익은 풍경이었지.

가끔 이런 나물조차 씨가 마르는 상황이 발생했어. 〈삼국사기〉 이래 우리 역사서에는 풀뿌리와 나무껍질조차 귀한 기근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는데, 1670년 경술년과 1671년 신해년 두 해에 걸쳐서 발생한 대기근은 그야말로 파멸적이었지. 이를 우리 역사에서는 경신대기근(庚辛大饑饉)이라 부른다. 두 해 동안 조선은 그야말로 이상기후나 자연재해라는 평범한 단어로는 표현이 안 되는 재앙의 종합판에 직면했어.

1670년 새해가 되자마자 불길한 햇무리가 나타나고 유성이 출현하는 등 조짐이 이상했지. 그러더니 불덩이 같은 운석이 떨어지고 땅에서는 지진이 일어났어. 봄이 왔지만 날은 추웠고 눈이 내리고 우박이 쏟아졌다. 냉랭한 날씨에 모내기는 엄두도 못 내는 판에 가뭄이 이어졌어. 한 해 농사 결딴났다고 아우성이 터져 나왔는데 아직도 멀었다는 듯 메뚜기 떼가 조선을 덮쳤지. 그게 괜찮으려니 이번엔 가뭄 때문에 참은 걸 쏟아붓겠다는 듯 남부 지역에 홍수가 났고 뒤이어 태풍까지 온 국토를 쓸고 지나갔어. 날씨는 여전히 추워서 여름에도 서리가 내리는 곳이 많았다 하니 사람들은 날씨가 미쳐도 이렇게 미칠 수 있는가 싶었을 거야. 거기에 소와 사람들에게 전염병이 번져 픽픽 쓰러져 갔는데 167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다고 해. 100만여 명이 굶어 죽었다 할 정도니 조선 팔도 360개 고을 전체가 지옥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 “죽소(나라에서 죽을 나눠 주던 곳)에서 남편이 갑자기 죽자 옆에 있던 그의 아내는 먹던 죽을 다 먹고 나서야 곡을 했다(김덕진,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굶주림 앞에서 아내는 남편의 죽음이라는 슬픔도 미뤄야 했던 거야.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라는 말의 연원이지.

서인 정태화, 남인 허적 ‘발탁’

경신대기근(庚辛大饑饉) 당시 영의정을 지낸 허적의 초상.

상상을 초월하는 대재앙 앞에서 당시 영의정 허적은 이렇게 말하며 울었다는구나. “기근의 참혹함이 팔도가 똑같아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고 국가의 존망이 결딴났습니다.” 그래도 조선은 무너져 흩어지지는 않았어. 다른 나라 같으면 능히 나라가 ‘결딴’이 나고 왕조가 뒤집혔겠지만 조선은 버텨냈지. 허적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성상의 어질고 후덕하심이 결코 망국의 임금이 아니며, 신들도 볼품없으나 어찌 망국의 신하이겠습니까.” 아빠는 이걸 “우리는 망하지 않겠다.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라는 다짐으로 봤어. 그 와중에도 자기 배 채운 나쁜 놈도 많았고 제 재산 붙들고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악마들도 있었지만, 미증유의 대재앙 속에서 조선의 행정 시스템은 살아 있었다. 임금 이하 수많은 이들이 가슴을 치며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으로부터 놓여나도록 발버둥을 쳤거든. 그중 정태화라는 이도 있었지. 대기근을 전후해 허적과 함께 영의정을 지냈던 사람이야.

대기근 9년 전인 1661년, 상평창에서 진휼청을 독립시켜 굶주린 백성들을 돕는 업무를 전문화하자고 주장했던 이가 정태화였어. 이 조치는 말 그대로 특출한 선견지명으로 남지. 대기근이 벌어지자 진휼청은 비변사와 협조하여 강화도, 남한산성 등의 비상식량을 끌어내 백성들을 먹였고 1671년 1월쯤에는 도성과 지방 곳곳에 진휼소를 설치해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냈으니까. 기근 극복을 위해 관리들의 녹봉을 깎자는 말이 나왔을 때 그걸 깎아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반대가 만만치 않자 정태화는 이렇게 말하며 그 입을 막아버렸어. “그게 얼마 되지 않더라도 이렇게 극심한 흉년을 당해서는 먼저 절약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나아가 정태화는 국가 총력전을 촉구했어. “팔도에 흉황이 생겨 각 고을 창고를 모두 백성들에게 꾸어주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진휼할 자본이 고갈된 겁니다. 이제 남은 계책은 나라의 온갖 일들을 정리시키고 모두 줄여서 오로지 구황정책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벼슬을 팔아서라도, 왕실 재산을 줄여서라도 일단 대기근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정태화의 주장이었지. 이 총동원령이 전방위로 전개되면서 경신대기근은 가까스로 수습 단계에 접어들었다.

앞서 말한 또 다른 영의정 허적과의 관계는 정태화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한다. 허적은 남인, 정태화는 서인이었지만 정태화는 붕당에 앞서 인재를 볼 줄 알았어. 그는 평안도 관찰사 시절, 행정 능력이 돋보였던 허적을 평안도사로 발탁했던 거야. 앞서거니 뒤서거니 영의정을 맡으면서 경신대기근이라는 미증유의 참극을 감당했던 두 신하는 당색을 넘어 그렇게 맺어져 있었던 거지.

17세기는 이상기후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았던 때야. 경신대기근을 맞은 조선은 100만여 명에 이르는 백성의 희생을 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어. 대기근을 경험한 이후 대동법 등 백성을 위한 법은 더욱 확대됐고 사회안전망은 엉성하나마 비빌 언덕이 되었단다. “17세기는 위기에서 블루오션을 발견한 기회의 시대였다. … 그때의 재앙을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했다면 18세기 영조와 정조의 태평성대는 오지 않았을 것(김덕진,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이라는 해석은 그래서 가능할 거야.

모든 재난은 인간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떨어뜨리지만 동시에 더 위대하게 만들기도 해. 재난을 이겨낸 인간은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니까. “우리가 아무리 못나도 망한 나라의 신하는 아닙니다”라며 울었던 허적과 “효과가 있든 없든 공직자들이 먼저 월급을 깎는 모범을 보여야지”라고 일갈하던 정태화의 조선은 살아남았고 또 다른 발전의 기회를 잡았단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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